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한 의
로마서 3장 21절-31절 (개역개정)
21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22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
23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24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 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25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써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
26 곧 이 때에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사 자기도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려 하심이라
27 그런즉 자랑할 데가 어디냐 있을 수가 없느니라 무슨 법으로냐 행위로냐 아니라 오직 믿음의 법으로니라
28 그러므로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되는 줄 우리가 인정하노라
29 하나님은 다만 유대인의 하나님이시냐 또한 이방인의 하나님은 아니시냐 진실로 이방인의 하나님도 되시느니라
30 할례자도 믿음으로 말미암아 또한 무할례자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실 하나님은 한 분이시니라
31 그런즉 우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파기하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 도리어 율법을 굳게 세우느니라
일생을 살아가면서 어떤 소식을 들었을 때 가장 가슴이 뛰고 벅차 오를까요? 반대로 어떤 소식이나 정보 앞에서 절망의 한숨을 내쉬게 될까요? 우리는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이 세상의 거친 파도를 건너가며 날마다 수많은 소식을 접하며 살아갑니다. 그 중에는 마음을 무겁게 짓누르는 어두운 소식도 있고, 영혼을 다시 숨 쉬게 만드는 복된 소식도 있습니다. 잠언 25장 25절을 보면 솔로몬은 인생의 심금을 울리는 한 구절을 기록합니다.
잠언 25:25 "먼 땅에서 오는 좋은 기별은 목마른 사람에게 냉수와 같으니라"
군대에 아들을 입대시킨 부모의 심정을 한번 헤아려 보십시오. 아무런 연락이 닿지 않을 때, 말할 수 없는 온갖 염려가 밀려올 것입니다. 그런데 첫 소식이 당도할 때, 그 짧은 소식 한 통이 부모의 마음에 얼마나 시원한 냉수 한 사발이 되겠습니까? 오늘 본문 21절의 첫 단어인 "이제는(But now)"이라는 선언이 바로 타락한 인류의 가슴에 떨어진 영원한 '복음의 기별', 타는 목마름을 단번에 해갈하는 하늘의 시원한 냉수입니다.
지난 주에는 로마서 3장 1절부터 20절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신실하심 앞에서 인간이 내뱉는 간교한 핑계와 궤변을 살펴보았습니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다"는 성경의 무시무시한 기소장 앞에 온 인류가 죄의 포로로 묶여 있음을 확인했습니다. 율법은 인간이 스스로 공로를 쌓아 구원을 따내라고 주신 사다리가 아니었습니다. 율법은 거울이 되어 우리 심령의 추악한 오물과 암 덩어리를 들추어내어, 하나님 앞에서 교만했던 모든 입을 틀어막고 우리를 심판 아래 가두는 역할을 할 뿐이었습니다. 율법의 거울로 비추어 본 인간의 실존은 그야말로 소망 없는 사형수요, 칠흑 같은 암흑 그 자체였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 절망의 막다른 골목에서 바울은 반전의 깃발을 높이 치켜듭니다.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다" 사도 바울이 왜 모세의 율법 조문 밖에서 '하나님의 한 의', 곧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진짜 의가 나타났다고 선언하는지, 왜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 어떤 인간도 자기 행위를 자랑할 수 없는지, 그리고 왜 우리가 오직 믿음으로만 값없이 의롭게 되며, 이 믿음이 도리어 율법을 폐하기는커녕 율법을 온전히 세우게 되는지를 밝히 깨닫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오늘 본문 21절부터 31절 말씀을 통해, 내 모든 공로의 찌꺼기를 배설물처럼 버리고, 값없이 베풀어주신 그리스도의 속량과 화목제물의 은혜를 붙들어 율법의 참된 정신을 삶으로 세워나가는 우리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1. 율법 외에 나타난 하나님의 한 의 (21-26절)
21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22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
23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24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 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25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써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
26 곧 이 때에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사 자기도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려 하심이라
21절을 보십시오.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다"
여기서 '율법 외에'라는 말은 율법과 아무 상관이 없는 돌연변이나 이단 사설이 불쑥 튀어나왔다는 뜻이 아닙니다. 21절 하반절에 분명히 못 박고 있습니다.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모세오경(율법)과 구약의 모든 선지서가 수천 년 동안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예언했던 바로 그 실체, 즉 구약 전체가 예표했던 메시야 구원의 실체가 마침내 역사의 한복판에 뚜렷이 등장했다는 뜻입니다. 그 하나님의 한 의가 무엇입니까? 22절입니다.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
인간의 조건에는 수많은 차별이 있습니다. 유대인이냐 헬라인이냐, 남자냐 여자냐, 부자냐 가난한 자냐, 배운 자냐 못 배운 자냐 하는 세상의 외모는 끝없이 사람을 가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시선 앞에서는 단 하나의 차별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왜입니까? 23절이 그 이유를 천명합니다.
