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의 할례로 양심의 법정에 선 참된 예배자
로마서 2장 17절-29절 (개역개정)
17 유대인이라 불리는 네가 율법을 의지하며 하나님을 자랑하며
18 율법의 교훈을 받아 하나님의 뜻을 알고 지극히 선한 것을 분간하며
19 맹인의 길을 인도하는 자요 어둠에 있는 자의 빛이요
20 율법에 있는 지식과 진리의 모본을 가진 자로서 어리석은 자의 교사요 어린 아이의 선생이라고 스스로 믿으니
21 그러면 다른 사람을 가르치는 네가 네 자신은 가르치지 아니하느냐 도둑질하지 말라 선포하는 네가 도둑질하느냐
22 간음하지 말라 말하는 네가 간음하느냐 우상을 가증히 여기는 네가 신전 물건을 도둑질하느냐
23 율법을 자랑하는 네가 율법을 범함으로 하나님을 욕되게 하느냐
24 기록된 바와 같이 하나님의 이름이 너희 때문에 이방인 중에서 모독을 받는도다
25 네가 율법을 행하면 할례가 유익하나 만일 율법을 범하면 네 할례는 무할례가 되느니라
26 그런즉 무할례자가 율법의 규례를 지키면 그 무할례를 할례와 같이 여길 것이 아니냐
27 또한 본래 무할례자가 율법을 온전히 지키면 율법 조문과 할례를 가지고 율법을 범하는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겠느냐
28 무릇 표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 아니요 표면적 육신의 할례가 할례가 아니니라
29 오직 이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며 할례는 마음에 할지니 영에 있고 율법 조문에 있지 아니한 것이라 그 칭찬이 사람에게서가 아니요 다만 하나님에게서니라
우리는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이 땅을 살아가면서 수많은 사람들을 만나게 됩니다. 이들 중 여러분은 어떤 사람들이 가장 마음에 그슬리는지요? 동시에 우리들은 어떤 평가를 받고 있을까요?
지난 주에는 로마서 2장 6절부터 16절 말씀을 통해 하나님께서 외모나 혈통, 사회적 신분으로 사람을 차별하지 않으시고, 각 사람이 행한 대로 갚으시는 절대적인 공의의 재판장이심을 살펴 보았습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시내산의 기록된 성문 율법을 귀로 듣고 외우는 자가 의인이 아니라, 그 법을 삶으로 실천하는 자라야 의롭다 함을 얻습니다.
특히 바울은 율법 없는 이방인이라 할지라도 창조주 하나님께서 그들의 심령 속에 심어두신 내면의 법, 곧 ‘양심(συνείδησις, 쉰에이데시스)’이 작동하고 있음을 명백히 밝힙니다. 마음에 새겨진 이 양심의 법이 생각 속에서 서로를 고발하고 변명하며 증언하기에, 이방인이라도 핑계할 수 없습니다. 마침내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사람들의 가장 은밀한 것까지 낱낱이 심판하실 날이 도적같이 임한다는 사실을 엄중히 경고합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 17절에 이르러, 사도 바울의 시선은 다시 한번 율법과 할례의 특권의식에 갇혀 도덕적 자만에 빠져 있던 유대인들을 정면으로 겨눕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자신들이 하나님의 선민(選民)이라는 종교적 우월감에 도취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시내산에서 모세가 받아 전해준 성문 율법을 가졌고, 우리 몸에는 아브라함 언약의 증표인 할례의 흔적이 새겨져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멸망하지 않는다"라며 껍데기뿐인 종교적 간판을 구원의 보증수표처럼 여깁니다. 그러나 바울은 오늘 본문을 통해 그들의 위선적인 종교적 가면을 사정없이 벗겨냅니다. 하나님이 율법을 주신 본래의 정신은 외적인 문자 조항을 달달 외우며 남을 정죄하라고 주신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사람의 심령과 양심을 비추어 하나님을 경외하고 이웃을 온몸으로 사랑하게 하려는 생명의 법이라는 것입니다.
