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RMON TEXT로마서 3장 1-20절

의인은 오직 믿음으로 [로마서 3장 1-20]

의인은 오직 믿음으로

로마서 3장 1절-20절 (개역개정)

1 그런즉 유대인의 나음이 무엇이며 할례의 유익이 무엇이냐
2 범사에 많으니 우선은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맡았음이니라
3 어떤 자들이 믿지 아니하였으면 어찌하리요 그 믿지 아니함이 하나님의 미쁘심을 폐하겠느냐
4 그럴 수 없느니라 사람은 다 거짓되되 오직 하나님은 참되시다 할지어다 기록된 바 주께서 주의 말씀에 의롭다 함을 얻으시고 판단 받으실 때에 이기려 하심이라 함과 같으니라
5 그러나 우리 불의가 하나님의 의를 드러나게 하면 무슨 말 하리요 (내가 사람의 말하는 대로 말하노니) 진노를 내리시는 하나님이 불의하시냐
6 결코 그렇지 아니하니라 만일 그러하면 하나님께서 어찌 세상을 심판하시리요
7 그러나 나의 거짓말로 하나님의 참되심이 더 풍성하여 그의 영광이 되었다면 어찌 내가 죄인처럼 심판을 받으리요
8 또는 그러면 선을 이루기 위하여 악을 행하자 하지 않겠느냐 어떤 이들이 이렇게 비방하여 우리가 이런 말을 한다고 하니 그들은 정죄 받는 것이 마땅하니라
9 그러면 어떠하냐 우리는 나으냐 결코 아니라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다 죄 아래에 있다고 우리가 이미 선언하였느니라
10 기록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11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12 다 치우쳐 함께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
13 그들의 목구멍은 열린 무덤이요 그 혀로는 속임을 일삼으며 그 입술에는 독사의 독이 있고
14 그 입에는 저주와 악독이 가득하고
15 그 발은 피 흘리는 데 빠른지라
16 파멸과 고생이 그 길에 있어
17 평강의 길을 알지 못하였고
18 그들의 눈 앞에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느니라 함과 같으니라
19 우리가 알거니와 무릇 율법이 말하는 바는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에게 말하는 것이니 이는 모든 입을 막고 온 세상으로 하나님의 심판 아래에 있게 하려 함이라
20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여러분은 어떤 사람을 가장 멀리하고 싶습니까? 동시에 우리는 어떤 평가를 받고 있을까요? 우리는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이 땅을 살아가면서 매일 거울을 마주합니다. 거울을 볼 때 우리는 어떤 생각을 할까요? 얼굴에 묻은 먼지와 때를 보며 부끄러워하거나 얼른 씻어내려 하지는 않습니까? 동시에 나의 영혼은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어떤 평가를 받고 있을까? 라는 생각은 들지 않는지요?

지난 주에는 로마서 2장 17절부터 29절 말씀을 통해 겉모양뿐인 종교적 특권의식과 율법의 지식, 그리고 몸의 가죽만을 베어내는 표면적 할례가 결코 사람을 구원할 수 없음을 살펴보았습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다른 사람을 가르치기 전에 자기 자신을 말씀과 양심의 법정에 세워 먼저 가르치는 자라야 합니다. 가죽의 할례가 아니라 성령 안에서 교만과 탐욕의 완악한 자아를 베어내는 ‘마음의 할례’를 받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람의 칭찬이 아니라 은밀한 중심을 감찰하시는 하나님의 인정을 받는 자가 참된 ‘이면적 유대인’이요 참된 하나님의 백성임을 배웠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 로마서 3장 1절부터 20절에 들어서면, 사도 바울은 로마서 1장 18절부터 시작된 길고 치열했던 법정 공방의 최종 판결문을 온 인류를 향해 선고합니다.
바울은 이방인의 흉악한 불경건과 불의를 고발하고, 이어서 도덕군자 행세를 하던 유대인들의 위선과 껍데기 율법주의를 사정없이 발가벗깁니다. 그렇다면 과연 이 세상에 하나님의 불꽃 같은 눈동자 앞에서 고개를 들고 "나는 의롭다"고 말할 수 있는 인생이 단 한 사람이라도 존재할까요?

