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RMON TEXT로마서 4:1-25

아브라함의 믿음의 자취를 따라 [로마서 4:1-25]

아브라함의 믿음의 자취를 따라

로마서 4:1-25 (개역개정)

저로부터 수천만원을 차용한 한 지인이 빌려간 자금을 갚기 전에는 자신이 죽을 수도 없다는 절절한 내용의 문자를 보내 왔습니다. 문자를 보는 순간 만감이 교차하였습니다. 아직 상환하지는 않았지만, 그 상환하겠다는 마음은 진정성이 있어 보여 그 지인이 달리 보였습니다. 그가 처한 상황이 얼마나 어려웠으면 그렇게 표현했겠습니까?

우리 자신은 누군가에게 진 큰 빚이 완전히 탕감되었다는 통보를 받아본 적이 있습니까? 우리는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이 땅을 살아가면서 매일 크고 작은 인간적인 거래와 계약을 맺으며 살아갑니다. 세상의 법칙은 언제나 명확합니다. 일한 만큼 대가를 받고, 노력한 만큼 보수를 챙기며, 부채는 상환하여야 하며, 자격과 조건을 갖추어야만 그에 합당한 보상을 얻습니다. 세상은 철저히 '행위와 실적의 법'으로 돌아갑니다.

그런데 만약 하나님 나라의 영원한 생명과 구원도 세상처럼 '인간의 행위와 율법적 실적'으로 얻어내는 것이라면, 과연 이 자리에 앉아 있는 우리 중 몇 사람이나 천국 문을 통과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위에서 화목제물이 되어 흘리신 피로 말미암아, 죄의 종노릇 하던 우리를 값없이 속량해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인간에게는 자신의 선행이나 종교적 의를 자랑할 근거가 털끝만큼도 없으며, 오직 믿음의 법으로만 의롭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엄청난 복음 선포 앞에서도 사도 바울 당시 유대인들은 이에 쉽게 승복하지 않습니다.

이에 사도 바울은 로마서 4장에 들어서자마자 유대인들이 가장 신성시하고 자랑하던 바로 그 인물, '아브라함'을 정면으로 소환합니다. 그리고 성경 창세기 본문의 역사적 연대와 기록을 하나하나 짚어가며, 반박할 수 없는 치밀하고도 완벽한 성령의 논리로 유대인들의 율법주의적 자만을 산산조각 냅니다. 오늘 본문 1절부터 25절 말씀을 통해, 우리 어설픈 행위의 공로를 배설물처럼 버려야 합니다.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으로 부르시는 전능하신 하나님만을 온전히 신뢰함으로, 아브라함이 걸어갔던 믿음의 자취를 묵묵히 따르는 우리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1. 성경의 증언과 일한 것이 없이 받는 은혜의 복 (1-8절)

1 그런즉 육신으로 우리 조상인 아브라함이 무엇을 얻었다 하리요
2 만일 아브라함이 행위로써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면 자랑할 것이 있으려니와 하나님 앞에서는 없느니라
3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냐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그것이 그에게 의로 여겨진 바 되었느니라
4 일하는 자에게는 그 삯이 은혜로 여겨지지 아니하고 보수로 여겨지거니와
5 일을 아니할지라도 경건하지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나니
6 일한 것이 없이 하나님께 의로 여기심을 받는 사람의 복에 대하여 다윗이 말한 바
7 불법이 사함을 받고 죄가 가리어짐을 받는 사람들은 복이 있고
8 주께서 그 죄를 인정하지 아니하실 사람은 복이 있도다 함과 같으니라

1절과 2절에서 바울은 유대인들의 가장 취약한 허를 찌릅니다. "만일 아브라함이 행위로써 의롭다 하심을 받았다면 사람 앞에서는 떵떵거리며 자랑할 것이 있었을지 모르지만,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는 자랑할 것이 전혀 없다"는 것입니다. 바울의 이 선언은 감정적인 주장이 아닙니다. 바울은 3절에서 이 결정적인 증거를 들이댑니다.

