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RMON TEXT로마서 1장 18-32절

임박한 진노를 이기는 경건의 능력 [로마서 1장 18-32]

임박한 진노를 이기는 경건의 능력
로마서 1장 18절~32절 (개역개정)

18 하나님의 진노가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의 모든 경건하지 않음과 불의에 대하여 하늘로부터 나타나나니
19 이는 하나님을 알 만한 것이 그들 속에 보임이라 하나님께서 이를 그들에게 보이셨느니라
20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가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려졌나니 그러므로 그들이 핑계하지 못할지니라
21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을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하지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
22 스스로 지혜 있다 하나 어리석게 되어
23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새와 짐승과 기어다니는 동물 모양의 우상으로 바꾸었느니라
24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그들을 마음의 정욕대로 더러움에 내버려 두사 그들의 몸을 서로 욕되게 하게 하셨으니
25 이는 그들이 하나님의 진리를 거짓 것으로 바꾸어 피조물을 조물주보다 더 경배하고 섬김이라 주는 곧 영원히 찬송할 이시로다 아멘
26 이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들을 부끄러운 욕심에 내버려 두셨으니 곧 그들의 여자들도 순리대로 쓸 것을 바꾸어 역리로 쓰며
27 그와 같이 남자들도 순리대로 여자 쓰기를 버리고 서로 향하여 음욕이 불 일듯 하매 남자가 남자와 더불어 부끄러운 일을 행하여 그들의 그릇됨에 상당한 보응을 그들 자신이 받았느니라
28 또한 그들이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하나님께서 그들을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버려 두사 합당하지 못한 일을 하게 하셨으니
29 곧 모든 불의, 추악, 탐욕, 악의가 가득한 자요 시기, 살인, 분쟁, 사기, 악독이 가득한 자요 수군수군하는 자요
30 비방하는 자요 하나님께서 미워하시는 자요 능욕하는 자요 교만한 자요 자랑하는 자요 악을 도모하는 자요 부모를 거역하는 자요
31 우매한 자요 배약하는 자요 무정한 자요 무자비한 자라
32 그들이 이같은 일을 행하는 자는 사형에 해당한다고 하나님께서 정하심을 알고도 자기들만 행할 뿐 아니라 또한 그런 일을 행하는 자들을 옳다 하느니라
일면식도 없는 사람들에게 장문의 편지를 써서 보내 적이 있는지요? 장문의 편지를 쓴다는 것은 특별한 목적이 있지 않으면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것도 아주 심오한 당대 최고의 석학인 바울이 로마교인들에게 말입니다. 바울 본인이 한번도 가보지 않은, 본 적도 없는 로마 교인들에게 장문의 편지를 쓴다는 것은 아주 특별한 일입니다. 저는 제가 졸업한 00 신학대학교 000총장님께 장문의 편지를 꼭 한번은 보내고 싶다는 갈망이 있습니다. 그런 생각을 한지 꽤 오래 되었습니다. 신학대학교 총 책임자인 그 분께 꼭 드리고 싶은 간절한 열망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삶에 찾아오는 고난과 불안, 영혼의 갈증, 뼈아픈 수난, 우리 힘으로는 감내하기 힘든 병마나 고민은 단순한 고통이 아닐 수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우리 영혼을 향해 울리시는 '영적 경고음'일지도 모릅니다. "너는 지금 창조의 궤도를 벗어났다. 네 마음의 방향이 생명의 주인을 떠나 잘못된 길로 질주하고 있다"라고 일깨우시는 하나님의 간절한 부르심일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 18절은 온 인류의 영적 조타실을 향해 가장 엄중하고 강력한 경고의 사이렌을 울리며 시작합니다.