23절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모든 인간은 영적으로 똑같이 파산한 자들이요, 하나님의 거룩한 영광의 기준치에 단 1밀리미터도 도달할 수 없는 영적 무능력자들입니다. 태평양 바다를 헤엄쳐서 미국 캘리포니아까지 가야 한다고 한번 가정해 보십시오. 수영을 전혀 못 하는 사람은 물에 들어가자마자 1미터 앞에서 빠져 죽을 것이고, 올림픽 금메달리스트 수영 선수는 5킬로미터를 헤엄쳐 가다가 결국 지쳐서 빠져 죽을 것입니다. 1미터를 갔든 5킬로미터를 갔든, 태평양을 건너지 못하고 바다 한가운데서 수장되기는 매한가지입니다.
인간의 도덕성이란 이와 같습니다. 하나님 보좌의 거룩함이라는 거대한 대양 앞에서 도토리 키 재기를 하며 내 의를 뽐낼 수 있는 인생은 단 하나도 없습니다. 그런데 24절에서 복음의 심장이 박동하기 시작합니다.
24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redemption)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 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여기서 '속량(Apolytrosis, 아폴리트로시스)'이라는 말은 당시 노예 시장에서 쓰이던 법률 용어입니다. 죄와 사망의 쇠사슬에 묶여 영원히 지옥으로 끌려갈 수밖에 없던 노예와 같은 우리를 건져내시기 위해, 하나님께서는 그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이라는 엄청난 몸값을 지불하시고 우리를 건져내신 것입니다. 성자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신이 지으신 피조 세계로 친히 ‘임마누엘’하신 것입니다.
우리의 입장에서는 단 1원의 대가도 지불하지 않은 '값없는 은혜(Gratis)'이지만, 하나님 편에서는 하나뿐인 아들의 목숨을 전부 쏟아 부으신 '가장 값비싼 희생'입니다. 25절과 26절은 십자가의 신비를 절정으로 끌어올립니다. 하나님은 예수를 '화목제물 (Hilasterion)'로 세우십니다. 이 '힐라스테리온'은 구약 성막 지성소 안에 있던 법궤 뚜껑, 대제사장이 1년에 단 한 번 피를 뿌려 백성들의 죄를 용서받던 '속죄소(시은좌, 은혜의 보좌)'를 가리킵니다. (출25:21-22, 레16:14-15)
법궤 안에는 무엇이 들어 있습니까? 인간의 반역과 불순종을 고발하는 십계명 돌판이 들어 있습니다. 그 율법의 돌판을 그대로 열어두면 거룩하신 하나님의 공의의 불길이 당장이라도 죄인들을 불살라 죽여야 마땅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 율법의 정죄를 금으로 만든 뚜껑인 '속죄소'로 덮으시고, 그 위에 흠 없는 어린양의 피를 뿌리게 하심으로 진노를 거두십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위에서 당신의 온몸을 찢으시고 보혈을 쏟으심으로 영원한 화목제물이 되어 주신 것입니다. 이로써 하나님은 두 가지를 동시에 완벽하게 성취하셨습니다(26절). 죄는 반드시 피 흘려 심판하셔야만 하는 '하나님의 공의(자기도 의로우시며)'를 만족시키시고, 동시에 독생자를 내어주시기까지 우리를 용서하시려는 '하나님의 무한한 사랑(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려 하심)'을 십자가 위에서 단번에 완성하신 것입니다.