가죽을 베어내는 육신의 할례가 아무리 거룩해 보여도, 그 행위의 주체인 인간의 양심이 썩어 있고 삶의 행동이 불의하다면 그 할례는 아무 쓸모 없는 무할례에 불과합니다.
오늘 본문 17절부터 29절 말씀을 통해, 사도 바울이 선포하는 율법의 참된 정신이 무엇인지, 그리고 하나님께서 오늘 우리에게 원하시는 ‘마음의 할례’와 ‘청결한 양심의 실천’이 무엇인지 깨닫고 거룩한 결단으로 나아가는 우리들이 되어야 합니다.
1. 남을 가르치나 자신은 가르치지 않는 모순 (17-24절)
17 유대인이라 불리는 네가 율법을 의지하며 하나님을 자랑하며
18 율법의 교훈을 받아 하나님의 뜻을 알고 지극히 선한 것을 분간하며
19 맹인의 길을 인도하는 자요 어둠에 있는 자의 빛이요
20 율법에 있는 지식과 진리의 모본을 가진 자로서 어리석은 자의 교사요 어린 아이의 선생이라고 스스로 믿으니
21 그러면 다른 사람을 가르치는 네가 네 자신은 가르치지 아니하느냐 도둑질하지 말라 선포하는 네가 도둑질하느냐
22 간음하지 말라 말하는 네가 간음하느냐 우상을 가증히 여기는 네가 신전 물건을 도둑질하느냐
23 율법을 자랑하는 네가 율법을 범함으로 하나님을 욕되게 하느냐
24 기록된 바와 같이 하나님의 이름이 너희 때문에 이방인 중에서 모독을 받는도다
17절부터 20절까지 바울은 유대인들이 가지고 있던 대단한 자부심을 묘사합니다. 그들은 "유대인"이라는 칭호를 자랑스러워했고, 율법을 의지하며, 하나님과의 특별한 언약 관계를 과시합니다. 스스로 자부하기를, 영적으로 눈먼 이방인들의 눈을 뜨게 해주는 '맹인의 길잡이'요, 흑암에 헤매는 자들을 비추는 '어둠의 빛'이요. 진리의 모본을 독점한 '어리석은 자의 교사요, 영적 어린아이들의 선생'이라고 그들은 굳게 믿고 있습니다.
그러나 21절부터 바울은 숨 쉴 틈도 없이 그들의 폐부를 찌르는 질문을 연타로 날립니다. "남을 가르치는 네가 정작 네 자신은 가르치지 않느냐? 도둑질하지 말라고 강단에서 목청을 높이는 네가 비즈니스 현장에서는 남의 재물을 가로채고 도둑질하느냐? 간음하지 말라고 도덕군자처럼 외치는 네가 음란한 정욕을 품고 마음과 육체로 간음하느냐? 우상을 끔찍이 가증하게 여긴다는 네가 이방 신전의 값비싼 보물을 뒤로 훔쳐 챙기는 탐욕을 부리느냐?"
그리고 23절과 24절에서 가슴을 찢는 비통한 결론을 내립니다.
"율법을 자랑하는 네가 율법을 범함으로 하나님을 욕되게 하느냐? 기록된 바와 같이 하나님의 이름이 너희 때문에 이방인 중에서 모독을 받는도다"
이 말씀은 이사야 52장 5절과 에스겔 36장 19-20절의 통렬한 탄식을 인용한 것입니다.
이사야52:5 그러므로 이제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내 백성이 까닭 없이 잡혀갔으니 내가 여기서 어떻게 하랴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그들을 관할하는 자들이 떠들며 내 이름을 항상 종일토록 더럽히도다
에스겔 36:19 그들을 그 행위대로 심판하여 각국에 흩으며 여러 나라에 헤쳤더니 / 20 그들이 이른바 그 여러 나라에서 내 거룩한 이름이 그들로 말미암아 더러워졌나니 곧 사람들이 그들을 가리켜 이르기를 이들은 여호와의 백성이라도 여호와의 땅에서 떠난 자라 하였음이라
이사야 52장에서는 이방 압제자들의 오만 때문에 하나님의 이름이 모독을 받습니다. 바울은 이를 인용하여 유대인들의 위선적인 행실이 도리어 이방인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거룩한 이름을 또한 모독하게 만들었다고 통렬하게 역설합니다.
