SERMON TEXT로마서 6:1-14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그리스도와 함께 산 자의 권세 [로마서 6:1-14]

여러분,

우리는 이 땅을 살아가면서 우리 자신의 힘으로는 벗어날 수 없을 것 같은 한계와 절망의 벽에 부딪혀 본 적이 있지 않습니까? 매일 거울을 마주하듯 자신을 들여다볼 때마다, 여전히 유혹에 흔들리고, 감정에 무너지며, 세상 염려에 짓눌려 있는 모습을 보며 "나는 왜 이 모양일까? 예수 믿는 내가 왜 여전히 죄에 끌려 다니고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을까?"라며 가슴을 치지는 않습니까?

우리는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이 땅을 살아가면서 매일 눈에 보이는 3차원의 물질 세계를 살아갑니다. 3차원의 세계는 오감(五感)으로 보고, 듣고, 만지고, 냄새 맡는 세계입니다. 병원의 진단서 한 장, 통장 잔고, 일상에서 일터에서 부딪히는 사람과의 갈등, 사업의 불황과 위기라는 3차원의 거친 파도가 우리 눈앞을 가로막을 때, 사람들은 그 환경에 매여 절망하고 한숨을 쉽니다.

지난 주에는 로마서 5장 1절부터 21절 말씀을 통해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성도가 누리는 '하나님과의 화평'과, 환난 중에서도 인내와 연단을 거쳐 부끄럽지 않은 소망을 이루어내는 십자가 사랑의 확증을 살펴보았습니다. 첫 사람 아담의 불순종으로 온 인류 위에 사망이 왕 노릇 하였으나, 마지막 아담이신 예수 그리스도 한 분의 순종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생명 안에서 왕 노릇'하는 존귀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사도 바울이 5장 20절에서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다"고 선언합니다.

사도 바울이 왜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서 완전히 죽었다고 선언하는지, 부활하신 예수의 새 생명이 어떻게 내 안에서 약동하는지, 그리고 우리가 어떻게 우리 몸을 죄에게 내주지 않고 의의 무기로 하나님께 드리며 승리할 수 있는지를 온몸으로 깨닫는 시간이 되어야 합니다. 오늘 본문 1절부터 14절 말씀을 통해, 3차원의 감각과 환경에 속아 살아왔던 낡은 옛사람을 십자가에 못 박고, 4차원의 믿음으로 부활의 주님과 완전히 하나 되어 생명 안에서 승리하는 우리들이 되어야 합니다.

1. 십자가에서 끝장난 옛 사람의 실존 (1-7절)

1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냐
2 그럴 수 없느니라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
3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냐
4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라
5 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도 되리라
6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의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죽어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 노릇 하지 아니하려 함이니
7 이는 죽은 자가 죄에서 벗어나 의롭다 하심을 얻었음이라

오늘 6장 1절에 이르러 또다시 인간의 간교한 죄성이 고개를 쳐듭니다. "은혜가 그렇게 크다면 죄를 더 마음껏 지어야 은혜도 더 폭포수처럼 쏟아지는 것 아닙니까?"

바울은 2절에서 벼락같이 외칩니다."그럴 수 없느니라. 죄에 대하여 이미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 바울은 오늘 본문을 통해 우리 신앙의 차원을 땅바닥의 3차원에서 영원한 하늘의 4차원의 영적 세계로 단숨에 끌어올립니다.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산다’는 연합의 신비입니다. 이것은 관념적인 도덕 교훈이 아닙니다. 창세기 1장에서 흑암과 혼돈의 바다를 향해 "빛이 있으라" 선언하시며 무(無)에서 유(有)를 창조하신 하나님의 전능하심입니다. 갈릴리 바다의 집어삼킬 듯한 거친 광풍과 파도를 향해 "잠잠하라, 고요하라" 꾸짖으시니 바람이 그치고 아주 잔잔하게 되었던 바로 그 창조주의 권능입니다(막4:39). 나흘이 지나 무덤 속에서 썩어 냄새가 나던 나사로를 향해 "나사로야 나오라" 부르시니 죽은 자가 수포를 동인 채 걸어 나왔던 그 부활의 4차원 영적 생명이, 오늘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는 우리 안에 성령으로 고스란히 임하는 것입니다.

3절과 4절을 보십시오.