영국의 유명한 설교자 찰스 스펄전(Charles H. Spurgeon, 1834~1892) 목사는 청년 시절 회심했던 역사적 실화가 이를 웅변합니다. 스펄전은 15세 소년 시절, 자신의 죄책감과 내면의 어두움 때문에 밤낮으로 고통 당합니다. 여러 교회를 전전하며 설교를 들었지만, 자신의 행위로는 구원에 이를 수 없다는 사실 때문에 영혼의 타는 목마름을 견딜 수 없습니다.
1850년 1월 6일의 몹시 춥고 눈보라가 휘몰아치던 어느 주일 아침, 스펄전은 눈길에 갇혀 원래 가려던 큰 예배당에 가지 못하고, 길가의 작고 초라한 원시 감리교회로 발걸음을 돌립니다. 그 예배당에는 담당 목사님조차 폭설로 도착하지 못했고, 교인도 10여 명 남짓 모여 있습니다. 강단에는 신학도 배우지 못한 한 구두 수선공 평신도가 올라가 어눌한 목소리로 이사야 45장 22절 말씀을 전하고 있습니다. 그 평신도 설교자는 난간 밑에 웅크리고 앉아 절망에 빠져 있던 스펄전 소년을 똑바로 쳐다보며 소리칩니다.
"젊은이, 자네는 참으로 비참해 보이는구려, 자네는 평생 자신의 행위를 들여다보며 고통당할 것이요. 그러나 성경은 말씀하오 '땅의 모든 끝이여 내게로 돌이켜 구원을 받으라 나는 하나님이라 다른 이가 없느니라' 젊은이, 자네의 고행이나 눈물을 보지 말고, 오직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시오. 바라보기만 하면 사오. 그냥 바라보시오" 그 순간, 성령의 번개가 스펄전의 심장을 가릅니다. 이같이 참 진리는 너무나 단순하고 명쾌합니다. 복잡하지 않습니다. 구원의 핵심은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하는 것입니다.
"아, 구원은 내가 무언가를 행해서 얻어내는 대가가 아니구나! 십자가에서 모든 죄 값을 지불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고 믿는 자에게 거저 주시는 하나님의 선물이구나"
그는 그 자리에서 십자가의 피를 힘입어 영혼의 닻을 올립니다. 훗날 스펄전은19세기 전 세계를 깨우는 위대한 복음의 사도로 거듭납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우리의 어설픈 행위의 누더기를 바라보지 않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십자가 위에 세우신 영원한 화목제물, 예수 그리스도의 피 묻은 손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 은혜의 샘가에서 값없이 주시는 영원한 의롭다 하심을 누리는 우리들이 되어야 합니다.
2. 자랑할 수 없는 오직 믿음의 법 (27-30절)
27 그런즉 자랑할 데가 어디냐 있을 수가 없느니라 무슨 법으로냐 행위로냐 아니라 오직 믿음의 법으로니라
28 그러므로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되는 줄 우리가 인정하노라
29 하나님은 다만 유대인의 하나님이시냐 또한 이방인의 하나님은 아니시냐 진실로 이방인의 하나님도 되시느니라
30 할례자도 믿음으로 말미암아 또한 무할례자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실 하나님은 한 분이시니라
27절에서 사도 바울은 인간의 알량한 자존심을 향해 쐐기를 박습니다.
27절 "그런즉 자랑할 데가 어디냐? 있을 수가 없느니라. 무슨 법으로냐? 행위로냐? 아니라 오직 믿음의 법으로니라" 왜 인간에게는 자랑할 데가 눈곱만큼도 없습니까?
만약 우리가 우리의 도덕적 노력이나 선행, 율법을 지킨 대가로 구원을 얻었다면, 천국 문 앞에서 고개를 빳빳이 들고 내 공로를 자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내가 남들보다 더 정직하게 살았기 때문에, 내가 십일조를 더 많이 바쳤기 때문에, 내가 종교적 고행을 이겨냈기 때문에 이 구원을 따냈다"고 떠벌릴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에베소서 2장 8절과 9절에서 단호하게 선언합니다.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함이라"
물에 빠져 허우적대며 숨이 넘어가던 사형수를 어떤 의인이 뛰어들어 목숨 걸고 건져줍니다. 구조받은 그 사람이 뭍으로 나와서 사람들에게 "내가 물속에서 얼마나 멋지게 허우적거렸는지 아시오"라고 자기 몸짓을 자랑한다면 얼마나 정신 나간 소리가 되겠습니까? 그가 자랑할 것은 오직 자기를 살려준 구조자의 은혜와 사랑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28절에서 확고한 결론을 내립니다.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되는 줄 우리가 인정하노라" 이것은 신약에 와서 갑자기 바뀐 편법이 아닙니다. 구약의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창세기 15장 6절은 증언합니다.