"하나님의 진노가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의 모든 경건하지 않음과 불의에 대하여 하늘로부터 나타나나니"

주님이 본격적으로 등장하기 전, 세례 요한은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을 향해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를 가르쳐 임박한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마 3:7)라고 일갈합니다. 그리고 "이미 도끼가 나무 뿌리에 놓였으니 좋은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져지리라"(마 3:10)고 선포합니다. 하나님의 진노는 먼 훗날의 막연한 전설이 아니라, 지금 당장 도끼 날이 나무 밑동에 닿아 있는 것처럼 지극히 급박하고 위험하며 두려운 현실일 수 있습니다. 18절에서 사도 바울이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한 단어의 순서를 주목해야 합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진노가 "모든 경건하지 않음(불경건)"과 "불의"에 대하여 나타난다고 밝히면서, '불경건'을 '불의'보다 앞세워 기록하고 있습니다.

불경건이 불의보다 먼저입니까?

불경건이 바로 인간의 모든 부패와 불의한 행동을 낳는 '가장 깊고 치명적인 근원적 뿌리'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 18절부터 32절 말씀을 통해, 우리 심령의 불경건의 뿌리를 정직하게 직시하고, 하나님을 향한 참된 경건의 밀도를 회복하여 하늘의 은혜와 평강을 누리는 우리들이 되었으면 합니다.

1. 모든 죄의 시발점 (18~23)

18 하나님의 진노가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의 모든 경건하지 않음과 불의에 대하여 하늘로부터 나타나나니
19이는 하나님을 알 만한 것이 그들 속에 보임이라 하나님께서 이를 그들에게 보이셨느니라
20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가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려졌나니 그러므로 그들이 핑계하지 못할지니라
21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을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하지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
22 스스로 지혜 있다 하나 어리석게 되어
23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새와 짐승과 기어다니는 동물 모양의 우상으로 바꾸었느니라

성경의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보면, 윤리적이고 사회적인 범죄인 '불의' 보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어진 '불경건'이 언제나 먼저입니다. 에덴동산에서 아담과 하와가 저지른 죄는 도둑질이나 살인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보다 사탄의 거짓말을 앞세우고, 피조물의 자리에서 벗어나 스스로 하나님처럼 높아지고자 했던 '하나님을 향한 불경건의 죄'였습니다. 그 불경건의 쓴 뿌리가 심령에 심기자, 그 아들 대에 이르러 형 가인이 동생 아벨을 돌로 쳐 죽이는 끔찍한 살인을 자행합니다. 우리가 세상의 불의와 부패를 막고 거룩한 열매를 원한다면, 외적인 도덕률을 제고하는 데 그쳐서는 안 됩니다. 오직 하나님과의 수직적 관계인 '경건의 밀도'인 영성을 회복하는 일을 우선해야 합니다.

애굽에 잡혀간 소년 요셉은 보디발의 집에서 보디발 부인으로부터 육체적인 유혹을 받습니다. 주인의 아내가 청년 요셉을 아무도 보는 사람이 없는 밀실에서 유혹합니다. 이, 때 요셉은 윤리적인 핑계나 사람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습니다. 창세기 39장 9절에서 요셉은 단호히 선포합니다. "내가 어찌 이 큰 악을 행하여 하나님께 죄를 지으리이까" 요셉의 내면에는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경외하는 '경건의 밀도'가 꽉 차 있었기에, 세상의 거대한 성적 불의의 유혹을 단칼에 끊어낼 수 있었습니다. 요셉은 하나님의 시선을 우선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한 율법사가 찾아와 "율법 중에서 어느 계명이 가장 크고 첫째 됩니까?" 라고 물었을 때 주님은 단호하게 말씀하십니다. "37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38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39 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마 22:37~39)

첫째 계명이 바로 서야 둘째 계명이 지켜집니다. 하나님을 향한 경건의 밀도가 채워지지 않는 인생은 반드시 이웃을 향한 불의와 탐욕의 늪으로 미끄러져 들어갑니다. 20절 말씀처럼 하나님은 창세로부터 우주 만물의 질서와 생명의 신비 속에 당신의 능력과 신성을 분명하게 새겨 놓으십니다. 그러므로 그 누구도 마지막 심판대 앞에서 "나는 하나님이 계신 줄 몰랐습니다"라고 핑계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타락한 인간은 21절의 말씀처럼 하나님을 알면서도 "하나님을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하지도 아니하는 삶"을 선택했습니다.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지 않는 인간의 생각은 허망해지고, 미련한 마음은 칠흑 같은 어둠에 갇히게 됩니다. 스스로 지혜롭다고 자부하지만 결국 썩어지지 않는 영원한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이나 짐승, 피조물의 우상과 맞바꾸는 비참한 영적 파산자가 되고 마는 것입니다(22-23절).

