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한 대로 갚으시는 공의와 마음에 새겨진 양심의 법정
로마서 2장 6-16 (개역개정)
6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그 행한 대로 보응하시되
7 참고 선을 행하여 영광과 존귀와 썩지 아니함을 구하는 자에게는 영생으로 하시고
8 오직 당을 지어 진리를 따르지 아니하고 불의를 따르는 자에게는 진노와 분노로 하시리라
9 악을 행하는 각 사람의 영에는 환난과 곤고가 있으리니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며
10 선을 행하는 각 사람에게는 영광과 존귀와 평강이 있으리니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라
11 이는 하나님께서 외모로 사람을 취하지 아니하심이라
12 무릇 율법 없이 범죄한 자는 또한 율법 없이 망하고 무릇 율법이 있고 범죄한 자는 율법으로 말미암아 심판을 받으리라
13 하나님 앞에서는 율법을 듣는 자가 의인이 아니요 오직 율법을 행하는 자라야 의롭다 하심을 얻으리니
14 (율법 없는 이방인이 본성으로 율법의 일을 행할 때에는 이 사람은 율법이 없어도 자기가 자기에게 율법이 되나니
15 이런 이들은 그 양심이 증거가 되어 그 생각들이 서로 혹은 고발하며 혹은 변명하여 그 마음에 새긴 율법의 행위를 나타내느니라)
16 곧 나의 복음에 이른 바와 같이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사람들의 은밀한 것을 심판하시는 그 날이라
사람들은 남을 비판하기를 좋아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각종 인터넷 사이트에서도 자신이 재직중인 회사, 공동체, 또는 자주 접하는 사람들을 비판합니다. 이런 사이트들이 인기가 있습니다. 그런데 누가 자신을 비판하면 기분이 언짢아 집니다. 왜 그럴까요?
우리는 지난주 로마서 1장 후반부를 통해 창조주 하나님을 마음에 두기 싫어했던 이방 세계의 적나라한 불경건과 21가지의 추악한 죄악상, 그리고 순리를 역리로 바꾼 죄의 결과들을 살펴보았습니다. 아마도 당시 로마에 있던 유대인들은 그 말씀을 들으며 속으로 통쾌해 했을 것입니다. "그렇지, 저 더럽고 음란한 우상 숭배자 헬라인들은 하나님의 무서운 진노를 받아 마땅해, 우리는 모세의 율법을 받았고 할례를 받은 거룩한 하나님의 선민이니 저들과는 근본적으로 달라"라며 고개를 끄덕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로마서 2장 1절에 들어서자마자, 그러한 유대인들의 종교적 특권의식과 도덕적 우월주의의 턱밑을 향해 성령의 날카로운 비수를 겨눕니다. 2장 1절입니다.
"그러므로 남을 판단하는 사람아, 누구를 막론하고 네가 핑계하지 못할 것은 남을 판단하는 것으로 네가 너를 정죄함이니 판단하는 네가 같은 일을 행함이니라"
바울은 이방인들을 손가락질하며 도덕 선생 노릇을 하던 유대인들의 종교적 가면을 가차 없이 벗겨버립니다. "너희가 저 이방인들의 간음과 탐욕과 우상숭배를 정죄하면서, 너희 자신은 장막 뒤에서, 보이지 않는 은밀한 곳에서 똑같은 탐욕과 죄악을 저지르고 있지 않느냐? 남을 재판하는 그 엄격한 잣대로 너 자신을 달아보아라. 너 역시 하나님의 준엄한 심판대 앞에 서 있는 똑같은 죄인일 뿐이다" 유대인들은 하나님께서 즉각 벼락을 내리지 않으시고 심판을 유예하고 계신 것을 보며, 자신들이 의로워서 복을 누리고 있다고 착각합니다. 이에 대해 바울은 2장 4절과 5절에서 통렬하게 꾸짖습니다.