바울은 오늘 본문 10절에서 벼락과 같은 성령의 선언을 터뜨립니다. "기록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사도 바울이 왜 온 인류를 향해 단 한 사람의 의인도 없다고 단언하는지,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 주신 율법의 본래 목적과 그 정신이 과연 무엇인지, 그리고 왜 인간은 자신의 행위가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은혜를 믿는 믿음으로만 의롭다 함을 받아야 하는지를 온몸으로 깨닫는 시간이 되어야 합니다.

오늘 본문 1절부터 20절 말씀을 통해, 내 의로움의 헛된 누더기를 십자가 밑에 온전히 내려놓고, 율법의 거울 앞에서 상한 심령으로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만을 의지하는 참된 은혜의 자리로 나아가는 우리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1. 하나님의 신실하심과 인간의 궤변 (1-8절)

1 그런즉 유대인의 나음이 무엇이며 할례의 유익이 무엇이냐
2 범사에 많으니 우선은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맡았음이니라
3 어떤 자들이 믿지 아니하였으면 어찌하리요 그 믿지 아니함이 하나님의 미쁘심을 폐하겠느냐
4 그럴 수 없느니라 사람은 다 거짓되되 오직 하나님은 참되시다 할지어다 기록된 바 주께서 주의 말씀에 의롭다 함을 얻으시고 판단 받으실 때에 이기려 하심이라 함과 같으니라
5 그러나 우리 불의가 하나님의 의를 드러나게 하면 무슨 말 하리요 (내가 사람의 말하는 대로 말하노니) 진노를 내리시는 하나님이 불의하시냐
6 결코 그렇지 아니하니라 만일 그러하면 하나님께서 어찌 세상을 심판하시리요
7 그러나 나의 거짓말로 하나님의 참되심이 더 풍성하여 그의 영광이 되었다면 어찌 내가 죄인처럼 심판을 받으리요
8 또는 그러면 선을 이루기 위하여 악을 행하자 하지 않겠느냐 어떤 이들이 이렇게 비방하여 우리가 이런 말을 한다고 하니 그들은 정죄 받는 것이 마땅하니라

1절에서 바울은 가상의 유대인 반대자가 던질 법한 반발을 스스로 제기합니다. "바울 당신 말대로 할례도 소용없고 표면적 유대인이 아무것도 아니라면, 도대체 유대인의 나은 점이 무엇이며 할례를 받은 유익이 무엇이란 말입니까?"

이에 바울은 2절에서 명쾌하게 답합니다. "범사에 많다. 그 유익이 너무나 크다. 그 첫째는 바로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오라클)'을 위탁받았다(맡았다)는 사실이다." 그렇다고 유대인들이 이방인보다 우월했던 것은 그들의 핏줄이나 도덕성이 뛰어났기 때문이 아닙니다. 천지를 지으신 하나님의 거룩한 계시와 말씀의 보화를 먼저 맡아 간직하는 엄청난 특권과 은혜의 선물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특권에는 언제나 두려운 책임이 따르는 법입니다.

3절과 4절을 보십시오. 비록 유대인 중 어떤 자들이 그 은혜를 배신하고 믿지 아니하며 불순종했다고 해서, 하나님의 신실하심(미쁘심)이 취소되거나 폐하여지겠습니까? 결코 그럴 수 없습니다. 바울은 시편 51편 4절의 다윗의 참회시를 인용합니다.

시편 51:4 "내가 주께만 범죄하여 주의 목전에 악을 행하였사오니 주께서 말씀하실 때에 의로우시다 하고 주께서 순전하시다(판단 받으실 때에 이기려 하심이라) 하리이다"

다윗은 밧세바를 범하고 우리아를 사지로 몰아넣은 참혹한 범죄 후, 나단 선지자의 책망 앞에서 하나님을 향해 궤변을 늘어놓지 않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거짓되고 연약하지만, 오직 하나님은 절대적으로 의로우시며 참되십니다. 주님이 내게 어떤 심판을 내리셔도 주는 전적으로 옳으십니다"라고 엎드립니다. 5절부터 8절까지를 보면, 완악한 인간들이 얼마나 간교한 궤변으로 하나님의 공의를 왜곡하는지가 적나라하게 폭로됩니다.