목사의 아들로 태어난 스위스의 정신과 전문의 칼 융(Carl Jung, 1875-1961)은 날카롭게 진단합니다. "우리 시대의 중추적인 신경 질환은 바로 '공허(Emptiness)'이다." 현대인들이 물질적 풍요와 쾌락에도 불구하고 우울증과 알코올 중독, 끊임없는 불안에 시달리는 이유는 소유가 부족해서가 아닙니다. 영혼의 중심이 비어 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사람은 생각하는 갈대다’란 명언으로 잘 알려진 프랑스의 사상가 블레즈 파스칼(Blaise Pascal, 1623-1662)은 ‘팡세’에서 이 공허의 비밀을 명쾌하게 밝힙니다. "모든 사람의 마음속에는 하나님이 만드신 하나의 거대한 공백(God-shaped vacuum)이 있다. 이 공백은 세상의 어떤 피조물이나 명예나 쾌락으로도 채워질 수 없으며,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에 의해서만 온전히 채워질 수 있다"

사도행전 10장의 가이사랴의 로마인 백부장 고넬료를 보십시오. 백부장 고넬료가 학문이 부족하거나 세상적 권세가 부족해서 유대인 사도 베드로 앞에 무릎 꿇고 엎드립니까? 아닙니다. 로마 제국의 백부장이라는 막강한 군사력과 부를 가졌음에도, 세상 권력으로는 영혼의 공백을 채울 수 없음을 직감하고 무릎을 꿇습니다. 그래서 그는 온 집안과 더불어 하나님을 경외하며 구제하고 베드로 앞에 무릎 꿇었던 것입니다.

2. 가장 무서운 심판 ‘내버려 두심 (24~27)

24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그들을 마음의 정욕대로 더러움에 내버려 두사 그들의 몸을 서로 욕되게 하게 하셨으니
25 이는 그들이 하나님의 진리를 거짓 것으로 바꾸어 피조물을 조물주보다 더 경배하고 섬김이라 주는 곧 영원히 찬송할 이시로다 아멘
26 이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들을 부끄러운 욕심에 내버려 두셨으니 곧 그들의 여자들도 순리대로 쓸 것을 바꾸어 역리로 쓰며
27 그와 같이 남자들도 순리대로 여자 쓰기를 버리고 서로 향하여 음욕이 불 일듯 하매 남자가 남자와 더불어 부끄러운 일을 행하여 그들의 그릇됨에 상당한 보응을 그들 자신이 받았느니라

하나님의 심판 중에서 가장 두렵고 무서운 심판이 무엇일까요? 하늘에서 벼락이 떨어지거나, 사업이 부도를 맞거나, 질병으로 쓰러지는 것은 어쩌면 하나님께서 아직 우리를 사랑하사 깨닫고 돌아오라고 때리시는 사랑의 징계(매)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이 경고하는 가장 치명적이고 최종적인 심판은 바로 "내버려 두심(Handing over, 파라도켄)"입니다. 오늘 본문 24, 26, 28절에 무려 세 번이나 반복되는 무서운 단어가 있습니다.
- 24절: "하나님께서 그들을 마음의 정욕대로 더러움에 내버려 두사"
- 26절: "하나님께서 그들을 부끄러운 욕심에 내버려 두셨으니"
- 28절: "하나님께서 그들을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버려 두사"

자동차가 낭떠러지를 향해 역 주행하고 있는데, 하나님께서 핸들을 꺾지 않으시고, 브레이크를 밟지 않으시고, 그저 "네가 원하는 대로 마음껏 질주해 보아라" 하고 운전대에서 손을 떼어버리시는 상태, 바로 이것이 바로 영적인 유기(내버려 두심)이자 지옥의 서막입니다. 인간이 창조주 하나님을 마음에 두기 싫어하고 피조물을 숭배하자, 그 내버려 두심의 결과는 가장 먼저 '육체의 타락과 성(性)의 왜곡'으로 나타납니다. 26절과 27절을 보십시오.