선민이라 자처하는 자들의 겉과 속이 다른 이중생활, 입술로는 거룩을 외치면서 양심을 저버린 부패한 행동 때문에, 정작 하나님을 알지 못하던 세상 이방인들이 "예수 믿는 자들이 더 악독하다. 하나님이라는 신이 진짜 살아 있다면 저런 위선자들을 가만두겠느냐?"라며 거룩하신 하나님의 이름을 짓밟고 조롱하게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마태복음 23장 25절부터 28절에서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을 향해 화를 선포하셨습니다.
"25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잔과 대접의 겉은 깨끗이 하되 그 안에는 탐욕과 방탕으로 가득하게 하는도다 26 눈 먼 바리새인이여 너는 먼저 안을 깨끗이 하라 그리하면 겉도 깨끗하리라 27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회칠한 무덤 같으니 겉으로는 아름답게 보이나 그 안에는 죽은 사람의 뼈와 모든 더러운 것이 가득하도다 28 이와 같이 너희도 겉으로는 사람에게 옳게 보이되 안으로는 외식과 불법이 가득하도다"
종교적 직분과 지식은 쌓여가는데, 하나님이 심어주신 내면의 양심이 마비되어 삶의 실천이 결여될 때, 우리는 세상의 빛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가로막는 영적 걸림돌로 전락하고 맙니다.
러시아의 대문호 레프 톨스토이(Leo Tolstoy, 1828~1910)는 귀족 가문에서 태어나 어려서부터 정교회의 세례를 받고 교리와 의식을 완벽하게 배우며 자랍니다. 그는 정교회의 모든 금식을 철저히 지켰고, 성당의 웅장한 미사에 빠짐없이 참석하며 겉으로는 완벽한 그리스도인 귀족의 모습을 유지합니다.
그러나 그의 20대와 30대 청년 시절의 일기장을 보면, 그의 내면은 끔찍한 위선과 양심의 가책으로 피폐해져 있습니다. 일기장에 "도덕적으로 살아야 한다, 순결해야 한다"고 수백 번 기록하면서도, 정작 삶의 현장에서는 도박판을 전전하며 가난한 농노들의 피땀 어린 돈을 탕진했고, 농노의 여인들을 유린하는 방탕한 삶을 살아갑니다. 겉으로는 정교회의 귀족 신자라는 껍데기를 자랑했으나, 속으로는 양심의 법정을 난도질하는 이중인격자입니다.
50대에 접어든 톨스토이는 그의 명저 ‘참회록(Confession)’에서 당시의 위선을 피를 토하듯 고백합니다. "나는 교회의 예식을 다 지키고 율법의 지식을 자랑했으나, 정작 내 삶은 탐욕과 간음과 살인의 연속이었다. 사람들은 나를 도덕적인 대작가요 훌륭한 신자라고 칭송했으나, 하나님의 양심의 거울 앞에 선 나는 한 마리 더러운 벌레에 불과했다. 내 위선이 하나님의 이름을 진흙탕에 처박고 있었다" 톨스토이는 자신의 이 뼈아픈 위선과 죄책감을 바탕으로 만년에 소설 ‘부활(Resurrection)’을 집필합니다. 주인공 네흘류도프 공작이 젊은 날 자신의 정욕으로 파멸시켰던 카튜샤라는 여인의 재판정에 배심원으로 참석합니다. 그는 법복을 입고 거룩한 척 앉아 있는 귀족들과 판사들의 위선을 보며 마침내 자신의 마비되었던 양심을 깨우치게 됩니다. 이후 그는 모든 특권을 내려놓은 채 시베리아 십자가의 길로 따라나서는 영적으로 거듭나게 됩니다.