타락한 자들은 이렇게 억지 논리를 폅니다. "내가 죄를 짓고 불의를 행했기 때문에 거꾸로 하나님의 의로우심과 용서의 참되심이 더 대조적으로 빛나고 영광이 되지 않았는가? 그렇다면 내 악행이 결국 하나님의 영광에 기여했으니, 나에게 진노를 내리시는 하나님이 도리어 불공평하고 불의하신 것 아니냐? 차라리 선한 결과를 많이 내기 위해 악을 더 마음껏 저지르자" 이런 논리는 궤변의 극치를 보여주는 것 같지 않습니까? 살인마가 자신이 악하게 보이는 것은 선한 놈들 때문이라고 항변하는 것과 같지 않습니까?

바울은 이러한 교묘한 죄의 합리화와 영적 궤변을 향해 8절 끝에서 추상같이 단호한 철퇴를 내립니다.

"그들은 정죄 받는 것이 마땅하니라"

오늘날 우리들의 모습 속에도 이 썩어빠진 궤변이 숨어있지 않은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어차피 예수 믿으면 다 용서받는데, 세상에서 적당히 거짓말하고 내 잇속 챙기며 타협하다가 주일에 회개하면 되지 않는가?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머물면 어떠냐?"
이것은 은혜를 아는 자의 신앙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용서와 인자하심을 멸시하는 가장 악독한 영적 기만입니다. 역사 속에서 자신의 흉악한 범죄를 포장하려다 양심의 파멸을 맞이한 실화가 있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수백만 명의 유대인을 가스실로 보내는 열차 수송을 총지휘했던 나치 친위대 중령 아돌프 아이히만(Adolf Eichmann, 1906~1962)의 이야기입니다. 전쟁이 끝난 후 두려워서 아르헨티나로 도망쳐 숨어 살던 아이히만은 1960년 이스라엘 정보기관 모사드에 의해 체포되어 예루살렘의 법정에 세워집니다. 온 세계는 수백만 명을 학살한 괴물이 어떤 잔인한 악마의 얼굴을 하고 있을지 숨을 죽여 지켜봅니다. 그러나 유리 방 안에 앉아 있는 아이히만은 지극히 평범하고 왜소한 중년 행정관의 모습입니다. 재판 과정에서 아이히만은 끊임없이 궤변을 늘어 놓습니다.

"나는 국가의 법과 상부의 행정 명령을 성실히 집행했을 뿐입니다. 나는 유대인을 개인적으로 미워한 적이 없습니다. 나는 철저히 칸트의 정언명령을 따르듯 내게 맡겨진 관료적 임무에 충실했던 모범적인 시민이었습니다. 시스템이 돌아가도록 만든 나에게 무슨 개인적 죄가 있습니까?"

자신의 양심을 완전히 꺼버린 채, 법률과 직무라는 거죽 뒤에 숨어 자신의 잔혹한 죄악을 정당화 합니다. 이를 현장에서 지켜본 철학자 한나 아렌트(Hannah Arendt)는 그의 모습을 보며 인류 역사에 유명한 ‘악의 평범성(Banality of Evil)’이라는 개념을 제시합니다. 생각하지 않는 것, 하나님이 주신 양심을 작동시키지 않고 타성에 젖어 제도의 핑계를 대며 악을 저지르는 것 자체가 가장 무서운 죄악이라는 것입니다.

아이히만은 자신의 죄를 정말 몰랐을까요?

양심이 그를 고소하기에 그는 그가 극악무도한 자임을 잘 압니다. 그럼 왜 그렇게 수많은 유대인들 살상을 자행했을까요? 양심을 팔아버렸기 때문입니다. 왜 양심이 없게 될까요? 이 세상 것이 더 크게 보이고 그 현실이 그에게 전부로 보였기 때문입니다.

재판부는 결국 그의 비겁한 궤변을 일축하고 사형을 선고합니다. 이것은 무엇을 가르쳐 줍니까? 인간은 환경의 핑계를 대고, 조직의 핑계를 대며, 심지어 하나님의 은혜까지 팔아먹으며 자신의 불의를 변명하려 듭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거룩한 법정 앞에서는 그 어떤 궤변도 통하지 않습니다. 사람은 다 거짓되되 오직 하나님만이 참 되십니다. 내 얄팍한 변명을 내려놓고 하나님 앞에 정직하게 엎드리는 우리들이 되어야 합니다.