26 이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들을 부끄러운 욕심에 내버려 두셨으니 곧 그들의 여자들도 순리대로 쓸 것을 바꾸어 역리로 쓰며 27 그와 같이 남자들도 순리대로 여자 쓰기를 버리고 서로 향하여 음욕이 불 일듯 하매 남자가 남자와 더불어 부끄러운 일을 행하여 그들의 그릇됨에 상당한 보응을 그들 자신이 받았느니라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아름답고 거룩한 질서인 ‘순리(자연적 질서)’를 내던져 버리고, 피조물의 정욕을 좇아 ‘역리인 반자연적 질서, 동성애와 변태적 성행위’로 바꾸어 버렸습니다. 남자가 남자와 더불어, 여자가 여자와 더불어 부끄러운 일을 행하며 창조 질서를 파괴합니다. 성경은 분명하게 선언합니다. 히브리서 13장 4절 말씀입니다.

"모든 사람은 혼인을 귀히 여기고 침소를 더럽히지 않게 하라 음행하는 자들과 간음하는 자들을 하나님이 심판하시리라"

독일 출신으로 나치가 싫어 미국으로 이주한 저명한 사회심리학자 에리히 프롬(Erich Fromm, 1900-1980)은 1941년 나치즘의 광기와 현대 사회의 병폐를 분석한 ‘자유로 부터의 도피(Escape from Freedom)’라는 명저를 남깁니다. 인간은 참된 자유를 갈망하는 척하지만, 하나님이라는 도덕적 권위와 진리로부터 도피하여 스스로 쾌락과 우상과 파괴적인 집단 광기의 노예가 되기를 자처한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21세기 현대 문화를 보십시오. 인권이라는 미명 아래 하나님의 창조 질서인 거룩한 성과 가정을 해체하고, 순리를 역리로 바꾸는 음란한 법과 문화가 쓰나미처럼 밀려오고 있습니다. 죄를 죄라고 말하지 못하게 입을 틀어막고, 정욕의 방종을 '진보된 자유'라 포장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엄중히 경고합니다. "그들의 그릇됨에 상당한 보응을 그들 자신이 받았느니라(27절)." 순리를 버리고 역리를 따르는 자들의 영혼과 육체와 가정은 반드시 피폐해지고 파괴되는 상당한 보응을 그 자신 안에서 당하게 됩니다. 우리는 이 시대의 음란한 사조에 휩쓸리지 말고, 하나님의 창조 질서와 가정의 순결을 목숨 걸고 파수하는 거룩한 방파제가 되어야 합니다.

성 아우구스티누스(St. Augustine, 354~430)는 그의 저서 ‘고백록’과 ‘신국론’에서 "주님, 당신은 우리를 당신을 향해 살도록 창조하셨기에, 우리 마음이 당신 안에서 쉴 때까지는 결코 참된 안식이 없습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로마 제국이 서고트족에 의해 함락(A.D. 410)되었을 때 신국론을 집필합니다. 그는 로마가 자랑하던 법률, 원로원, 공화정적 정치 체계와 군사력이 무너진 근본 원인을 "하나님을 경배하지 않고 인간과 피조물을 신격화한 불경건(Impietas)”에서 찾습니다. 아무리 선진적인 법치와 공화정적 외형을 갖추었더라도, 첫 단추인 '하나님을 향한 경건'이 빠진 지상의 도성은 결국 스스로 부패하여 붕괴한다는 통찰입니다.