이것이 무엇을 웅변합니까? 다양한 성경책과 종교적 지식이 우리를 구원하지 못합니다. 입술로는 정통 교리를 쏟아내면서도, 내면의 양심을 속이고 일터와 가정에서 불의를 행한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이름을 세상의 조롱거리로 만드는 영적 가해자가 될 뿐입니다. 내 양심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가르친 바를 내 삶으로 먼저 살아내는 진실한 우리들이 되어야 합니다.
2. 문자적 조항을 뛰어넘는 양심의 순종 (25-27절)
25 네가 율법을 행하면 할례가 유익하나 만일 율법을 범하면 네 할례는 무할례가 되느니라
26 그런즉 무할례자가 율법의 규례를 지키면 그 무할례를 할례와 같이 여길 것이 아니냐
27 또한 본래 무할례자가 율법을 온전히 지키면 율법 조문과 할례를 가지고 율법을 범하는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겠느냐
사도 바울은 이제 유대인들이 목숨처럼 붙들고 있던 ‘할례(Circumcision)’의 문제를 도마 위에 올립니다. 유대인들에게 할례는 단순한 위생적 수술이 아닙니다. 창세기 17장에서 아브라함에게 주셨던 "영원한 언약의 표징"입니다. 당시 랍비 문헌들을 보면 극단적인 유대주의자들은 "할례받은 유대인은 지옥에 떨어지지 않으며, 아브라함이 지옥 문앞에 서서 혹시라도 할례받은 자가 들어오지 못하도록 막아준다"는 터무니없는 미신적 확신까지 품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25절에서 영적 폭탄을 던집니다.
"네가 율법을 행하면 할례가 유익하나, 만일 율법을 범하면 네 할례는 무할례가 되느니라"
할례라는 외적 의식은 그 자체로 마술적인 구원의 효력을 발휘하는 부적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겠다는 '순종의 서약'입니다. 그런데 삶에서 율법을 짓밟고 하나님의 뜻을 거역한다면, 그 몸에 새겨진 할례의 상흔은 아무런 의미가 없는 '무할례(이방인)'와 똑같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26절과 27절에는 충격적인 반전이 있습니다. 비록 몸에 육신의 할례를 받지 못한 이방인(무할례자)이라 할지라도, 그 마음에 새겨진 양심의 법을 따라 하나님의 거룩한 공의와 사랑의 규례를 지켜 행한다면, 하나님은 그를 할례받은 하나님의 백성으로 인정해 주시지 않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 날 하나님 보좌 심판대 앞에서는, 율법 조문과 할례를 손에 쥐고도 양심을 팔아먹은 위선적인 유대인들을 향해, 성문 율법은 없었으나 양심의 법을 따라 진실하게 행했던 이방인들이 일어나 그 유대인들을 정죄하고 심판하는 거대한 구속사의 역전이 벌어질 것이라 선언합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눅 10:30~37)'를 기억하십니까? 강도를 만나 피를 흘리며 죽어가는 사람 곁을 지나간 제사장과 레위인을 보십시오. 그들은 율법의 조문 전문가들입니다. "시체를 만지면 부정해져서 성전 제사를 집례할 수 없다"는 율법 조문의 형식에 갇혀 죽어가는 이웃을 외면하고 지나치면 지나갑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에게 개 취급을 받으며 할례의 정통성을 인정받지 못했던 이방 사마리아인은 어떠합니까? 그는 불쌍히 여기는 내면의 양심, 율법의 심장인 '긍휼과 자비의 법'에 이끌려 자신의 기름과 포도주를 붓고 나귀에 태워 주막으로 데려가 살려냅니다. 이에 예수님은 율법사에게 물으십니다. "네 생각에는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행하라" 형식적인 종교 의식에 매여 양심의 소리를 짓밟는 자가 아니라, 비록 외적 조건은 부족할지라도 하나님이 주신 양심을 따라 사랑과 공의를 실천하는 자가 바로 율법의 완성자요 참된 하나님의 사람입니다.