"혹 네가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너를 인도하여 회개하게 하심을 알지 못하여 그의 인자하심과 용납하심과 길이 참으심이 풍성함을 멸시하느냐? 다만 네 고집과 회개하지 아니한 마음을 따라 진노의 날 곧 하나님의 의로우신 심판이 나타나는 그 날에 임할 진노를 네게 쌓는도다"
하나님이 지금 당장 죄인을 치지 않으시는 것은 그 죄를 눈감아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단 한 영혼이라도 회개하고 돌아오기를 눈물로 기다리시는 '길이 참으심'의 은혜입니다. 그러나 그 은혜를 멸시하고 완고한 고집으로 회개하지 않는 자는, 날마다 적금 통장에 돈을 쌓아가듯 하나님의 맹렬한 진노를 차곡차곡 쌓아 올리고 있는 어리석은 자입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 6절에서 바울은 온 인류를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궁극적인 심판 기준을 선포합니다.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그 행한 대로 보응하시되"
하나님께서는 혈통이나 문벌, 외적인 직분이나 종교적 간판에 속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만인의 삶을 낱낱이 달아보시고 행한 대로 갚으시는 엄격한 '인과응보(因果應報)의 하나님'이시며, 사람의 피부나 외모가 아닌 마음의 중심과 양심의 소리를 심판하시는 참된 재판장이십니다. 오늘 본문 6절부터 16절을 통해, 껍데기뿐인 율법주의를 벗어 던지고 내 마음에 새겨진 양심의 법정 앞에 서서 진정한 행함과 경건의 열매를 맺는 거룩한 우리들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1. 행한 대로 갚으시는 하나님의 절대적 공의 (6~11절)
6절: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그 행한 대로 보응하시되
7절: 참고 선을 행하여 영광과 존귀와 썩지 아니함을 구하는 자에게는 영생으로 하시고
8절: 오직 당을 지어 진리를 따르지 아니하고 불의를 따르는 자에게는 진노와 분노로 하시리라
9절: 악을 행하는 각 사람의 영에는 환난과 곤고가 있으리니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며
10절: 선을 행하는 각 사람에게는 영광과 존귀와 평강이 있으리니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라
11절: 이는 하나님께서 외모로 사람을 취하지 아니하심이라
6절의 선언은 바울이 즉흥적으로 지어낸 말이 아닙니다. 구약 성경 전체를 관통하는 하나님의 공의의 대원칙입니다.
시편 62편 12절: "주여 인자함은 주께 속하오니 주께서 각 사람이 행한 대로 갚으심이니이다."
잠언 24장 12절: "마음을 저울질하시는 이가 어찌 통찰하지 못하시겠으며 네 영혼을 지키시는 이가 어찌 알지 못하시겠느냐 그가 각 사람의 행위대로 보응하시지 않겠느냐"
예레미야 17장 10절: "나 여호와는 심장을 살피며 폐부를 시험하고 각각 그의 행위와 그의 행실대로 보응하나니."
하나님의 저울은 단 0.1그램의 오차도 없습니다. 7절과 8절을 보십시오.
7절: 참고 선을 행하여 영광과 존귀와 썩지 아니함을 구하는 자에게는 영생으로 하시고
8절: 오직 당을 지어 진리를 따르지 아니하고 불의를 따르는 자에게는 진노와 분노로 하시리라
인류는 하나님 앞에서 혈통이나 빈부귀천이 아니라, 오직 그 행실의 열매에 따라 두 갈래 길로 엄격하게 나뉩니다.
한쪽 길은 "참고 선을 행하여 영광과 존귀와 썩지 아니함을 구하는 자"입니다. 이들은 눈앞의 쾌락이나 이익에 일희일비하지 않고, 믿음의 인내(Hupomone)로 좁은 길을 걸어가는 자들입니다. 하나님은 이들에게 썩어질 세상의 보상이 아닌 '영원한 생명(영생)'으로 갚아주십니다.
반대쪽 길은 "오직 당을 지어 진리를 따르지 아니하고 불의를 따르는 자"입니다. 여기서 '당을 짓는다(에리데이아)'는 말은 이기적인 야망과 당파심으로 똘똘 뭉쳐 하나님의 거룩한 진리를 거부하고 불의와 타협하는 태도를 뜻합니다. 하나님은 이들에게 '진노와 분노'로 갚으십니다.
그리고 바울은 9절과 10절에서 거듭 강조합니다. 악을 행하는 자에게는 영혼의 뼈를 깎는 환난과 곤고가 임할 것인데,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입니다. 선을 행하는 자에게는 하늘의 영광과 존귀와 평강이 임할 것인데, 이 역시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입니다.
왜 "먼저는 유대인에게"입니까?
유대인들은 먼저 말씀을 맡았고, 먼저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한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먼저 은혜를 받고도 악을 행한 자에게는 심판의 매가 먼저 떨어지는 것이 공의입니다. 반대로 먼저 받은 은혜에 합당하게 선을 행한 자에게는 상급의 영광이 먼저 임합니다.