3절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냐?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그것이 그에게 의로 여겨진 바 되었느니라"

바울이 인용한 말씀은 구약 창세기 15장 6절입니다. 당시 아브라함은 자식이 없어 절망하고 있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장막 밖으로 이끌고 나가 밤하늘을 가리키시며 말씀하십니다. "하늘을 우러러 뭇별을 셀 수 있나 보라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창15:5) 그때 아브라함이 한 일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금식을 한 것도 아니요, 선행을 베푼 것도 아니요, 율법을 지킨 것도 아닙니다. 그저 밤하늘의 별을 바라보며 하나님의 약속을 '그대로 믿었을 뿐'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셨다"고 기록합니다.

여기서 '여겨졌다'는 단어는 헬라어로 ‘로기조마이(λογίζομαι)’입니다. 이것은 상업 회계 장부에서 쓰이던 금융 용어입니다. 내 통장 잔고는 완전히 마이너스 0원인데, 빚으로 가득 찬 통장에 왕이신 하나님께서 수조 원의 거액을 공짜로 입금해 주시고 "이제 너는 빚이 없는 부자다"라고 회계 장부에 기록해 주시는 '은혜의 전가(Imputation)'를 의미합니다.

바울은 4절과 5절에서 우리 일상의 명쾌한 비유를 들어 이를 설명합니다. 하루 종일 일터에서 땀 흘려 일한 노동자가 월급을 받을 때, 사장에게 허리를 굽히며 "사장님, 제게 이런 엄청난 은혜와 호의를 베풀어 주셔서 감사합니다"라고 눈물 흘리는 사람이 있겠습니까? 없습니다. 그것은 은혜가 아니라 마땅히 받아야 할 '노동의 대가이자 삯(보수)'입니다. 그러나 5절을 보십시오.

5절 "일을 아니할지라도 경건하지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나니"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일한 것이 없는 자들입니다. 아니, 일한 것이 없을 뿐만 아니라 도리어 하나님을 거역하고 죄만 짓던 '경건하지 아니한 자'들입니다. 그런데도 하나님께서는 십자가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redemption)을 믿는 자에게, 그 믿음 하나만을 보시고 죄인의 장부에 "의인"이라는 도장을 쾅 찍어주십니다. 그러니 이것이 어찌 보수이겠습니까? 이것이야말로 측량할 수 없는 절대적인 '은혜'인 것입니다. 바울은 유대인들이 아브라함 다음으로 존경하는 성왕 '다윗'의 고백을 6절부터 8절까지 덧붙여 못 박습니다.

시편 32:1~2 "허물의 사함을 받고 자신의 죄가 가려진 자는 복이 있도다 / 마음에 간사함이 없고 여호와께 정죄를 당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다윗은 밧세바와 간음죄를 짓고, 그 남편 우리아 장군을 살인교사죄로 전쟁터에서 죽게 하므로 사형에 처해져야 마땅했던 당시 흉악한 대 죄인입니다. 그런 다윗이 하나님께 나아가 노래했던 최고의 복이 무엇입니까? 부귀영화나 왕권이 아닙니다. "일한 것이 없이, 하나님께 거저 죄 사함을 받고 의롭다 여기심을 받는 복"입니다. 우리가 누리는 복이 바로 이 복입니다. 내가 잘나서 구원받은 것이 아닙니다. 십자가의 보혈로 내 더러운 죄를 가려주시고, 죄 없다고 인정해 주시는 값없는 용서의 복을 누리는 우리들이 되어야 합니다.

2. 할례와 율법에 앞서는 믿음 (9-16절)

9 그런즉 이 복이 할례자에게냐 혹은 무할례자에게도냐 무릇 우리가 말하기를 아브라함에게는 그 믿음이 의로 여겨졌다 하노라
10 그런즉 그것이 어떻게 여겨졌느냐 할례시냐 무할례시냐 할례시가 아니요 무할례시니라
11 그가 할례의 표를 받은 것은 무할례시에 믿음으로 된 의를 인친 것이니 이는 무할례자로서 믿는 모든 자의 조상이 되어 그들도 의로 여기심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12 또한 할례자의 조상이 되었나니 곧 할례 받을 자에게뿐 아니라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무할례시에 가졌던 믿음의 자취를 따르는 자들에게도 그러하니라
13 아브라함이나 그 후손에게 세상의 상속자가 되리라고 하신 언약은 율법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요 오직 믿음의 의로 말미암은 것이니라
14 만일 율법에 속한 자들이 상속자이면 믿음은 헛것이 되고 약속은 파기되었느니라
15 율법은 진노를 이루게 하나니 율법이 없는 곳에는 범법도 없느니라
16 그러므로 상속자가 되는 그것이 은혜에 속하기 위하여 믿음으로 되나니 이는 그
약속을 그 모든 후손에게 굳게 하려 하심이라 율법에 속한 자에게뿐만 아니라 아브라함의 믿음에 속한 자에게도 그러하니 아브라함은 우리 모든 사람의 조상이라