2.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 (9-18절)

9 그러면 어떠하냐 우리는 나으냐 결코 아니라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다 죄 아래에 있다고 우리가 이미 선언하였느니라
10 기록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11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12 다 치우쳐 함께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
13 그들의 목구멍은 열린 무덤이요 그 혀로는 속임을 일삼으며 그 입술에는 독사의 독이 있고
14 그 입에는 저주와 악독이 가득하고
15 그 발은 피 흘리는 데 빠른지라
16 파멸과 고생이 그 길에 있어
17 평강의 길을 알지 못하였고
18 그들의 눈 앞에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느니라 함과 같으니라

9절에서 바울은 숨 쉴 틈 없는 돌직구를 던집니다.

"그러면 어떠하냐? 율법의 말씀을 먼저 맡은 우리 유대인들이 저 이방인들보다 영적으로 더 나은 존재냐? 결코 아니다.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모든 인류가 예외 없이 '죄 아래(Under Sin)' 갇혀 있다고 우리가 이미 선언하였느니라"

여기서 '죄 아래 있다'는 말은 죄의 지배와 권세 아래 완전히 짓눌려 포로가 되어 있는 영적 비참함을 뜻합니다.

그리고 바울은 10절부터 18절까지 구약 시편과 이사야서 곳곳에 흩어져 있는 6개의 성경 구절들을 마치 진주 목걸이를 꿰듯 하나로 엮어, 타락한 전 인류를 향한 성령의 무시무시한 기소장(Indictment)을 낭독합니다.

(1) 인간의 실존적 본질의 부패 (10-12절):
시편 14:1~3 / 시편 53:1~3 "기록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함께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 하나님 보좌의 기준에서 볼 때 지구상에 '의인'은 단 한 사람도 없습니다. 도토리 키 재기 식의 세상 도덕 기준으로는 착한 사람이 있을지 몰라도, 거룩하신 창조주의 거룩의 잣대 앞에서는 모두가 치우쳐 쓸모없게 된 부패한 죄인들입니다.

(2) 언어와 입술의 끔찍한 오염 (13-14절):
시편 5:9 "그들의 목구멍은 열린 무덤이요 그 혀로는 속임을 일삼으며"
시편 10:7 "그 입에는 저주와 악독이 가득하고"
시편 140:3 "그 입술에는 독사의 독이 있고"

시체가 썩어 악취가 진동하는 무덤 문이 열려 있듯, 거듭나지 못한 인간의 목구멍에서는 탐욕과 거짓의 썩은 냄새가 뿜어져 나옵니다. 혀로는 사기를 치고, 입술 속에는 남을 물어뜯어 죽이는 독사의 맹독을 숨겨두고 있습니다.

(3) 행동과 삶의 파멸적 궤적 (15-17절):
이사야 59:7~8 "그 발은 피 흘리는 데 빠른지라 파멸과 고생이 그 길에 있어 평강의 길을 알지 못하였고" 남을 짓밟고 일어서려는 경쟁의 발걸음은 피 흘리는 데 빠르며, 그들이 걸어가는 길마다 남겨지는 것은 오직 파멸과 고생뿐입니다. 그러하기에 참된 영혼의 평강을 누리지 못합니다.

(4) 이 모든 참상의 근원적 뿌리 (18절):
시편 36:1 "그들의 눈 앞에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느니라"

결국 결론은 18절입니다. 왜 인간이 이토록 추악한 언어와 행동으로 치닫습니까?

"그들의 눈앞에 하나님을 경외하고 두려워하는 영적 경건이 완전히 실종되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보이지 않으니 제멋대로 살아가며 죄를 죄로 여기지 않는 것입니다.

종교개혁자, 존 칼빈(John Calvin, 1509~1564)은 그의 필생의 대작 《기독교 강요(Institutes of the Christian Religion)》 2권에서 바로 이 로마서 3장 본문을 주해하며 유명한 '전적 타락(Total Depravity)'의 교리를 천명합니다. 칼빈은 이렇게 갈파합니다.