3. 영으로 마음에 새기는 신앙 (28-29절)
28 무릇 표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 아니요 표면적 육신의 할례가 할례가 아니니라
29 오직 이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며 할례는 마음에 할지니 영에 있고 율법 조문에 있지 아니한 것이라 그 칭찬이 사람에게서가 아니요 다만 하나님에게서니라
드디어 바울은 로마서 2장의 대단원을 장식하며, 신약과 구약을 관통하는 참된 성도의 영적 정체성을 만천하에 선포합니다. 28절과 29절 말씀을 다 함께 한 목소리로 가슴에 새기듯 읽어보겠습니다.
"무릇 표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 아니요 표면적 육신의 할례가 할례가 아니니라. / 오직 이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며, 할례는 마음에 할지니 영에 있고 율법 조문에 있지 아니한 것이라. 그 칭찬이 사람에게서가 아니요 다만 하나님에게서니라"
바울은 두 가지 차원을 날카롭게 가릅니다.
- ‘표면적(밖으로 드러난) 유대인’ vs ‘이면적(숨은 중심의) 유대인’
- ‘육신의 가죽에 행한 껍데기 할례’ vs ‘성령으로 마음에 행한 영적 할례’
바울이 말하는 '마음의 할례'는 신약에 와서 갑자기 생겨난 새로운 교리가 아닙니다. 구약 모세오경과 선지서 전체가 피를 토하며 외쳤던 하나님의 본심입니다.
(1) 신명기 10장 16절: "그러므로 너희는 마음에 할례를 행하고 다시는 목을 곧게 하지 말라"
(2) 신명기 30장 6절: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마음과 네 자손의 마음에 할례를 베푸사 너로 마음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게 하사 너로 생명을 얻게 하실 것이며"
(3) 예레미야 4장 4절: "유다인과 예루살렘 주민들아 너희는 스스로 할례를 행하여 너희 마음 가죽을 베고 나 여호와께 속하라"
하나님은 단 한 번도 육체의 껍데기를 잘라내는 외적 의식 자체에 만족하신 적이 없습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마음 가죽을 베어내는 것'입니다. 내 교만의 가죽, 내 탐욕의 가죽, 내 혈기와 음란의 단단한 자아의 가죽을 성령의 거룩한 메스로 도려내고, 하나님 앞에 겸손히 엎드려 부서진 심령으로 반응하는 것, 그것이 바로 참된 할례입니다.
디모데전서 1장 5절은 선포합니다.
"이 교훈의 목적은 청결한 마음과 선한 양심과 거짓이 없는 믿음에서 나오는 사랑이거늘"
히브리서 10장 22절 역시 증언합니다.
"우리가 마음에 뿌림을 받아 악한 양심으로부터 벗어나고 몸은 맑은 물로 씻음을 받았으니 참 마음과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자"
'유대인(יְהוּדָה / 예후디)'이라는 히브리어 단어의 어원은 '야다', 즉 '찬양하다, 감사하다'라는 뜻입니다. 창세기 29장 35절에서 레아가 넷째 아들을 낳고 "내가 이제는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 하고 이름을 '유다'라 짓습니다. 유대인은 야곱의 넷째 아들 유다에서 유래한 것입니다.
바울은 이 언어적 유희를 사용하여 29절 말미에서 선언합니다. 참된 유대인은 사람들에게 박수받고 칭찬받으려(유대인의 어원) 종교적 쇼를 하는 자가 아닙니다. 오직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으로부터 "착하고 충성된 종이라" 칭찬을 받는 사람입니다.
사람의 눈을 의식하는 신앙은 율법 조문에 갇힌 외식의 노예가 됩니다. 하나님의 눈(코람데오)을 의식하는 신앙은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청결한 양심으로 거룩한 삶의 열매를 맺습니다.