창세기 15:6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
아브라함이 할례를 받았기 때문도 아니요, 모세의 율법을 지켰기 때문도 아닙니다. 율법이 주어지기 수백 년 전,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순전하게 신뢰하고 바라보았을 때, 하나님은 그의 믿음을 보시고 그를 의롭다고 여겨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29절과 30절을 보십시오.
당시 유대인들은 하나님을 자신들만의 전유물로 독점하려 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유대인의 하나님이시다" 그러나 바울은 질타합니다.
"하나님이 유대인의 하나님만 되시느냐? 진실로 이방인의 하나님도 되시느니라. 할례를 받은 자(유대인)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하시고, 할례를 받지 않은 자(이방인)도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실 하나님은 오직 한 분뿐이시니라"
하나님 앞에서는 종교적 가문의 혈통도, 신앙의 연수도, 화려한 직분의 계급도 전혀 통하지 않습니다. 모두가 똑같이 십자가 앞에 무릎 꿇고 "주여, 나는 아무 공로 없습니다. 오직 주님의 대속의 피만을 의지합니다"라고 두 손을 벌릴 때, 하나님은 그 빈손을 보시고 의롭다 칭해주시는 것입니다.
3. 믿음으로 굳게 세우는 율법의 참된 정신 (31절)
31 그런즉 우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파기하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 도리어 율법을 굳게 세우느니라
드디어 31절에서 오늘 본문의 가장 핵심적인 질문이자 사도 바울의 위대한 신학적 결론이 터져 나옵니다.
31절 "그런즉 우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파기하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 도리어 율법을 굳게 세우느니라"
이 말씀은 로마서를 읽는 수많은 사람이 가장 오해하기 쉬운 대목입니다. "행위가 아니라 오직 믿음으로만 구원받는다면, 이제 율법은 완전히 무용지물이 되어 쓰레기통에 처박아도 되는 것 아닙니까? 십계명도 필요 없고, 거룩한 삶도 필요 없이, 한번 믿었으니 내 마음대로 방종하며 살아도 되는 것 아닙니까?"
바울은 헬라어로 가장 강력한 거부의 표현인 "메 게노이토(Μὴ γένοιτο, 천만에,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를 외칩니다. 오히려 오직 믿음으로 의롭게 된 성도만이, 율법을 파기하기는커녕 '도리어 율법을 반석 위에 견고하게 세우게(히스타노멘)' 된다는 역설을 선포합니다. 어떻게 믿음이 율법을 굳게 세웁니까? 세 가지 차원에서 율법을 완성합니다.
1.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율법의 모든 요구를 대신 완성하셨습니다. 율법은 "죄를 범하는 자는 반드시 죽으리라"는 엄중한 죗값을 요구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피 흘려 죽으심으로 율법의 저주와 요구를 온전히 지불하셨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예수를 믿을 때, 율법의 정죄는 폐하여지는 것이 아니라 예수 안에서 완벽하게 만족되고 세워진 것입니다(마 5:17~18).
2. 구원받은 은혜의 감격이 비로소 율법의 정신인 '사랑'을 자발적으로 실천하게 만듭니다. 율법주의자는 "벌을 받을까 봐 두려워서", 혹은 "남들에게 인정받으려고" 억지로 법을 지킵니다. 그러나 십자가의 무조건적인 사랑과 값없는 용서를 경험한 성도는 시키지 않아도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내 몸처럼 섬기게 됩니다. 로마서 8장 3절과 4절 말씀처럼, 육신이 연약하여 할 수 없던 것을 성령을 따라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의로운 요구가 자연스럽게 이루어지게 하시는 것입니다.
3. 율법 조문의 노예에서 벗어나 율법의 본질인 거룩과 생명의 법을 세웁니다.