9절과 10절에서 사도 바울의 천재적이고도 날카로운 논리가 빛을 발합니다. 유대인들은 "그래도 할례를 받아야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고 구원을 받지 않느냐"고 집요하게 물고 늘어집니다. 이에 바울은 역사적 연대표를 펼쳐놓고 묻습니다. 10절입니다.

10절 "그런즉 그것이 어떻게 여겨졌느냐? 할례시냐 무할례시냐? 할례시가 아니요 무할례시니라" 창세기의 연대를 보면 바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1.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어 의롭다 칭함을 받은 사건은 창세기 15장입니다. 이때 아브라함의 나이는 대략 85세 전후입니다.
2. 그런데 아브라함이 몸에 할례를 받은 사건은 창세기 17장으로, 그의 나이 99세 때입니다.

무려 14년 이상의 시간적 격차가 존재합니다. 아브라함은 몸에 칼을 대어 할례를 받기 최소 14년 전, 즉 '무할례자로 이방인과 똑같은 상태'였을 때 이미 하나님으로부터 완전한 의인으로 인정받습니다. 그렇다면 아브라함이 나중에 받은 할례는 도대체 무엇입니까? 11절입니다.

11 그가 할례의 표를 받은 것은 무할례시에 믿음으로 된 의를 인친 것이니 이는 무할례자로서 믿는 모든 자의 조상이 되어 그들도 의로 여기심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이미 무할례 시에 믿음으로 얻은 의를 확증하고 확인해 주는 ‘도장(인침, Seal)’이자 외적인 표징(Sign)에 불과합니다. 이는 마치 등기소에 가서 집문서를 작성하는 것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매수자가 돈을 다 지불하고 계약이 성립된 후에 인감도장을 찍는 것은, 이미 체결된 계약의 유효함을 확인하는 증표일 뿐입니다. 도장 자체가 집을 사주는 것이 아닙니다. 마찬가지로 할례는 구원의 조건이 아니라, 이미 믿음으로 의롭게 된 자에게 하나님께서 찍어주신 확인 도장입니다.

하나님께서 왜 아브라함을 14년 동안이나 무할례 상태로 두셨다가 의롭다 하셨겠습니까? 11절과 12절의 말씀처럼, 할례를 받지 않은 이방인이라 할지라도 예수를 믿으면 아브라함의 영적 자손이 되게 하시고, 혈통적 유대인이라도 아브라함이 가졌던 '그 믿음의 자취'를 따라야만 참된 자손이 되게 하려 하심입니다. 더 나아가 13절과 14절을 보십시오.

13 아브라함이나 그 후손에게 세상의 상속자가 되리라고 하신 언약은 율법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요 오직 믿음의 의로 말미암은 것이니라
14 만일 율법에 속한 자들이 상속자이면 믿음은 헛것이 되고 약속은 파기되었느니라

율법의 문제는 더 명확합니다. 하나님이 시내산에서 모세를 통해 율법을 주신 것은 아브라함 시대로부터 무려 430년 뒤의 일입니다(갈 3:17).

17 내가 이것을 말하노니 하나님께서 미리 정하신 언약을 사백삼십 년 후에 생긴 율법이 폐기하지 못하고 그 약속을 헛되게 하지 못하리라

아브라함이 세상의 상속자가 되리라는 언약을 받은 것은 율법 조문이 세상에 존재하기도 430여년 전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율법을 지켜서 아브라함의 복을 받는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그렇다면 하나님은 왜 430년 뒤에 율법을 주셨습니까? 율법의 기능은 무엇입니까? 15절입니다.