"인간의 타락은 외투에 먼지가 묻은 수준이 아니다. 인간은 머리 정수리부터 발바닥 끝까지, 지성과 감정과 의지와 양심에 이르기까지 죄의 오염이 미치지 않은 구석이 단 한 곳도 없다. 인간의 본성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우상 공장이 되었으며, 스스로의 힘으로는 하나님을 찾을 수도, 구원에 이르는 선을 행할 능력도 완전히 상실했다"

바다 한가운데서 배가 난파되어 마실 물이 없어 바닷물을 마시는 사람을 상상해 보십시오. 당장 목이 마른다고 바닷물을 들이켜면 살 것 같을 것입니다. 그러나 바닷물을 들이킬수록 염분 때문에 갈증은 더 심해지고 결국 온몸의 장기가 파괴되어 곧 죽음에 이릅니다.

타락한 인간의 영혼이 바로 이와 같습니다.

하나님을 떠난 인간은 영혼의 갈증을 해결하기 위해 권력과 쾌락과 물질의 바닷물을 퍼 마시지만, 마실수록 공허와 죄악의 독기만 가득 차서 스스로를 파멸로 몰아넣을 뿐입니다. 우리는 이를 인정해야 합니다.

"주님, 내 안에는 선한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나는 하나님의 진노를 피할 길 없는 절망적인 죄인입니다."

이런 뼈아픈 자기 파산 선고, 전적 부패의 고백이 터져 나오는 자만이 비로소 십자가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손길을 붙잡을 수 있습니다.

3. 율법의 참된 목적과 오직 믿음의 필연성 (19-20절)

19 우리가 알거니와 무릇 율법이 말하는 바는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에게 말하는 것이니 이는 모든 입을 막고 온 세상으로 하나님의 심판 아래에 있게 하려 함이라
20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19절과 20절은 로마서의 거대한 분수령이자 온 인류를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성령의 절대적 결론입니다.

19절을 보십시오.

"무릇 율법이 말하는 바는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에게 말하는 것이니, 이는 모든 입을 틀어막고(That every mouth may be stopped) 온 세상으로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게 하려 함이라"

우리 인간은 평소에 말이 참 많습니다. "나는 법 없이도 살 사람이다. 나는 저 교도소에 있는 흉악범들에 비하면 양심적으로 살았다. 내가 그래도 가정을 지키고 사회에 봉사하며 남에게 해를 끼치지 않고 살지 않았느냐"라며 저마다 자기 의로움을 드러냅니다.

그러나 거룩하신 하나님의 완전한 율법 앞에 서는 그 순간, 엑스레이 광선 앞에 암 덩어리가 적나라하게 드러나듯 내 심령의 은밀한 탐욕과 추악함이 낱낱이 비추어집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거룩한 보좌 앞에서는 그 어떤 인간도 감히 변명하거나 자기 의를 자랑하지 못하고, 공포와 부끄러움 속에 두 손으로 자기 입을 틀어막고 완전히 침묵할 수밖에 없게 만드시는 것, 이것이 바로 율법의 첫 번째 사명입니다.

20절의 절대 명제를 보십시오.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갈라디아서 2장 16절 역시 똑같이 증언합니다.

2:16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로 말미암음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알므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로써가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써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

하나님이 인간에게 율법을 주신 목적이 무엇입니까?

"너희가 이 율법 조항들을 완벽하게 지켜서 스스로의 실력과 공로로 구원을 따내어 보아라" 하고 주신 구원의 사다리가 아닙니다.

타락한 인간은 그 거룩한 율법의 요구를 100% 온전히 지켜낼 능력이 애초에 없습니다. 율법의 기능은 '거울'입니다. 거울은 내 얼굴에 묻은 더러운 오물을 선명하게 비추어 보여줄 뿐이지, 거울을 떼어내어 얼굴을 문지른다고 해서 오물이 씻겨 나가지 않습니다. 거울을 보고 내 얼굴이 더러운 줄 깨달았으면, 거울을 들고 씨름할 것이 아니라 얼른 깨끗한 물이 솟구치는 '수도꼭지'로 달려가야 합니다.

율법의 거울로 내가 영원히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임을 뼈저리게 깨달은 영혼만이, 갈라디아서 3장 24절 말씀처럼 율법을 몽학선생(초등교사) 삼아, 내 죄를 단번에 씻기시고 값없이 의롭다 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보혈의 샘가'로 미친 듯이 달려가게 되는 것입니다.

내가 의인이 아니기에, 내 행위로는 단 1%의 구원의 가능성도 없기에,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외에는 살길이 없음을 고백하는 것, 이것이 바로 복음의 정수입니다.