외적인 규례로 남을 정죄하던 위선적인 율법주의를 깨뜨리고, 하나님이 율법을 주신 본래 목적인 공의와 긍휼과 믿음의 삶을 일터와 가정에서 청결한 양심으로 살아내게 만듭니다.
인도의 성자로 불렸던 선다 싱(Sundar Singh, 1889~1929)의 유명한 일화가 이를 너무나 명쾌하게 보여줍니다. 선다 싱이 티베트의 험준한 눈 덮인 히말라야 산맥을 한 동료 여행자와 함께 넘어가고 있을 때입니다. 살을 에는 듯한 눈보라가 몰아쳐 가만히 서 있기만 해도 얼어 죽을 것 같은 위기였습니다. 그런데 길가의 눈구덩이 속에 한 노인이 피를 흘리며 쓰러져 죽어가고 있는 것을 발견합니다. 동료 여행자는 혀를 차며 말합니다.
"선다 싱, 저 사람을 돌보다간 우리 둘 다 얼어 죽소. 내 목숨 하나 건지기도 버거운데 어서 저 사람을 버려두고 산을 내려갑시다." 동료는 차갑게 외면하고 혼자 잰 걸음으로 산을 내려가 버립니다. 그러나 선다 싱은 쓰러진 노인을 버려둘 수 없었습니다. 그는 무릎을 꿇고 차갑게 식어가는 노인을 자신의 등에 들쳐 업습니다. 가파른 눈길을 걸어갈 때 땀이 비 오듯 쏟아졌고, 숨이 턱 밑까지 차올라 죽을 것만 같습니다. 그러나 선다 싱은 노인을 포기하지 않고 한 걸음 한 걸음 산을 내려갔습니다. 놀라운 일이 일어납니다.
선다 싱의 등에서 뿜어져 나오는 뜨거운 체온과 땀방울이 뒤에 업힌 노인의 얼어붙은 몸을 녹여 의식을 되찾게 만들었고, 반대로 노인의 몸이 선다 싱의 등을 감싸주어 선다 싱 역시 얼어 죽지 않고 두 사람 모두 살아남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얼마쯤 내려갔을 때, 길바닥에 한 사람이 꽁꽁 얼어붙어 쓰러져 있는 것을 봅니다. 다가가 얼굴을 확인해 보니, 자기 혼자 살겠다고 노인을 버려두고 앞서 달려갔던 바로 그 동료 여행자입니다. 혼자 몸을 챙겨 빠르게 도망쳤던 자는 히말라야의 매서운 칼 바람을 이기지 못하고 얼어 죽어 있었던 것입니다.
율법의 문자 조항에 매여 자기 의와 자기 생명만을 챙기려던 바리새인과 같은 종교인은 결국 차가운 영적 칼바람 속에서 스스로 얼어 죽고 맙니다. 그러나 십자가의 값없는 사랑에 빚진 자가 되어, 죽어가는 영혼을 등에 업고 땀 흘려 희생하는 자는 나도 살고 이웃도 살려내는 거룩한 생명의 역사를 일으킵니다. 억지로 지키는 율법은 사람을 죽이지만, 십자가의 은혜를 믿는 믿음에서 터져 나오는 희생과 사랑은 도리어 하나님의 율법을 세상 한복판에 가장 아름답고 견고하게 세워내는 능력이 됩니다.
우리는 우리가 가진 것이나 자랑을 배설물로 여기고 십자가의 은혜로 살아가야 합니다.
오늘 로마서 3장 21절부터 31절은 우리 영혼을 향해 타는 목마름을 단번에 해갈하는 하늘의 생수를 쏟아 부어 주십니다.
1. 내 모든 인간적인 자랑과 공로를 십자가 밑에 배설물처럼 내려놓아야 합니다.
우리는 본래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던 전적 부패의 죄인들입니다. "내가 무언가를 했다"는 자만을 깨뜨려야 합니다, 오직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값없이 거저 주신 하나님의 은혜만을 평생토록 자랑해야 합니다.
2. 화목제물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힘입어 은혜의 보좌로 나아가야 합니다.