11절은 이 모든 원리의 쐐기를 박습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외모로 사람을 취하지 아니하심이라"
세상 법정은 뇌물이나 권력, 화려한 스펙과 가문의 배경(외모)에 따라 판결이 굽어집니다. 그러나 우주의 최고 재판장이신 하나님 앞에서는 아브라함의 혈통도, 대형교회의 직분도, 헌금의 액수도 심판을 피하는 방패막이가 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오직 중심에서 우러나온 행함의 열매만을 보십니다.
역사 속에서 권력의 외모에 굴복하지 않고, 하나님의 행한 대로 갚으시는 공의의 법정 앞에 자신의 전 생애를 던졌던 대표적인 인물이 있습니다. 16세기 영국의 대법관이자 인문학자였던 토머스 모어(Thomas More, 1478~1535)입니다.
당시 영국의 절대군주 헨리 8세는 자신의 정욕과 후계자 문제를 위해 첫째 왕비 캐서린과 이혼하고 앤 불린(1501-7?~1536)과 재혼하려 합니다. 이를 교황청이 거부하자, 왕은 자신이 영국 교회의 최고 수장임을 선포하는 '수장령(Act of Supremacy)'을 통과시키고, 모든 신하와 성직자들에게 이에 복종하는 맹세를 강요합니다.
영국의 모든 귀족과 주교들이 목숨을 건지고 권세를 유지하기 위해 왕 앞에 무릎을 꿇고 거짓 맹세를 합니다. 그러나 당시 대법관이었던 토머스 모어는 단호히 거부합니다. 그는 모든 관직에서 사임하고 런던탑 지하 감옥에 갇힙니다.
그의 친구들과 심지어 사랑하는 아내와 딸까지 감옥으로 찾아와 눈물로 애원했다고 합니다. "여보, 그냥 입술로만 맹세한다고 고개만 끄덕이시오. 마음속으로는 하나님을 믿더라도 겉으로는 왕의 법을 따른다고 서명만 하면 살 수 있소. 왜 가문 전체를 파멸로 몰아넣습니까?" 그때 토머스 모어는 성경을 가리키며 가족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오늘 왕의 비위를 맞추어 목숨을 건진다면, 내일 하나님께서 '네가 사람의 눈치를 보느라 진리를 팔아넘겼구나' 하실 때 내가 무슨 낯으로 그 심판대 앞에 서겠소? 왕의 권력은 내 목을 벨 수는 있어도, 하나님이 지켜보시는 내 양심을 벨 수는 없소. 하나님은 외모를 보지 않으시고 각 사람의 행한 대로 갚으시는 분이오."
1535년 7월 6일, 단두대 위에 올라선 토머스 모어는 사형 집행인에게 자신의 수염을 가다듬어 주며 역사의 길이 남을 명언을 남깁니다.
"나는 국왕의 충직한 신하로서 죽지만, 무엇보다 하나님의 신하로서 먼저 죽노라"
토머스 모어는 세상의 외모와 권력의 눈치를 보지 않고, 행한 대로 갚으시는 만왕의 왕 하나님의 법정을 바라보았기에 단두대 앞에서도 영광과 존귀의 길을 걸어갈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세상의 권세에 아부한 수많은 배교자들의 이름은 역사의 부끄러움으로 흩으셨으나, 진리 편에 섰던 토머스 모어의 이름은 썩지 않는 믿음의 별로 영원히 빛나게 하셨습니다.
2. 듣는 자가 아니요 행하는 자라야 (12~13절)
12절: 무릇 율법 없이 범죄한 자는 또한 율법 없이 망하고 무릇 율법이 있고 범죄한 자는 율법으로 말미암아 심판을 받으리라
13절: 하나님 앞에서는 율법을 듣는 자가 의인이 아니요 오직 율법을 행하는 자라야 의롭다 하심을 얻으리니
유대인들의 결정적인 착각은 "우리는 모세의 율법을 손에 쥐고 있다"는 소유의식에 있습니다.
안식일마다 회당에 모여 율법의 낭독을 귀로 듣고, 율법 구절을 적은 경문갑을 이마와 손목에 매고 다니는 것만으로 자신들은 이미 의인이라고 굳게 믿습니다. 그러나 13절 말씀을 보십시오. 바울은 망치로 머리를 내리치듯 명확하게 선언합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율법을 듣는 자가 의인이 아니요, 오직 율법을 행하는 자라야 의롭다 하심을 얻으리니"
율법을 백 번, 천 번 암송하고 귀로 들으면 무엇합니까? 그 율법의 말씀대로 살지 않는다면, 그 율법은 구원의 증명서가 아니라 마지막 날 그를 고발하는 가장 무서운 '검사의 기소장'이 될 뿐입니다.