3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냐
4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라

바울은 성도가 누구인가를 설명하기 위해 ‘세례(배프티스마, βάπτισμα)’의 본질을 꺼내 듭니다. 당시의 세례는 물속에 온몸을 완전히 푹 잠갔다가 다시 물 밖으로 끌어올리는 침례의 형태입니다. 물속 깊은 곳으로 사람의 머리와 온몸이 잠겨 들어가는 순간이 무엇을 의미합니까? "숨이 끊어졌다, 죽었다, 무덤에 장사 지낸 바 되었다"는 선언입니다.
그런데 3절을 보면 바울은 단순한 물세례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았다" 여기서 '합하여'라는 헬라어 전치사는 ‘에이스(εἰς)’입니다. 그리스도의 인격과 심장 속으로 완전히 침투하여 들어가 하나로 융합되었다는 뜻입니다.

2천 년 전 골고다 언덕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양손과 양발에 쇠못이 박히고 피를 흘리시며 숨을 거두실 때, 3차원의 눈으로 보면 십자가 위에는 오직 청년 예수 한 사람만이 매달려 죽은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시간을 초월하시는 성령의 4차원 영적 세계 안에서,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 한 분 안에 오늘 이 자리에 있는 저와 여러분의 부패한 ‘옛 사람’을 한 덩어리로 집어넣으십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운명하실 때, 죄의 쾌락을 좇고, 세상의 탐욕에 눈이 멀며, 하나님을 반역하던 나의 옛 자아가 예수와 함께 완전히 숨이 끊어졌습니다. 예수님이 아리마대 요셉의 차디찬 돌 무덤에 갇히셨을 때, 나의 모든 저주와 부끄러움과 죄의 유전 인자는 그 무덤 속에 영원히 매장되어 장사 지낸 바 되었습니다.

5절은 이 연합의 신비를 선언합니다.

5절 "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도 되리라"

여기서 '연합한 자'라는 단어는 헬라어로 ‘심퓌토스(σύμφυτος)’입니다. 이것은 원예학에서 나뭇가지를 접붙일 때 쓰는 단어입니다. 거칠고 쓸모없는 열매만 맺던 돌감람나무 가지를 뚝 잘라내어, 기름진 참감람나무 원줄기에 깊이 흠집을 내고 그 틈 속에 꽉 끼워 넣어 단단히 동여맵니다. 처음에는 죽은 것처럼 보이지만, 참 감람나무 뿌리에서 솟구쳐 올라오는 풍성한 수액과 진액이 접붙여진 돌 감람나무 가지 속으로 흘러 들어가면서, 이전의 돌 감람나무 성질은 죽고 참 감람나무의 극상품 열매를 주렁주렁 맺는 한 몸이 됩니다.

여러분, 이것이 4차원의 신비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라는 거룩한 생명나무에 성령으로 완전히 접붙여진 자들입니다. 예수의 죽음이 내 죽음이 되었고, 예수의 장사 지냄이 내 장사가 되었습니다. 왜 하나님께서 우리의 옛 사람을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으셨습니까? 6절과 7절입니다.

6-7절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의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죽어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 노릇 하지 아니하려 함이니, 이는 죽은 자가 죄에서 벗어나 의롭다 하심을 얻었음이라"

사형수가 감옥 안에서 흉악한 범죄를 저지르고 사형 판결을 받습니다. 교도관들이 아무리 법봉을 휘두르고 쇠고랑을 채워도 사형수가 이미 숨을 거두어 영안실에 싸늘한 시체로 누워 있다면, 그 어떤 법관이나 경찰도 그 시체를 향해 수갑을 채우거나 징역형을 집행할 수 없습니다. 죽음은 이전의 모든 법적 지배와 구속을 단번에 무효화하고 영원히 끊어내는 절대적인 종결입니다.

죄가 아무리 내 귀에 대고 속삭이며 나를 유혹하려 해도, 3차원의 눈에는 내가 살아서 숨 쉬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4차원 믿음의 법정 안에서 하나님은 선언하십니다. "너는 십자가에서 이미 예수와 함께 죽은 자다. 죄의 지배는 너에게서 완전히 끝장났다"

기독교 역사상 가장 위대한 신학자였던 성 아우구스티누스(St. Augustine, 354~430)의 회심 일화가 이를 명쾌하게 증명해 줍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청년 시절 방탕과 정욕의 노예가 되어 살아 갑니다. 사생아를 낳고, 이단 마니교에 빠져 쾌락의 진흙탕 속을 뒹굽니다. 그의 어머니 모니카는 아들을 위해 눈물로 기도합니다. 어느 날 밀라노의 정원에서 "듣고 읽으라(Tolle Lege)"는 어린아이의 노랫소리를 듣고, 그는 성경을 펼쳤을 때, 성령의 음성을 듣습니다. 로마서 13장 13~14절 "낮에와 같이 단정히 행하고 방탕하거나 술 취하지 말며 음란하거나 호색하지 말며 다투거나 시기하지 말고 /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는 말씀에 심장이 관통되어 아우구스티누스는 회심합니다.