15 율법은 진노를 이루게 하나니 율법이 없는 곳에는 범법도 없느니라

15절 "율법은 진노를 이루게 하나니 율법이 없는 곳에는 범법도 없느니라" 율법의 기능은 인간을 구원하는 사다리가 아니라, 인간이 죄인임을 폭로하여 정죄하는 '속도도 측정 카메라'와 같습니다. 새벽에 출근할 때 도로에 속도제한 표지판이 전혀 없을 때는 시속 120km로 달리든 140km로 달리든 법적으로 '과속 범법자'가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제한속도 시속 100km"라는 표지판을 세우고 고성능 단속 카메라를 설치하는 순간, 110km이상으로 달리던 모든 운전자는 꼼짝없이 과속 딱지를 떼이고 벌금을 내야 하는 '범법자'로 전락합니다. 표지판과 카메라가 운전자를 안전하게 목적지까지 데려다줍니까? 아닙니다. 표지판은 법을 어겼다는 사실을 적발하고 벌금을 물리는 기능만 할 뿐입니다. 율법이 바로 이 단속 카메라입니다. 인간 내면에 숨어 있던 추악한 죄악을 들추어내어, 하나님의 무서운 진노 아래 있음을 깨닫게 하는 기능을 할 뿐입니다.

그러므로 16절 말씀처럼, 구원이 흔들리지 않는 영원한 반석이 되게 하기 위해 하나님은 행위가 아닌 '은혜'에 속하게 하셨고, 자격이 아닌 '믿음'으로만 얻도록 하셨습니다. 만약 구원의 조건이 우리의 행위나 율법 준수에 달려 있다면, 우리는 하루에도 수십 번씩 구원을 잃어버리고 지옥의 공포에 떨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죄를 사하여 주시는 믿음의 은혜로 우리는 안심하고 살아갑니다.

3.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는 믿음과 부활의 소망 (17-25절)

17 기록된 바 내가 너를 많은 민족의 조상으로 세웠다 하심과 같으니 그가 믿은 바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으로 부르시는 이시니라
18 아브라함이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었으니 이는 네 후손이 이같으리라 하신 말씀대로 많은 민족의 조상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19 그가 백 세나 되어 자기 몸이 죽은 것 같고 사라의 태가 죽은 것 같음을 알고도 믿음이 약하여지지 아니하고
20 믿음이 없어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하지 않고 믿음으로 견고하여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21 약속하신 그것을 또한 능히 이루실 줄을 확신하였으니
22 그러므로 그것이 그에게 의로 여겨졌느니라
23 그에게 의로 여겨졌다 기록된 것은 아브라함만 위한 것이 아니요
24 의로 여기심을 받을 우리도 위함이니 곧 예수 우리 주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를 믿는 자니라
25 예수는 우리가 범죄한 것 때문에 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시기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

그렇다면 아브라함이 가졌던 믿음의 본질은 도대체 어떤 믿음입니까? 17절을 다 함께 한 목소리로 읽어보겠습니다.

17절 "그가 믿은 바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으로 부르시는 이시니라"

아브라함이 믿었던 하나님은 두 가지 위대한 창조의 능력을 가지신 분이십니다.

첫째는 '죽은 자를 살리시는 부활의 하나님'이시요, 둘째는 '무(無)에서 유(有)를 창조하시는(없는 것을 있는 것으로 부르시는) 전능하신 하나님’이십니다.

18절과 19절을 보십시오.

18 아브라함이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었으니 이는 네 후손이 이같으리라 하신 말씀대로 많은 민족의 조상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19 그가 백 세나 되어 자기 몸이 죽은 것 같고 사라의 태가 죽은 것 같음을 알고도 믿음이 약하여지지 아니하고

아브라함이 아들 이삭을 약속받았을 때 그의 나이는 백 세였습니다. 아내 사라는 아흔 살이었습니다. 의학적으로나 생물학적으로 아이를 낳는 것은 불가능한 상태입니다. 성경은 아브라함의 몸이 이미 '죽은 것 같았고', 사라의 자궁 역시 '죽은 것 같았다(태가 끊어졌다)'고 사실 그대로 기록합니다. 아브라함도 그 냉혹한 현실을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19절). 그러나 아브라함은 눈앞에 보이는 죽은 육신을 바라보지 않고, 죽은 자를 살리시는 하나님의 약속을 바라보았습니다. 18절입니다.