3. 상실한 마음이 낳은 독열매와 감사가 메마른 영적 배은망덕 (28~32)

28 또한 그들이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하나님께서 그들을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버려 두사 합당하지 못한 일을 하게 하셨으니
29 곧 모든 불의, 추악, 탐욕, 악의가 가득한 자요 시기, 살인, 분쟁, 사기, 악독이 가득한 자요 수군수군하는 자요
30 비방하는 자요 하나님께서 미워하시는 자요 능욕하는 자요 교만한 자요 자랑하는 자요 악을 도모하는 자요 부모를 거역하는 자요
31 우매한 자요 배약하는 자요 무정한 자요 무자비한 자라
32 그들이 이같은 일을 행하는 자는 사형에 해당한다고 하나님께서 정하심을 알고도 자기들만 행할 뿐 아니라 또한 그런 일을 행하는 자들을 옳다 하느니라

인간이 마음에 참 주인이신 하나님 두기를 싫어했을 때, 그 상실하고 부패한 마음에서 터져 나온 사회적 죄악의 목록이 29절부터 31절까지 무려 21가지로 적나라하게 폭로됩니다.
- 개인적 부패: 불의, 추악, 탐욕, 악의, 시기, 살인, 분쟁, 사기, 악독
- 언어의 파괴: 뒤에서 은밀히 남을 헐뜯는 ‘수군수군하는 자’, 드러내놓고 인격을 말살하는 ‘비방하는 자’
- 관계와 질서의 붕괴: 교만한 자, 자랑하는 자, 악을 도모하는 자, ‘부모를 거역하는 자’
- 도덕적 파산: 지혜가 없는 우매한 자, 신의와 약속을 헌신짝처럼 버리는 ‘배약하는 자’, 사랑이 없는 ‘무정한 자’, 긍휼과 자비가 메마른 ‘무자비한 자’

이 죄악들의 공통적 출발점이 무엇이었습니까? 바로 28절입니다.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내 마음의 보좌에 하나님을 모시지 않고 내가 왕이 되어 살아가려 할 때, 인간은 누구나 이 추악한 죄의 공장이 되어 세상을 지옥으로 만들어 버립니다.
더욱 무서운 것은 32절입니다. "그들이 이같은 일을 행하는 자는 사형에 해당한다고 하나님께서 정하심을 알고도 자기들만 행할 뿐 아니라 또한 그런 일을 행하는 자들을 옳다 하느니라"

알렉시 드 토크빌(Alexis de Tocqueville, 1805~1859)은 19세기 프랑스의 정치인으로 그의 저서 ‘미국의 민주주의’에서 "하나님을 향한 경건없이 자유는 유지될 수 없다. 신앙이 약해질 때 자유는 방종과 전횡으로 전락한다." 종교적 경건뿐"이라고 갈파했습니다.

현 우리 시대가 더 이상 무너질 것이 없을 정도 파괴되어 있습니다. 양심의 법을 통해 이것이 죽음에 이르는 죄임을 뻔히 알면서도 자기만 행하는 데 그치지 않고, 악을 저지르는 자들에게 박수를 치며 "너 참 잘하고 있다, 그것이 쿨하고 멋진 인생이다"라며 동조하고 부추깁니다. 악을 선이라 부르고 선을 악이라 부르는 도덕적 전도 현상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그리스의 철학자 소크라테스(Socrates)는 일찍이 이렇게 경고합니다. "사냥꾼은 사냥개로써 토끼를 잡지만, 아첨하는 자는 거짓된 칭찬으로써 어리석은 자를 사로잡는다." 영국의 시인이자 비평가였던 알렉산더 포프(Alexander Pope, 1688-1744) 역시 일갈합니다. "공허한 칭찬은 저주하라" 악인들이 서로를 향해 건네는 공허한 칭찬과 세상의 동조는 결코 우리 삶에 약이 되지 않습니다. 그것은 영혼을 서서히 마비시켜 영원한 사형 선고의 자리로 끌고 들어가는 가장 달콤하고 치명적인 독약일 뿐입니다. 알렉산더 포프는 12세 무렵 척추 결핵을 앓아 성장이 멈춰 평생 137cm의 작은 키와 굽은 등, 그리고 극심한 만성 통증을 평생 안고 살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신체적 고통과 사회적 소외감은 훗날 그의 날카로운 풍자 정신의 자양분이 됩니다.