12절 말씀처럼, 모세의 율법을 문서로 받지 못한 이방인은 뒤에 살펴볼 '마음의 법(양심)'을 어겼기 때문에 망할 것이요, 율법을 환히 알고도 죄를 범한 유대인은 그 기록된 성문 율법의 조목조목에 의해 더 무거운 심판을 받게 됩니다. 신약의 야고보 사도 역시 이 원리를 야고보서 1장 22절부터 25절에서 생생한 비유로 폭로합니다.
"22 너희는 말씀을 행하는 자가 되고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자가 되지 말라 23 누구든지 말씀을 듣고 행하지 아니하면 그는 거울로 자기의 생긴 얼굴을 보는 사람과 같아서 24 제 자신을 보고 가서 그 모습이 어떠했는지를 곧 잊어버리거니와 25 자유롭게 하는 온전한 율법을 들여다보고 있는 자는 듣고 잊어버리는 자가 아니요 실천하는 자니 이 사람은 그 행하는 일에 복을 받으리라"
거울을 들여다보고 얼굴에 더러운 검댕이 묻은 것을 확인했으면서도, 손으로 씻어내지 않고 돌아선다면 그 거울을 본 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말씀을 듣고 설교에 은혜 받았다고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문을 나서는 순간 가정에서, 직장에서, 일터에서 여전히 거짓과 혈기와 불의를 반복한다면, 그것은 성경을 소유한 종교인일 뿐 하나님 앞에서는 스스로를 속이는 가증한 자에 불과합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율법의 '지식'이 아니라 삶의 '순종'입니다.
3. 은밀한 것을 심판하시는 양심의 법정 (14~16절)
14절: 율법 없는 이방인이 본성으로 율법의 일을 행할 때에는 이 사람은 율법이 없어도 자기가 자기에게 율법이 되나니
15절: 이런 이들은 그 양심이 증거가 되어 그 생각들이 서로 혹은 고발하며 혹은 변명하여 그 마음에 새긴 율법의 행위를 나타내느니라
16절: 곧 나의 복음에 이른 바와 같이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사람들의 은밀한 것을 심판하시는 그 날이라
여기서 우리는 복음을 알지 못했던 이방인들과 역사 속 모든 사람들에게 적용되는 하나님의 놀라운 공의의 신비를 발견하게 됩니다. 유대인들은 교만하게 물었습니다. "이방인들은 시내산에서 모세가 받은 십계명과 율법의 돌판이 없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그들은 법이 없으니 심판도 받지 않는 것입니까?" 바울은 14절과 15절에서 단호하게 대답합니다.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돌판에 새긴 율법을 받지 못한 이방인들의 가슴속에도, 창조의 손길로 '마음에 새긴 내면의 율법'을 심어놓으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양심(Conscience, συνείδησις 쉰에이데시스)'입니다"
'양심'이라는 헬라어 원어는 '함께(syn)'와 '알다(eido)'가 합쳐진 말입니다. 즉, '하나님과 인간이 함께 공유하고 있는 내면의 지식'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인간의 심령 속에 하늘의 감시 카메라요, 내면의 판사이자 검사인 양심을 내장해 두셨습니다.
아무리 법률이 미치지 않는 정글의 원주민이라 할지라도, 살인을 저지르거나 도둑질을 하거나 거짓말을 할 때 심장이 두근거리고 두려움에 사로잡힙니다. 왜 그렇습니까? 15절 말씀처럼, 그의 양심이 증인이 되어 그의 생각들이 서로를 고발하고 변명하며 마음에 새겨진 법의 작동을 증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시내산 율법이 없던 사람이라 할지라도, 하나님 앞에서는 "나는 배운 적이 없어서 죄인 줄 몰랐습니다"라고 핑계할 수 없습니다. 자기 자신이 자기에게 율법이 되어, 자신이 행한 행동의 동기와 과정을 가장 잘 아는 자기 자신의 '양심'이 마지막 날 하나님의 보좌 앞에서 자신을 고발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16절에서 바울은 숨이 멎을 듯한 최후의 심판 광경을 선포합니다.