우리의 과거의 죄, 현재의 허물, 미래의 연약함까지 주님은 십자가의 피로 덮으셨습니다. 정죄감에 사로잡혀 낙심하지 마시고, 나를 위해 생명을 쏟으신 그 거룩한 사랑을 의지하여 날마다 죄악을 털어내고 일어서야 합니다.
3. 믿음으로 의롭게 된 자답게, 삶의 현장에서 사랑으로 율법을 세워가야 합니다.
구원받았다는 핑계로 방종의 길을 걷지 않아야 합니다. 믿음은 율법을 폐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의 정신을 삶으로 온전히 세워내는 것입니다. 우리가 발 딛고 살아가는 치열한 일터와 가정에서, 혼자 잘 살겠다고 이기적인 계산을 앞세우지 않아야 합니다. 선다 싱처럼 쓰러진 지체를 등에 업고 묵묵히 십자가의 사랑을 가슴에 담아야 합니다. 손해를 보더라도 하나님의 정직을 붙들고, 연약한 이웃에게 따뜻한 손을 내밀어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구약시대 지성소 內 언약 궤에 담긴 3개 성물은 하나님의 보호와 약속입니다.
1. ‘십계명 두 돌판’은 하나님 '말씀' (로고스)으로 이 말씀이 인생의 길이요 진리 되신 하나님의 불변하는 언약과 생명의 말씀이요.
2. ‘만나를 담은 금항아리’는 40년간 광야에서 먹을 것이 없으므로 하나님의 '일용할 양식'이자 '하늘에서 내린 참 떡'으로 육신의 생명을 먹이실 뿐 아니라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생명의 떡(요 6:35)입니다.
3. ‘아론의 싹 난 지팡이’는 광야 이동 중, 고라 일당이 아론의 제사장 권위에 반역하여 하나님의 질서를 거역한 죄의 (민 16~17장) 질서를 잡으시고 '무(無)에서 유(有)를 창조하신 새 생명'을 즉, 죽은 마른 막대기에서 싹이 나듯, 보이지 않는 성령의 권능으로 역사하는 부활과 새 생명을 상징합니다.
우리는 살다 보면 억울한 일을 당할 때도 있고, 내 진심이 통하지 않아 낙심될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한 분이시며, 외모를 보지 않으시고 각 사람의 믿음의 중심을 달아보십니다. 이번 한 주간, 세상의 헛된 자랑을 다 내려놓고, 십자가의 은혜만을 붙드는 우리들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과 독대하는 깊은 기도의 시간을 통해 십자가 사랑의 체온을 회복해야 합니다. 우리의 일터에서, 가정에서, 믿음으로 율법의 거룩한 사랑을 온전히 세움으로써, 우리를 통해 하나님의 살아계신 영광이 온 세상 만방에 찬란하게 증거되어야 합니다.
이 성령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어떤 소식이 가장 벅찬 희열을 느끼게 할까요? 어떤 정보가 우리의 가슴을 감동과 은혜로 가득 채우게 할까요? 이는 기도로 주님과 동행하면서 우릴 통해 하나님의 한 의가 드러나는 인생이 아닐까? 하고 우릴 돌아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오늘 말씀을 통해 율법의 정죄 아래 영원히 죽을 수밖에 없던 우리에게,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주신 그 크신 사랑을 찬양합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여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였으나,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값없이 의롭다 칭하여 주시니 감사합니다. 내 행위와 공로를 내세우며 남을 판단했던 어리석은 교만을 용서하여 주옵소서. 십자가에서 흘리신 보혈의 피로 우리의 모든 죄를 덮어주셨사오니, 이제는 내 자랑을 다 버리고 오직 십자가 예수 그리스도만을 자랑하는 우리들이 되게 하옵소서. 값없이 받은 은혜를 방종의 기회로 삼지 않게 하시고, 선다 싱의 고백처럼 죽어가는 이웃을 향해 십자가의 사랑을 흘려보내게 하옵소서. 우리 삶으로 도리어 하나님의 율법을 굳게 세워나가는 참된 믿음의 사람이 되게 하옵소서. 우리가 살아가는 치열한 일터와 비즈니스의 현장, 그리고 가정 속에서 묵묵히 말씀에 순종하며 사랑과 공의를 실천할 때, 우리를 통하여 하나님의 거룩하신 영광이 세상에 찬란하게 드러나게 하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