우리는 스스로의 심령을 엄중하게 돌아보아야 합니다. "우리는 과연 구원의 감격을 얼마나 누리며 살아가고 있습니까? 우리의 일상에 하나님의 은혜를 향한 감사가 얼마나 넘쳐나고 있는가?" 오늘날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구원받았다고 자부하는 성도들의 입술에서 기쁨이 사라지고, 삶의 감격이 메말라 버린 채, 세상 사람들과 똑같이 원망과 불평, 탐욕과 시기에 사로잡혀 살아가는 모습이 얼마나 많습니까?

21절에서 바울이 지적한 불경건의 핵심 증상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하지도 아니하는 것"입니다. 감사가 메마른 신앙은 이미 영적인 내비게이션이 심각한 경고음을 울리고 있는 위험 신호입니다. 구원받은 성도의 삶은 환경의 조건 때문이 아니라, 나를 죄악의 구렁텅이에서 건져주신 십자가의 은혜 하나만으로도 날마다 감격과 찬송이 화산처럼 터져 나와야 합니다. 감사를 잃어버린 마음은 사탄이 온갖 탐욕과 악의의 씨앗을 뿌리기에 가장 좋은 옥토가 된다는 사실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됩니다.

사도 바울이 왜 세계 패권국인 로마의 성도들에게 편지를 쓰며 이토록 서두부터 '불경건의 죄'를 무섭게 파헤치고 있습니까? 당시 로마는 단순한 야만 제국이 아닙니다. 세습 군주정에 머물던 고대 세계에서, 원로원과 시민의 합의, 그리고 정교한 성문법 체계를 바탕으로 국가를 운영했던 당대 최고 수준의 선진 공화정(원수정, Principate) 시스템을 자랑하던 나라입니다. 바울 자신 또한 당대 최고의 특권이었던 로마 시민권을 나면서부터 가진 자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꿰뚫어 보았습니다. 아무리 정교한 법률 인프라가 깔려 있고, 선진적인 공화정 시스템을 갖추었을지라도, '그 시스템을 굴리는 인간의 심령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경건'에서 떠나 있다면, 그 화려한 제국은 결국 내부로부터 썩어 문드러질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간파한 것입니다.

교부 아우구스티누스가 ‘신국론’에서 갈파했듯이, 인간의 마음에 하나님을 향한 경건의 닻이 내려지지 않는다면 지상의 위대한 문명도 썩어질 우상 숭배와 쾌락의 바다로 침몰하고 맙니다. ‘알렉시 드 토크빌’의 명쾌한 통찰처럼, "법과 제도가 아무리 뛰어나도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참된 경건이 빠진 자유는 방종과 타락의 지옥으로 가는 지름길"입니다. 그렇기에 바울은 세계의 표준을 자처하던 수도 로마를 향해, 다른 어떤 사회적 개혁이나 도덕 운동보다 먼저 "창조주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감사하는 근본적인 경건의 회복, 그리스도 중심의 가치체계 확립"을 가장 긴급하게 선포한 것입니다. 기초가 '경건'이라는 반석 위에 놓이지 않는 번영은 모래 위에 쌓은 성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로마서 1장 18절부터 32절은 마치 인류의 영혼을 수술대 위에 올려놓고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내면의 썩은 환부를 도려내는 성령의 거룩한 메스와 같습니다.