18절 "아브라함이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었으니"

인간의 가능성이 완전히 제로(Zero)가 된 절망의 막다른 골목에서,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하지 않고 도리어 믿음이 견고하여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립니다(20절). "하나님은 약속하신 것을 능히 이루실 전능자이시다"라는 확신을 가질 때, 하나님은 그 믿음을 의로 여겨주십니다(21-22절). 23절부터 25절은 이 아브라함의 믿음이 오늘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와 어떻게 연결되는지를 밝히며 장엄한 대단원을 장식합니다.

24-25절 "의로 여기심을 받을 우리도 위함이니 곧 예수 우리 주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를 믿는 자니라 / 예수는 우리가 범죄한 것 때문에 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시기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

아브라함이 죽은 몸과 같은 태에서 생명(이삭)을 주실 하나님을 믿었듯이, 오늘 우리는 십자가 위에서 우리의 흉악한 범죄 때문에 속죄 제물로 내어줌이 되시고, 우리를 온전히 의롭다 하시기 위하여 사흘 만에 무덤을 깨치고 다시 살아나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믿는 자들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으심은 우리의 모든 죄 값을 완전히 청산하셨다는 영수증이요, 예수님의 부활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영원히 의롭다고 법정적으로 선언하신 공증 문서입니다. 이 부활의 주님을 나의 구주로 믿는 자마다, 아브라함이 누렸던 그 영광스러운 의롭다 하심의 복을 차별 없이 받아 누리게 됩니다.

이 믿음의 위대함을 보여주는 한국 교회사 속의 눈물겨운 실화가 있습니다. 일제강점기 신사참배의 서슬 퍼런 칼날 앞에서도 타협하지 않고 끝까지 믿음의 지조를 지키다 순교하신 주기철(1891~1944) 목사님이 있습니다. 일제 경찰은 평양 산정현교회의 주기철 목사님을 체포하여 온갖 잔혹한 고문을 가합니다. 손톱 밑을 쇠꼬챙이로 찌르고, 고춧가루 물을 코에 붓고, 날카로운 대못을 박아놓은 널빤지 위를 맨발로 걸어가게 합니다. 발바닥이 찢어지고 온몸의 뼈가 부러져 피투성이가 된 주기철 목사님을 향해 일본 순사들은 비웃으며 소리칩니다.

"야, 주기철! 네 몸을 보아라. 너는 이미 송장이나 다름없다. 네 하나님이 살아 있다면 왜 너를 이 지옥 같은 감옥에서 건져주지 않겠느냐? 지금이라도 신사에 고개 한 번만 숙이면 당장 살려주고 대접해 주겠다"

육신적으로 볼 때 주기철 목사님의 상황은 아브라함의 백 세 된 몸처럼 완전히 '죽은 것 같은' 절망의 상태입니다. 그러나 주기철 목사님은 피를 토하며 그 유명한 ‘일사각오 (一死覺悟)’의 기도를 드립니다.

"주님을 위하여 오는 십자가를 내가 피하였다가 이 다음 주님이 '너는 내가 준 유일한 십자가를 어찌하고 왔느냐' 물으시면 내가 무슨 낯으로 주님을 대하겠습니까? 내 육신은 찢겨 죽을지라도,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부활의 주님이 내 영혼을 붙들고 계십니다. 나는 살아서도 그리스도의 것이요, 죽어서도 그리스도의 것입니다"

주기철 목사님은 1944년 4월 21일 밤, 평양형무소의 차디찬 마룻바닥에서 순교합니다. 육신의 눈으로 보면 나약한 한 인간의 비참한 죽음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순교의 피를 땅에 떨어뜨리지 않으셨습니다. 불과 1년 뒤 일제는 패망했고, 주기철 목사님이 목숨 걸고 지켜낸 그 부활 신앙의 거룩한 터전 위에서 한국 교회는 폭발적인 부흥의 새벽을 맞이합니다. 이런 것이 아브라함의 믿음이요, 주기철 목사님이 걸어갔던 믿음의 자취입니다. 하나님은 그를 의롭다 하실 뿐만 아니라 마침내 영광스러운 부활과 승리의 열매를 맺게 해주실 것입니다.

오늘 로마서 4장 1절부터 25절은 유대인들의 얄팍한 율법주의적 기득권을 산산조각 내고, 오직 믿음으로만 의롭게 되는 복음의 은혜의 대로를 활짝 열어젖힙니다.