"곧 나의 복음에 이른 바와 같이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사람들의 은밀한 것을 심판하시는 그 날이라"
전도서 12장 14절은 증언합니다. "하나님은 모든 행위와 모든 은밀한 일을 선악 간에 심판하시리라." For God will bring every deed into judgment, including every hidden thing, whether it is good or evil.
그런데 이 땅을 살아가다 보면 양심이 없는 사람들을 보게 됩니다. 사람이 인면수심이라고 어떻게 저럴 수가 있을까 합니다. 어떤 측면에서는 인면 수심하면 짐승이 화를 낼지도 모릅니다. 짐승이나 동물도 그렇지는 않거든요. 지나가는 병아리를 사람들이 잘 모르고 건드리면 어미 닭이 목숨 걸고 달려 들어 그 병아리를 보호합니다. 인면수심의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이미 버리신 사람들입니다. 악인들은 하나님께서 그냥 버려두시는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5장 10절은 선언합니다. "이는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나타나게 되어 각각 선악 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
세상의 경찰관과 판사는 겉으로 드러난 증거와 cctv에 잡힌 외형적 범죄만을 다룹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법정은 다릅니다. 남들은 보지 못하는 골방에서 행한 일, 은밀하게 즐겼던 죄악, 겉으로는 거룩한 미소를 짓고 있었지만 마음속 깊은 곳에서 품었던 시기와 살인과 음란의 생각까지, 사람들의 가장 '은밀한 것'을 대낮의 햇빛 아래 발가벗기듯 낱낱이 심판하시는 날이 반드시 도적같이 임한다는 사실입니다.
러시아의 대문호 표도르 도스토옙스키(Fyodor Dostoevsky,1821-1881)의 불후의 명작 ‘죄와 벌(Crime and Punishment)’은 바로 이 로마서 2장 15절의 '양심의 법정'을 가장 극적으로 형상화한 작품입니다.
주인공인 가난한 20대 법대생 ‘라스콜리니코프’는 인간을 두 부류로 나누는 오만한 사상에 빠져 들어 있습니다. 세상에는 나폴레옹처럼 인류를 위해 기존의 도덕률을 뛰어넘어 사람을 죽여도 죄가 되지 않는 '비범한 초인'이 있고, 그저 번식이나 하는 '평범한 벌레 같은 인간'이 있다는 착각입니다.
그는 사회의 악이라고 규정한 전당포 노파를 도끼로 잔인하게 쳐 죽입니다. 사건 현장에는 그 어떤 목격자도 없었고, 경찰의 수사망도 완벽하게 피합니다. 인간의 외적 법정은 그를 체포할 증거를 찾지 못합니다. 완전범죄입니다.
그러나 그 순간부터 라스콜리니코프의 영혼 속에서 성경이 말하는 맹렬한 지옥의 불길이 타오르기 시작합니다. 아무도 그를 잡으러 오지 않았지만, 그의 마음속에 새겨진 '양심'이 깨어나 밤마다 그를 채찍질합니다. 방문 두드리는 소리만 나도 사시나무 떨듯 떨었고, 고열과 환각에 시달리며 미쳐갑니다. 그의 생각들이 15절 말씀처럼 서로를 고발하고 변명하며 피 말리는 영적 고문을 가한 것입니다.
수사를 담당하던 예리한 예심판사 ‘포르피리’는 그에게 결정적인 물증을 들이대지 않고, 이렇게 말하며 심리적 포위망을 좁혀옵니다. "라스콜리니코프 씨, 당신은 법의 그물을 빠져나갈 수 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당신 자신의 양심의 그물에서는 영원히 도망칠 수 없습니다. 당신을 고발하는 자는 경찰이 아니라 바로 당신 심장에 박혀 있는 하나님의 법입니다"
결국 라스콜리니코프는 자신을 옥죄는 양심의 고통을 견디다 못해,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랑과 참회를 일깨워준 여인 소냐 앞에서 무릎을 꿇고 울부짖으며 경찰서로 걸어가 스스로 자백합니다. 그리고 시베리아 벼랑 끝 유형지에서 성경을 펼쳐 들고 참된 회개와 구원의 빛을 발견하게 됩니다.
이것이 무엇을 말해 줍니까?
