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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은 물을 지나

grace · 2026년 9월 12일

두 친구의 긴 밤을 보며

어떤 사람에게 바다는 풍경이지만,
어떤 사람에게 바다는 반드시 건너야 하는 깊은 물이다.

《이제 만나러 갑니다》에 출연한 이철은 씨와 최승혁 씨는 어린 시절부터 함께 자란 친구였다.
두 사람은 서해를 건너 탈북했던 시간을 이야기했다.
망망한 바다를 헤엄치고, 이름 모를 섬에 닿고, 다시 작은 뗏목을 만들어 바다로 나섰던 긴 밤.
처음에는 그 놀라운 탈출 과정에 마음이 갔다.
하지만 이야기를 들을수록 오래 남은 것은 바다가 아니었다.

두 사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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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라도 가서 살아라”

바다 한가운데에서 최승혁 씨의 몸에 쥐가 났다.
더 이상 제대로 움직이기 어려워지자 그는 친구에게 자신을 두고 혼자라도 가라는 뜻의 말을 했다고 한다.
나는 그 장면에서 마음이 멈추었다.
죽음 앞에서 사람은 누구나 살고 싶을 것이다.
그런데 그 순간 한 사람이 말한다.
나는 여기까지일지 모르니
너라도 가서 살아라.
그 말을 하는 사람의 마음은 어떠했을까.
그리고 그 말을 듣는 친구의 마음은 또 어떠했을까.
결국 두 사람은 함께였다.
성경에는 이런 말씀이 있다.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나니.”
요한복음 15장 13절

두 친구의 우정을 예수님의 십자가와 같은 자리에 놓을 수는 없다.
그러나 우리는 때때로 한 사람의 작은 사랑을 통해 더 큰 사랑의 방향을 본다.
내가 살기 위해 상대를 버리는 것이 아니라,
내가 어떻게 될지 모르는 순간에도
상대가 살아 있기를 바라는 마음.
친구가 힘을 잃었다고 해서
그 손을 쉽게 놓지 않는 마음.
그 모습을 보며
예수님의 사랑을 조금 생각하게 된다.


밤이라서 지나온 길

두 사람은 죽을힘을 다해 어느 섬에 닿았다.
날이 밝은 뒤에야 자신들이 지나온 바다의 물살이 얼마나 거셌는지를 보았다고 한다.
낮이었다면 어쩌면 처음부터 들어갈 엄두를 내지 못했을 바다.
이 이야기가 오래 남았다.
밤에는 보이지 않았기 때문에 지나온 길.
우리 삶에도 그런 시간이 있다.
앞의 모든 일을 미리 알았더라면
도저히 시작하지 못했을 시간.
내일을 몰라
오늘 하루만 견뎠던 시간.
그리고 훗날 뒤돌아보며 묻게 되는 순간.
‘내가 저 시간을 어떻게 지나왔을까.’
시편 기자도 깊은 물 가운데서 부르짖었다.

“하나님이여 나를 구원하소서
물들이 내 영혼에까지 흘러 들어왔나이다.”
시편 69편 1절

신앙을 갖는다고 해서 깊은 물이 모두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믿는 사람에게도 두려운 밤이 있고,
기도해도 길이 보이지 않는 날이 있다.
그래서 나는 ‘하나님이 함께하신다’는 말을
아무 위험도 일어나지 않는다는 뜻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깊은 물 가운데서도
삶을 포기하지 않도록 붙들어주시는 것.
어떤 날에는 말씀으로,
어떤 날에는 설명하기 어려운 힘으로,
그리고 어떤 날에는
곁에 있는 한 사람을 통해서.


작은 뗏목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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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사람은 다시 헤엄쳐 나가기 어려워지자 섬에서 구할 수 있는 것들을 모아 작은 뗏목을 만들었다.
안전한 배도 아니었다.
어디까지 갈 수 있을지도 알 수 없었다.
그래도 다시 나아갔다.
나는 그 작은 뗏목을 생각하며 믿음에 대해서도 생각한다.
우리는 모든 것이 보여야 움직일 수 있다고 생각한다.
안전하다는 보장이 있고,
결과를 예상할 수 있어야 출발하려 한다.
그러나 삶의 중요한 순간에는
우리 손에 아주 작은 것만 남을 때가 있다.
오늘을 버틸 만큼의 힘.
다시 한번 기도해볼 마음.
도움을 청할 용기.
그리고 옆 사람의 손.
어쩌면 믿음은 모든 것이 보여서 걷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아도 다음 한 걸음을 내딛는 것인지도 모른다.