오늘 사도 바울의 추상같은 외침은 2천 년 전 로마의 유대인들만을 향한 말씀이 아닙니다. 오늘날 주일이면 성경책을 끼고 예배당을 찾으며, 직분을 자랑하고, 모태신앙의 혈통을 과시하면서도, 정작 삶의 현장에서는 양심을 저버린 채 세상 사람들과 똑같이 탐욕과 거짓을 일삼는, 오늘 우리 한국 교회와 우리 자신을 향한 성령의 거룩한 직격탄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세 가지 영적 결단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1) 외식적 껍데기와 직분의 가면을 벗어 던져 버려야 합니다. "내가 목사요, 장로요, 권사요, 집사요, 모태신앙이다"라는 영적 기득권을 다 내려놓아야 합니다. 사람의 눈을 속이는 껍데기 신앙으로는 타오르는 하나님의 불꽃 같은 눈동자를 피할 수 없습니다. 겉모습의 화려함을 자랑하기 전에, 내 은밀한 골방의 양심이 하나님 앞에서 진실한지 정직하게 돌아보아야 합니다.
(2) 내 마음의 질긴 자아의 가죽을 베어내는 '마음의 할례'를 받아야 합니다. 남을 판단하고 비판하던 그 날카로운 잣대로 내 안의 허물과 교만의 가죽을 도려내야 합니다. 성령의 불로 내 굳은 마음을 쪼개어 드리고, 다윗처럼 "하나님이여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라고 눈물로 부르짖어야 합니다.
(3) 사람의 칭찬이 아니라 하나님의 인정을 갈망하며, 가정과 일터에서 '청결한 양심'으로 행동해야 합니다. 텐트 메이커로서 우리들이 매일 살아가는 가정과 치열한 비즈니스 현장과 직장이 바로 우리들의 영적 할례가 증명되는 제단입니다. 손해를 보더라도 하나님의 정직을 붙드는 우리들이 되어야 합니다. 거짓된 타협을 거절하고, 하나님이 주신 선한 양심에 따라 공의와 사랑을 실천해야 합니다.
그리할 때, 세상 사람들은 우리의 진실한 삶을 보며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찬양하게 될 것입니다. 마지막 날 주님께서는 우리들을 향해 "너야말로 사람의 칭찬이 아닌 나의 인정을 받은 참된 내 백성이요, 이면적 그리스도인이다!"라며 영원한 칭찬과 상급으로 안아주실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번 한 주간, 율법 조문의 형식주의를 벗어 던지고, 성령 안에서 마음의 할례를 받아 선한 양심이 승리하는 우리들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부족한 지체임을 인정해야 합니다. 허물이 많은 자들임을 또한 돌아보아야 합니다. 당장 우리 기도에 응답이 없어도 천지를 창조하시고 창세전에 우릴 하나님 백성으로 택하신 그 은혜를 가장 귀하게 여겨야 합니다. 그리고 시간을 정하여 하나님과 독대함으로써 우리의 어려움을, 한계를 넘어 역사하실 주님을 신뢰하므로 우리를 통해 하나님 영광이 만방에 드러나도록 기도로, 실천으로 투쟁해야 합니다. 우리 자신은, 나는, 가정에서, 공동체에서, 하나님 앞에서 어떤 중심으로 평가나 칭찬을 받는지 돌아보는 시간되었으면 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입술로는 거룩을 외치고 남을 가르치면서도, 정작 내 삶에서는 양심을 속이고 은밀한 탐욕과 죄악을 일삼아 하나님의 거룩하신 이름을 세상의 모독거리로 만들었던 위선을 회개하오니 용서하여 주옵소서. 육신의 형식적인 껍데기를 의지하지 않게 하시고, 십자가의 피와 성령의 거룩한 손길로 우리 마음의 완악한 가죽을 베어내게 하옵소서. 선한 양심과 거짓 없는 믿음으로 무장하여,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부끄러움 없는 순전한 심령을 회복하게 하옵소서. 사람의 눈치와 칭찬을 구하지 않는 은밀한 중심을 감찰하시는 하나님의 인정을 사모하는 참된 예배자가 되게 하옵소서. 우리가 발 딛고 살아가는 비즈니스와 가정의 현장에서 말씀과 양심에 순종하는 삶의 예배를 드림으로써, 세상의 어둠을 밝히고 주님의 영광을 온전히 드러내게 하옵소서. 아직 응답이 없는 기도에도 실망하지 않고 더욱 가열차게 주님을 찾는 우리들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