(1) 내 행위의 삯을 구하지 말고, 일한 것이 없이 값없이 주시는 은혜를 누려야 합니다. "내가 교회에서 봉사를 얼마나 많이 했는데, 헌금을 얼마나 많이 바쳤는데, 내가 누구보다다 성실하게 섬겼는데"라는 자기 의의 장부를 찢어버려야 합니다. 우리는 십자가의 피로 값없이 의롭다 함을 받은 무익한 종들일 뿐입니다.

(2) 율법의 단속 카메라 앞에서 겸손히 엎드려야 합니다. 율법은 내 힘으로 지켜서 천국 가라고 주신 법이 아닙니다. 내 속의 흉악한 죄를 깨닫게 하여, 오직 십자가 보혈의 회개의 수도꼭지로 달려가게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의 도구입니다. 우리는 우리 연약함을 인정하고 오직 하나님께 매달려야 합니다.

(3)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는 '부활의 신앙'으로 일어서야 합니다. 눈앞의 경제적 상황, 질병의 고통과 환난, 메마른 현실을 보더라도 우리는 낙심하지 않아야 합니다. 우리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으로 부르시는 창조주이십니다.

대륙 호주(Australia) 중앙은 대부분 사막으로 물이 없습니다. 물이 없으므로 사막 열기로 더워서 생물이 살 수 없습니다. 물이 얼마나 귀한지 그곳에 가보면 실감하게 됩니다. 물을 수백km관을 연결하여 공급하는데 얼마나 불편하겠습니까? 철광석을 채굴해야 하는 일부 인부들은 물이 없어 수백km를 매일 비행기로 출퇴근한다고 합니다. 가장 귀한 것은 하나님께서 거저 주십니다. 물, 공기, 믿음 대가 없이 주시기에 우리는 그것의 진가를 무시하기 쉽습니다. 우리 삶도 이런 것이 아닌가 겸손하게 우리 자신들을 돌아보는 한주간 되었으면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살다 보면 사람과의 관계 속에서 마음이 통하지 않아 답답할 때도 있고, 사방이 꽉 막힌 벽처럼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기도해도 응답이 없을 때 하나님 너무하신 것 아닙니까? 정말 이래도 되는 것입니까? 라고 볼멘 울분을 터트릴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영의 세계는 엄연히 존재하며, 우리 주님은 우리의 중심을 꿰뚫어 보고 계심을 바라보고 더욱 하나님을 신뢰함으로써 기도로 나아가야 합니다.

이번 한 주간, 세상의 헛된 자랑과 인간적인 조건을 다 내려놓고, 아브라함이 걸어갔던 그 거룩한 '믿음의 자취'를 묵묵히 따라가는 우리들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를 죄에서 건지시기 위해 십자가에 내어줌이 되시고, 우리를 의롭다 하시기 위해 무덤에서 다시 살아나신 부활의 예수 그리스도를 굳게 붙들어야 합니다.

우리가 발 딛고 살아가는 치열한 일터와 가정의 현장에서, 세상의 불의와 타협하지 않고 묵묵히 믿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때, 죽은 것 같은 현실을 뚫고 새 생명의 꽃을 피워내시는 하나님의 위대한 역사가 우리 모두의 삶 가운데 찬란하게 펼쳐질 것입니다.

인생을 불쌍히 여기셔서 믿음으로 영생을 거저 주시는 은혜가 우리 각자 심령에 충만한 한 주 되시기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오늘 말씀을 통해 아브라함이 행위가 아닌 오직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었듯이, 일한 것이 없는 우리를 십자가의 보혈로 덮으사 값없는 은혜로 의롭다 칭하여 주신 그 크신 사랑을 찬양합니다. 율법의 거울 앞에서 내 부끄러운 죄인 됨을 겸허히 인정하고, 오직 죄인을 위하여 피 흘리신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의 보좌만을 의지하며 나아가게 하옵소서. 백 세 된 아브라함처럼 죽은 것 같고 메말라 있을지라도,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었던 아브라함의 믿음을 우리에게 부어 주옵소서.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으로 부르시는 전능하신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하게 하옵소서. 우리의 범죄함 때문에 십자가에 내어줌이 되시고, 우리를 의롭다 하시기 위해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며, 이번 한 주간 치열한 일터와 삶의 현장에서 믿음으로 견고하여져서 오직 하나님께만 영광을 돌리는 우리들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