그가 완전히 거듭난 후, 어느 날 거리를 걸어가고 있습니다. 과거 청년 시절 그와 함께 음란한 죄를 짓고 방탕하게 어울렸던 옛 여인이 저 멀리서 아우구스티누스를 발견하고 반갑게 달려옵니다. "아우구스티누스! 아우구스티누스! 나예요, 나! 왜 나를 보고도 모른 척 지나쳐 가나요?" 아우구스티누스는 걸음을 멈추지 않고 앞을 똑바로 바라보며 조용하지만 우레와 같은 목소리로 이렇게 대답합니다."여인이여, 당신이 알고 있던 옛 아우구스티누스는 이미 십자가에서 죽었소. 지금 당신 앞에 걸어가고 있는 사람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다시 살아난 새로운 아우구스티누스요"

그 여인은 얼어붙은 듯 멈춰 섰고, 아우구스티누스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자신의 길을 걸어갑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와 함께 죽은 자의 당당한 태도입니다. 사탄 마귀가 우리의 옛 상처와 과거의 죄책감을 들추어내며 "너는 과거에 이런 죄를 지었잖아, 너는 실패자야, 너는 다시 넘어질 거야"라고 속삭일 때, 3차원의 거짓 감정에 흔들리지 않아야 합니다. "사탄아 물러가라. 네가 고발하는 옛 죄인 아무개는 2천 년 전 갈보리 십자가에서 예수와 함께 이미 죽어서 땅에 묻혔다. 나는 예수 안에서 새 생명을 얻은 새로운 피조물이다."라고 단호하게 선포하는 우리들이 되어야 합니다.

2. 살아 있는 자로 여길지어다 (8-11절)

8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그와 함께 살 줄을 믿노니
9 이는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셨으매 다시 죽지 아니하시고 사망이 다시 그를 주장하지 못할 줄을 앎이로라
10 그가 죽으심은 죄에 대하여 단번에 죽으심이요 그가 살아 계심은 하나님께 대하여 살아 계심이니
11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께 대하여는 살아 있는 자로 여길지어다

사도 바울은 십자가의 죽음에서 멈추지 않습니다. 기독교 신앙은 무덤에 갇힌 종교가 아닙니다. 8절을 보십시오.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그와 함께 살 줄을 믿노니"

안식 후 첫날 새벽, 어두운 무덤을 막고 있던 육중한 바위가 굴러 떨어지고, 사망의 권세를 깨뜨리시며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십니다. 9절과 10절 말씀처럼, 부활하신 예수님은 다시는 죽지 아니하시고, 사망의 권세가 다시는 그분을 손끝 하나 건드리지 못합니다. 그분의 살아 계심은 영원히 거룩하신 하나님 아버지께 대하여 살아 계심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예수께서 부활하실 때 그분 혼자 살아나신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에베소서 2장 5절과 6절은 선포합니다.

에베소서 2:5~6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는 은혜로 구원을 받은 것이라)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

예수님이 무덤에서 걸어 나오실 때, 성령의 4차원적 권능 안에서 우리도 예수의 부활의 손을 붙잡고 무덤 밖으로 함께 걸어 나온 것입니다. 우리의 심령 속에는 이제 세상의 썩어질 생명이 아니라, 하늘의 영원하고 쇠하지 않는 '부활의 DNA, 영생의 새 생명(조에, ζωή)'이 맥박치고 있습니다.

그러하기에 바울은 11절에서 오늘 본문의 가장 핵심적인 영적 명령을 내립니다. 다 함께 11절 말씀을 한 목소리로 가슴에 새기듯 읽어보겠습니다.

11절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께 대하여는 살아 있는 자로 여길지어다"

여기에 기독교 신앙의 가장 위대한 열쇠가 들어 있습니다. "여길지어다" 헬라어로 ‘로기제스데(λογίζεσθε)’입니다. 로마서 4장에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믿음을 보시고 "의로 여기셨다(로기조마이)"고 할 때 쓰였던 바로 그 단어입니다.