오늘 말씀의 요지는 “자신의 의를 꺾고 십자가의 은혜만을 붙들라” 라는 것입니다.

오늘 로마서 3장 1절부터 20절은 인간의 헛된 종교적 허영심과 도덕적 자부심의 바닥을 완전히 긁어내어 박살을 냅니다.

1. 하나님 앞에서 나의 모든 얄팍한 핑계와 궤변의 입을 닫아야 합니다. 남의 허물을 들추며 "나는 저 사람보다 낫다"고 자위하지 말아야 합니다. 거룩하신 하나님의 말씀 앞에 서서 내 속의 탐욕과 불의를 정직하게 시인하게 하십시오. 사람은 다 거짓되되 오직 하나님 만이 참되십니다.

2. "내 안에는 선한 것이 하나도 없다"는 전적 부패의 실존을 인정해야 합니다. 성경의 기소장 앞에 내 교만의 목을 꺾어야 합니다. 내가 영적으로 파산한 죄인임을 통렬하게 자각할 때 비로소 교만이 깨어지고, 이웃을 향한 정죄의 칼날을 거두며 긍휼과 사랑의 손길을 내밀 수 있습니다.

3. 율법의 행위가 아닌 '오직 믿음'으로 의롭다 하시는 십자가를 붙드는 우리들이 되어야 합니다. 나의 공로, 나의 직분, 나의 종교적 열심이라는 썩은 동아줄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오직 나를 위해 십자가에서 피 흘리신 예수 그리스도의 의의 옷만을 덧입어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살다 보면 마음이 통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경험하게 됩니다. 준비하지 않아도 말이 잘 통하는 사람이 있고, 그와 반대로 준비를 많이 해도 말이 잘 통하지 않는 상대방이 있다는 것을 경험합니다. 양자 사이에는 어떤 차이가 있을까요? 영적 주파수의 차이일 것입니다. 육안으로 바로 보이지 않지만 영은 엄연히 존재하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 성령 하나님의 역사하심에 집중하는 우리들이 되어 그분의 음성이 우리 심령을 지배하도록 성령님께 초점을 맞춰야 합니다. 우리 시대는 성령 시대입니다.

이번 한 주간, 세상의 거짓된 의와 공허한 자랑을 벗어 던지고, 매일 말씀의 거울 앞에 나를 비추어 회개해야 합니다. 오직 십자가의 보혈을 믿는 믿음 안에서 참된 자유와 평강을 누리는 우리들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연약하고 허물이 많은 자들입니다. 그러나 우리를 택하시고 의롭다 부르신 하나님의 신실하심은 영원합니다. 일터와 가정에서 자신의 자아와 능력이 아니라 온전히 주님만을 신뢰하며 기도로 나아갈 때, 우리를 통해 하나님의 살아계신 영광이 만방에 찬란하게 드러날 것입니다.

우리 자신은, 자신이 어떤 마음 밭인지? 어떤 자세로 일을 하고 있는지 잘 알고 있을 것입니다. 나의 행동이, 나의 자세가, 나의 마음 가짐이. 가정과 이웃에, 우리 공동체에 무엇보다도 하나님께 어떻게 보여질까 겸허하게 돌아보는 우리 모두가 되었으면 합니다. 매일 말씀의 거울 앞에 서 봄으로써 우리 자신들을 겸허하게 돌아보는 우리들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오늘 말씀을 통해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 하신 성령의 추상같은 판결을 겸허히 영접합니다. 남을 판단하고 내 의로움을 내세우며 핑계와 궤변으로 진리를 가로막았던 우리의 교만과 위선을 용서하여 주옵소서. 내 머리부터 발끝까지 죄로 물들어 스스로는 구원할 수 없는 전적 무능력자임을 고백합니다. 율법의 거울 앞에서 내 부끄러운 입을 틀어막고, 오직 상한 심령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보혈의 샘가로 달려가게 하옵소서. 내 행위나 공로가 아닌, 오직 십자가를 믿는 믿음으로 값없이 주시는 하나님의 의를 덧입어 참된 평강을 누리게 하옵소서. 우리가 살아가는 치열한 일터와 가정의 현장에서 나를 자랑하지 않고 오직 주님의 은혜만을 자랑하며 살아가는 우리들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