구원이라는 말

이 이야기를 보며 ‘구원’이라는 단어를 생각했다.
물론 북한에서 남한으로 건너온 사건 자체를 성경이 말하는 영적인 구원과 같다고 할 수는 없다.
다만 내 신앙 안에서 한 이미지가 떠오른다.
죽음의 자리에서 생명의 자리로 옮겨지는 것.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셨다.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요한복음 5장 24절

기독교의 구원은
우리가 필사적으로 헤엄쳐 하나님께 도착했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성경은 오히려 우리가 스스로 건너갈 수 없는 곳에 있을 때
하나님께서 먼저 우리에게 오셨다고 말한다.
십자가는 사람이 하나님에게 닿기 위해 만든 다리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건너오신 길이었다.
그래서 은혜에는 언제나 겸손이 따라온다.
‘내가 잘해서 여기까지 왔다’가 아니라,
어느 날 지나온 시간을 바라보며
‘나는 어떻게 여기까지 왔을까.’
하고 묻게 되는 마음.
그리고 그 질문 끝에서
나를 붙들어준 손들을 떠올리는 것.


혼자가 아니었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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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친구의 이야기에서 가장 오래 남는 것은 결국 이것이다.
혼자가 아니었다는 것.
한 사람이 물속에서 힘을 잃었을 때
그 옆에 친구가 있었다.
한 사람이 두려울 때
같이 두려워하면서도 떠나지 않는 사람이 있었다.
두 사람은 길을 몰랐고,
앞으로 무슨 일이 일어날지도 몰랐다.
그래도 둘이었다.
성경은 말한다.

“너희가 짐을 서로 지라.”
갈라디아서 6장 2절

교회도 그런 곳이면 좋겠다.
모든 문제에 답을 주는 곳이 아니라,
누군가 깊은 물 가운데 있을 때
멀리서 “힘내세요”라고 말하는 것으로 끝나지 않는 곳.
조금 가까이 가서 손을 내어주는 곳.
혼자서는 건너기 어려운 시간을
함께 건너주는 곳.


우리 모두가 실제 바다를 건너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사람에게는 저마다의 바다가 있다.
병이라는 바다,
가족의 아픔이라는 바다,
외로움과 후회라는 바다,
끝이 보이지 않는 시간.
그 한가운데 있는 사람에게
“조금만 참으면 돼요”라고 쉽게 말하고 싶지는 않다.
바다 가운데 있는 사람에게
육지에서 건네는 말은 때로 너무 가볍기 때문이다.
그보다는 이런 사람이 되고 싶다.
“나도 답은 모르지만,
당신을 혼자 두지는 않을게요.”
나는 그것이 예수님의 마음과 조금 닮아 있다고 생각한다.
예수님께서는 인간의 고통을 멀리서 바라보기만 하지 않으셨다.
우리의 시간 속으로 오셨고,
사람들 곁을 걸으셨고,
우는 사람과 함께 우셨고,
마침내 죽음의 자리까지 내려가셨다.
그래서 복음은
“네 힘으로 이 바다를 잘 건너라.”
라는 말보다
“내가 너와 함께 있다.”
라는 약속에 더 가깝다.
두 친구가 건넌 검은 바다를 떠올리며
나는 거대한 영웅담보다 한 장면을 기억하고 싶다.
힘을 잃어가는 친구와
그 곁을 떠나지 않은 한 사람.
어쩌면 우리가 누군가에게 줄 수 있는 가장 큰 위로는
그 사람의 바다를 없애주는 능력이 아니라,
그 바다를 건널 때까지 손을 놓지 않는 것인지도 모른다.

우리는 모두 저마다의 깊은 물을 지난다.
그 물이 사라지지 않을 때도 있다.
그러나 은혜는 때때로 바다를 없애는 방식이 아니라,
그 깊은 물을 함께 건너갈 한 사람의 손으로도 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