이것은 "그렇게 한번 상상해 보아라, 자기 최면을 걸어보아라"는 뜻이 아닙니다. 내 기분이나 감정, 내 육신의 눈에 보이는 현실과 상관없이, 하나님께서 하늘의 영원한 회계 장부에 기록해 놓으신 객관적인 진리를 그대로 인정하고 내 것으로 확정(계산)해 넣으라는 뜻입니다.

눈에 보이는 3차원의 세계와, 눈에 보이지 않지만 엄연히 실재하는 4차원의 영적 세계의 차이를 보십시오. 구약 열왕기하 6장을 보면 아람(이스라엘 적국) 왕의 대군이 야간에 이스라엘의 도단성을 말과 병거로 겹겹이 포위합니다. 아침 일찍 일어난 엘리사의 사환 게하시가 성 밖을 내다보았을 때, 눈앞에 보이는 3차원의 현실은 절망 그 자체입니다. 수만 명의 아람 군대가 칼과 창을 번뜩이며 도단 성을 에워싸고 있습니다. 사환 게하시는 사시나무 떨듯 떨며 엘리사에게 비명을 지릅니다.

"아아, 내 주여 우리가 어찌하리이까"

그때 하나님의 사람 엘리사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말합니다. "두려워하지 말라. 우리와 함께 한 자가 그들과 함께 한 자보다 많으니라." 그리고 엘리사가 기도합니다.

"여호와여 원하건대 그의 눈을 열어서 보게 하옵소서"

하나님께서 사환 게하시의 영안을 열어 4차원의 영적 세계를 보게 하셨을 때, 어떤 광경이 펼쳐집니까? 불말과 불병거가 온 산에 가득하여 엘리사를 호위하고 있습니다(왕하 6:17). 3차원의 눈만 가지고 살아가면 세상의 군대와 위협 앞에 벌벌 떨 수밖에 없지만, 4차원의 믿음의 눈이 열리면 나를 둘러싸고 계신 하나님의 불말과 불병거, 전능하신 승리의 능력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갈릴리 호수에서 주무실 때 광풍이 몰아쳐 배에 물이 가득 찼습니다(막 4:37~41). 제자들은 3차원의 거센 파도를 보며 "우리가 죽게 되었나이다" 울부짖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일어나셔서 4차원의 창조주의 음성으로 명령하십니다. "잠잠하라 고요하라" 그 즉시 바람이 그치고 바다가 잔잔해집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꾸짖으십니다. "어찌하여 이렇게 무서워하느냐? 너희가 어찌 믿음이 없느냐?"
이것이 진정한 믿음입니다. 내 육신의 감정은 "너는 아직도 죄인이야, 너는 질병에 걸렸어, 너는 실패했어"라고 거짓말을 합니다. 그것은 3차원의 그림자일 뿐입니다. 믿음의 사람은 4차원의 약속의 말씀을 봅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나는 십자가에서 예수와 함께 죽었고, 예수 안에서 하나님을 향하여 시퍼렇게 살아 있는 자라고 하셨다. 나는 내 감정을 믿지 않는다. 나는 내 통장 잔고나 눈앞의 환경을 믿지 않는다. 오직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으로 부르시는 하나님의 영원한 말씀을 믿고, 나 자신을 살아 있는 자로 여긴다"

이 4차원의 믿음이 매일 아침 우리들의 입술에서 선포되어야 합니다.

3. 너희 지체를 의의 무기로 드리라 (12-14절)

12 그러므로 너희는 죄가 너희 죽을 몸을 지배하지 못하게 하여 몸의 사욕에 순종하지 말고
13 또한 너희 지체를 불의의 무기로 죄에게 내주지 말고 오직 너희 자신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난 자 같이 하나님께 드리며 너희 지체를 의의 무기로 하나님께 드리라
14 죄가 너희를 주장하지 못하리니 이는 너희가 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에 있음이라

사도 바울은 이제 4차원의 믿음의 확신을 가진 성도들이, 매일 발 딛고 살아가는 3차원의 삶의 현장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구체적인 행동 강령을 제시합니다.