1. 불의의 열매를 한탄하기 전에, 내 안의 '불경건의 뿌리'를 뽑아내야 합니다. 사람의 눈가림이나 도덕적인 체면에 머물지 말고, 코람데오(Coram Deo) 하나님 앞에서 요셉과 같이 거룩한 두려움을 회복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향한 경건의 밀도가 높아질 때, 세상의 죄악과 정욕은 저절로 힘을 잃게 됩니다.

2. 우리 마음의 공백을 오직 예수 그리스도로 채워야 합니다. 세상의 재물, 권력, 인기, 쾌락이라는 우상으로는 영혼의 타는 목마름을 결코 채울 수 없습니다. 오직 십자가의 복음과 성령의 충만함으로 심령의 공백을 채울 때, 세상이 줄 수 없는 영원한 생명과 평안이 샘솟게 됩니다.

3. '내버려 두심'의 저주에서 벗어나, 매일 말씀의 내비게이션에 순종해야 합니다. 고난이 찾아오고 마음에 찔림이 올 때 불평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께서 나를 포기하지 않으시고 올바른 길로 돌이키시려는 사랑의 재탐색 신호일 수 있습니다.

4. 감사를 회복하여 구원의 감격을 세상에 흘려보내야 합니다. 나를 위해 생명을 버리신 주님 한 분만으로 만족해야 합니다. 잃어버렸던 감사를 회복하고 구원의 기쁨을 노래할 때, 우리를 옥죄던 모든 흑암의 결박이 끊어지고 거룩한 승리의 대로가 열릴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번 한 주간, 세상의 왜곡된 순리와 헛된 것을 털어버리고, 우리 마음의 보좌에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을 왕으로 모셔 들이는 시간을 가져보시기 바랍니다. 주님과 기도로 독대하므로 평강이 우릴 지배하는 은혜가 충만하기 바랍니다. 이를 통해 날마다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며 감사가 넘쳐나는 삶을 이어가야 합니다. 우리 형편이 이런데, 나라가 우리 공동체가 엉망인데, 감사는 무슨 감사? 감사는 속 편한 족속들이나 하는 것이지, 이 지경에 무슨 감사는 감사? 라는 생각이 들 수 있습니다. 현 우리시대를 뭐라고 할까요? 주님께서는 2000여년전 ‘임마누엘’하셔서 그 시대를 보시고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고 완악해진 그 시대를 향해 "이 세대를 무엇으로 비유할까"라고 하시며, 아이들이 피리를 불어도 춤추지 않고 울어도 가슴을 치지 않는 '영적으로 무감각한 세대'라고 책망하셨습니다. 오늘날 이 세대가 그런 세대입니다. 우리 역시 바라보는 초점이 어디에 있느냐에 따라 ‘하나님 백성이나 아니냐’로 판가름 납니다. 시간을 내어서 현재 파괴되고 있는 창조질서에 대해 경각심을 가지고 편지를 보낼만한 자들을 찾아보아야 합니다. 돌아보면 이런 편지를 받을만한 사람들이 주변에 숱할 것입니다. 어두운 세상 한복판에서 우리들은 부족하지만 참된 경건의 능력을 찬란하게 증명해 내는 이 시대의 신실한 텐트 메이커들이 되어야 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삶의 모든 불의와 부패의 뿌리가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았던 불경건에 있었음을 회개합니다. 요셉처럼 하나님 앞에서 정결한 영성을 갖게 하시고, 내 마음과 뜻과 목숨을 다하여 주 하나님을 사랑하는 경건의 밀도를 채워 주옵소서. 세상의 썩어질 피조물과 헛된 쾌락으로 내 영혼의 공백을 채우려 했던 어리석음을 용서하옵소서.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과 은혜로만 만족하게 하시고, 창조 질서인 거룩한 순리를 따라 가정과 믿음의 순결을 굳게 지키게 하옵소서. 삶에 찾아오는 고난을 영적 내비게이션의 자비로운 경고음으로 받아들이게 하옵소서. 감사가 메마른 배은망덕의 죄를 벗어버리고, 구원의 감격을 회복하여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며 평생토록 찬송하는 순종의 우리들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