인간은 경찰의 눈은 속일 수 있고 법망의 허점은 피해 갈 수 있어도, 하나님께서 우리 심령에 박아두신 '양심의 추궁'에서는 결코 도망칠 수 없다는 명백한 증거입니다. 은밀한 죄를 덮어두고 살아가는 영혼에는 평안이 없습니다. 그 은밀한 것을 주님 앞에 낱낱이 쏟아놓고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씻김 받기 전까지, 인간의 영혼은 영원한 환난과 곤고의 감옥에 갇혀 있을 뿐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사도 바울은 로마 교회를 향해, 그리고 오늘 번영과 형식주의의 매너리즘에 빠져 있는 우리 한국 교회를 향해, 현 우리 시대를 향해 추상같은 경종을 울리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회적 신분, 직위, 배경, 종교적 혈통, 직분의 껍데기를 보지 않으십니다. 성경책과 관련 책 얼마나 서재에 꽂아두었느냐가 아니라, 그 말씀대로 내 손과 발이 움직여 이웃에게 선을 행하고 있는가를 달아보십니다.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의 화려한 예배가 아니라, 아무도 보지 않는 은밀한 골방에서 내 양심이 하나님을 어떻게 대면하고 있는가를 감찰하십니다.
오늘 말씀을 묵상하며 세 가지 결단의 자리로 나아가는 우리들이 되었으면 합니다.
(1) 남을 정죄하는 영적 교만의 돌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2) 세상의 타락을 보며 손가락질하기 전에, "남을 판단하는 네가 같은 일을 행하고 있지 않느냐" 하시는 주님의 음성 앞에 우리 자신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내 눈 속의 들보를 먼저 회개하는 자만이 하나님의 긍휼을 입을 수 있습니다.
(3) 말씀을 '듣는 자'에 머물지 말고 '행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일터에서 땀 흘리는 신실한 Tent Maker로서, 말씀과 삶이 하나되도록 투쟁하는 우리들이 되어야 합니다. 다소 손해를 보더라도 하나님의 정직을 선택하고, 세상의 불의와 타협하지 않고 묵묵히 참고 선을 행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각 사람의 행한 대로 반드시 영광과 존귀와 영생으로 갚아주실 것입니다.
마음의 양심을 무감각하게 방치하지 않고, 보혈의 샘가로 나아가야 합니다. 죄를 짓고도 양심에 화인 맞은 자처럼 뻔뻔하게 합리화하지 말아야 합니다. 양심의 가책이 느껴질 때, 그것이 바로 돌이키라는 성령의 자비로운 손길입니다. 사람들의 은밀한 것을 낱낱이 심판하실 예수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서기 전에, 오늘 십자가 앞에 내 은밀한 죄악을 정직하게 자백하고 정결함을 받아야 합니다.
이번 한 주간, 외모로 사람을 취하지 않으시는 공의의 하나님 앞에서 자신들을 돌아보는 우리들이 되어야 합니다. 사람의 눈가림이 아닌 순전한 양심과 거룩한 행함의 열매를 맺어냄으로써, 세상의 어둠 속에서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드러내는 우리들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비판하는 자신을 다시 돌아봄으로써 더욱 겸손한 자로 거듭나는 우리들이 되어야 합니다. 0.1그램의 오차도 없으신 하나님께서 왜 아직 응답이 없으십니까? 라고 우리는 반문할 수 있습니다. 이럴수록 우리 모두 개인적으로 하나님과 독대하며, 고백하면서 모든 것을 토로하고 더욱 간절히 구하는 우리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 때와 시기를 당겨 달라고 하나님께 울부짖어야 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공의로우신 하나님 아버지, 거룩한 척 종교의 옷을 입고 이웃을 정죄하면서도, 내 안의 은밀한 탐욕과 죄악과 위선을 회개하오니 주님의 보혈로 용서하여 주옵소서. 말씀을 듣기만 하여 스스로를 속이는 어리석은 자가 되지 않게 하옵소서. 거울을 보듯 말씀을 내 삶에 비추어 부끄러운 것을 씻어내게 하시고, 세상의 모진 풍파 속에서도 참고 선을 행하여 주님이 예비하신 영광과 영생의 면류관을 바라보게 하옵소서. 사람의 은밀한 것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심판하실 그 날을 두렵고 떨림으로 기억하게 하옵소서. 하나님이 마음에 새겨주신 양심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게 하시고, 아무도 보지 않는 은밀한 영역에서도 코람데오(Coram Deo) 하나님을 경외하는 거룩한 우리들로 이 세상에서 승리하게 하여 주옵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