12절과 13절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너희는 죄가 너희 죽을 몸을 지배하지 못하게 하라. 너희 지체를 불의의 무기로 죄에게 내주지 말고, 오직 너희 지체를 의의 무기로 하나님께 드리라"

여기에 '무기'라는 단어는 헬라어로 ‘호플론(ὅπλον)’입니다. 당시 로마 중무장 보병들이 전쟁터에서 손에 쥐고 목숨을 걸고 싸우던 '방패와 창과 검'을 뜻하는 군사 용어입니다.
우리의 눈, 우리의 입술, 우리의 손과 발, 우리의 뇌세포와 시간과 물질이라는 지체 (肢體)는 중립 지대에 머물러 있지 않습니다. 이 지체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쓰임 받는 '거룩한 의의 병기(무기)'가 되든지, 아니면 마귀의 앞잡이가 되어 남을 헐뜯고 음란과 탐욕을 일삼는 '더러운 불의의 흉기'가 되든지 둘 중 하나로 쓰임 받게 됩니다.

날카로운 수술용 칼(메스)을 보십시오. 그 칼이 사람을 살리는 명의(외과의사)의 손에 쥐어지면 썩어 문드러진 암 덩어리를 도려내어 꺼져가는 생명을 건져내는 거룩한 '생명의 도구'가 됩니다. 그러나 그 똑같은 칼이 골목길 강도 살인마의 손에 쥐어지면 무고한 사람의 가슴을 찔러 피를 흘리게 만드는 끔찍한 '살인 흉기'가 됩니다. 칼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그 칼을 쥐고 있는 주인이 누구냐가 문제입니다.

이전에는 마귀가 우리의 눈과 입과 손발을 쥐고 불의의 흉기로 휘둘렀습니다. 우리의 입술은 독사의 독을 품고 남을 저주하고 상처 주는 데 쓰였고, 우리의 발은 죄짓는 자리에 달려가기에 빨랐습니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난 존귀한 자들입니다. 이제 우리의 눈은 말씀을 주야로 묵상하는 거룩한 렌즈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의 입술은 낙심한 이웃을 살리고 하나님을 찬양하는 은혜의 통로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의 손과 발은 비즈니스 현장과 가정에서 정직과 사랑을 실천하며 쓰러진 지체를 일으켜 세우는 의의 무기가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14절에서 사도 바울은 승리의 개선가를 울립니다.

14절 "죄가 너희를 주장하지 못하리니, 이는 너희가 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에 있음이라"

왜 죄가 우리를 결코 주장하지 못합니까? 우리가 서 있는 영적 영토가 바뀌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정죄하고 저주하는 율법의 영토(법 아래)에서 완전히 빠져나와, 십자가의 보혈이 강물처럼 흐르고 성령의 생명수가 넘쳐나는 ‘은혜의 영토(은혜 아래)’로 이주했습니다.

조선시대 노비가 압록강을 건너 자유의 땅으로 넘어가 왕의 아들로 입적되었다면, 옛 노비 문서와 옛 주인 양반의 호통은 더 이상 아무런 법적 효력이 없습니다. 마귀가 와서 우리를 흔들 때마다 "죄야, 불신아, 너희들은 나를 더 이상 주장하지 못한다. 내 옛 주인은 십자가에서 죽었다. 내 새 주인은 만 왕의 왕 예수 그리스도시다. 나는 지금 거룩한 하나님의 은혜 아래 있다" 라고 단언해야 합니다.

사도행전 16장을 보면 사도 바울과 실라가 빌립보에서 복음을 전하다가 옷이 찢기고 수없이 매를 맞은 채 깊은 옥에 갇히는 절망적인 장면이 나옵니다. 온몸은 피투성이가 되었고, 뼈마디는 부러질 듯 쑤셔오며, 발은 굵은 나무 차꼬에 든든히 채워집니다. 냄새와 냉기만이 감도는 지하 감옥의 막다른 골목입니다. 3차원의 눈과 감각으로 보면 그곳은 탄식과 비명, 억울함과 절망의 탄식이 터져 나와야 마땅한 자리입니다.

사도행전 16장 25절, "한밤중에 바울과 실라가 기도하고 하나님을 찬송하매 죄수들이 듣더라" 바울과 실라는 3차원의 쇠창살과 감옥의 두께에 갇히지 않습니다. 그들은 육신의 눈을 감고, 시공간을 초월하여 역사하시는 '4차원의 하나님'께 영적 주파수를 맞춥니다. "이에 갑자기 큰 지진이 나서 옥터가 움직이고 문이 곧 다 열리며 모든 사람의 매인 것이 다 벗어진지라" 3차원의 단단한 바위벽과 쇠창살, 무거운 옥터가 4차원의 전능하신 하나님의 권능 앞에 사정없이 진동하기 시작합니다. 하나님의 역사는 우리의 3차원적인 계산과 감각 너머에서 일어납니다. 지금 내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하나님이 일하시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보이지 않는 영의 세계, 4차원의 거룩한 영역에서 이미 졸지도 주무시지도 않으시며 우리를 위해 거대한 승리의 지진을 준비하고 계십니다.

4차원의 영적 권세로 세상을 정복하는 우리들이 되어야 합니다.

오늘 로마서 6장 1절부터 14절은 3차원의 한계에 갇혀 무기력하게 주저앉아 있던 우리를 흔들어 깨우시는 성령의 우레입니다.

(1) 그리스도와 함께 죽은 십자가와 완전한 결별을 선포해야 합니다. 죄의 유혹과 옛 성품이 불쑥 튀어나올 때마다 타협하지 말아야 합니다. "나는 이미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다"라고 단호하게 선언해야 합니다.

(2) 4차원의 믿음으로 나 자신을 '하나님을 향하여 살아 있는 자'로 확신해야 합니다.
환경의 바람과 파도를 보며 두려워하지 않아야 합니다. 죽은 자를 살리시며, 광풍을 잠잠케 하시고, 없는 것을 있는 것으로 부르시는 창조주 하나님이 내 안에 성령으로 살아 계십니다. "내 믿음대로 될지어다." 하신 주님의 약속을 붙들고 당당하게 일어서야 합니다.

(3) 우리의 온몸과 삶의 터전을 '하나님의 의의 무기'로 아낌없이 내어드려야 합니다. 텐트 메이커로서 매일 살아가는 치열한 일터와 가정, 비즈니스의 현장이 바로 거룩한 영적 전쟁터입니다. 이기적인 이익과 욕심을 위해 지체를 내주지 말고, 하나님의 공의와 정직, 사랑과 생명을 전파하는 강력한 의의 병기로 우리의 손과 발을 드려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살다 보면 주변 사람의 말에 상처받고, 내 힘의 한계에 부딪혀 낙심할 때가 있습니다. 자신의 감정 때문에, 보이는 것 때문에, 주어진 현실 때문에, 우리는 부정적이거나, 낙담하거나, 절망하기도 합니다. 주변을 돌아보면, 우리나라 조국 대한민국이 처한 현실을 바라보면 앞이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영의 세계는 엄연히 존재하며 성령 하나님께서는 지금도 살아 역사하십니다. 눈에 보이는 3차원의 현실 뒤에서 역사하시는 4차원의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이루어 주실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므로 미리 선포하고 그 응답을 확신하면서 기쁨이 충만한 우리들이 되어야 합니다.

이번 한 주간, 은혜 아래 있는 자답게 어둠의 지배를 벗어나 이를 능히 이기고, 내 안에 사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생명이 충만하므로 삶의 현장에서 승리의 개가를 드높이는 우리들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바라는 것을 이루어주실 하나님을 신뢰하며 확신하므로 미리 감사 기도를 드리며, 이루어 주실 환경을 현실로 선포하는 우리들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한 우리는 주님과 동행하는 강한 용사임을 잊지 않아야 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오늘 말씀을 통해 우리가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십자가에서 죽었고, 그와 함께 무덤에 장사 지낸 바 되었으며,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예수 안에서 새 생명으로 다시 살아났음을 밝히 보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보이는 3차원의 거친 환경과 연약한 감정에 속아, 여전히 죄의 유혹에 끌려 다니며 한숨짓던 우리의 불신앙을 용서하여 주옵소서.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으로 부르시고, 감옥 차꼬에서 풀려나게 하시며, 광풍을 잠잠케 하신 창조주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게 하옵소서.

이제는 우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영원히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께 대하여는 살아 있는 자로 날마다 믿음의 선언을 하게 하옵소서. 우리의 눈과 입술, 손과 발을 불의의 병기로 죄에게 내주지 않게 하시옵고, 거룩하신 하나님의 손에 붙들린 의의 무기가 되게 하옵소서. 우리가 발 딛고 살아가는 치열한 일터와 가정 속에서 정직과 사랑으로 생명의 꽃을 피워내며, 은혜 아래 있는 자의 참된 권세와 자유를 만방에 증거하는 승리의 한 주간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