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폐허 위에 놓인 한 알의 사과
신명숙 · 2026년 9월 9일1995년 고베에서 안도 다다오의 ‘푸른 사과’까지 — 다시 살아간다는 것
[다큐를 바탕으로 제작한 AI 이미지입니다.
— 1995년 1월 22일 KBS 고베 대지진 다큐멘터리 중]
1995년 1월 17일 새벽, 고베를 비롯한 한신·아와지 지역의 평범한 일상이 한순간에 무너졌습니다. 집과 도로가 무너지고 불길이 도시를 삼켰습니다. 사랑하는 가족과 삶의 터전을 잃은 사람들이 추운 겨울 거리와 대피소에 남았습니다. 며칠 뒤인 1월 22일, KBS가 그 현장을 기록한 다큐멘터리를 방송했습니다. 그 오래된 영상 가운데 유독 제 기억에 남아 있던 한 장면이 있습니다. 한 사람이 이재민들에게 **사과를 보내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화면에 이런 말이 나타납니다.
“실망하지 말고 힘내자는 의미에서 사과를 보냅니다.”
30여 년이 지난 지금 다시 그 장면을 보니, 그 말이 예전보다 더 깊게 다가옵니다.
사과 한 알이 무너진 집을 세울 수는 없습니다.
잃어버린 사람을 돌아오게 할 수도 없습니다.
그러나 그 사과에는 말로 다 표현하지 못하는 마음이 담겨 있었을 것입니다.
포기하지 마십시오.
당신은 혼자가 아닙니다.
우리도 당신과 함께 있습니다.
그것은 어쩌면 ‘힘내라’는 말을 손에 잡히는 무엇인가로 만들어 건네는 일이었는지도 모릅니다.
폐허 속에서 다시 등장한 사과
사과가 일본의 전통문화에서 언제나 ‘회복’을 뜻했던 고정된 상징은 아닙니다.
그러나 일본의 근현대사에서 사과는 묘하게 새로운 삶과 희망의 이미지를 품게 되었습니다.
1945년 전쟁이 끝난 직후 일본에서 크게 사랑받았던 노래 가운데 **〈링고노 우타(リンゴの唄·사과의 노래)〉**가 있습니다.
폐허와 궁핍 속에서 흘러나온 밝은 노래는 지친 사람들에게 일상을 다시 시작하게 하는 작은 희망처럼 받아들여졌습니다.
그리고 50년 뒤, 또 하나의 폐허가 된 고베에서는 실제 사과가 사람들에게 건너갔습니다.
거대한 말보다 작은 먹을거리 하나를 나누고, 물을 나누고, 필요한 것을 들고 피해지역으로 들어갔습니다.
한신·아와지 대지진에는 전국에서 130만 명이 넘는 자원봉사자가 참여했고,
일본에서는 1995년을 훗날 **‘볼런티어 원년’**이라고 부르게 되었습니다.
재난 속에서 이웃과 시민이 서로를 돕는 일이 사회 전체의 중요한 문화로 자리 잡는 계기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제가 고베의 회복에서 배우고 싶은 것도 바로 이런 부분입니다.
무너지지 않는 사람이 강한 것이 아니라,
무너진 뒤에도 서로의 손을 잡고 다시 일어나는 사람들.
도시를 다시 세우면서 그날의 아픔을 감추지 않고 기록하고, 그것을 다음 세대를 위한 교훈으로 남기며 다시 살아가는 태도입니다.
[안도 다다오의 ‘푸른 사과(青りんご)’.]
효고현립미술관 바다의 데크에서 고베의 바다를 바라보고 있다.
그리고 고베 바닷가의 ‘푸른 사과’
세월이 흐른 뒤, 고베의 효고현립미술관에 또 하나의 사과가 놓였습니다.
건축가 **안도 다다오의 ‘푸른 사과’**입니다.
2019년 Ando Gallery와 함께 기증된 이 작품은 미국 시인 사무엘 울먼의 「청춘」에서 영감을 얻었습니다.
안도는 사람도, 건축도, 도시도, 사회도 완전히 익어버린 채 머물기보다
늘 도전하는 ‘푸른 상태’로 남기를 바라는 마음을 이 사과에 담았습니다.
붉게 잘 익은 완성된 사과가 아니라
아직 자라고 있는 푸른 사과.
저는 그것이 고베라는 도시와 참 잘 어울린다는 생각을 합니다.
1995년 폐허 속에서 누군가가 건넸던 사과와
30여 년 뒤 바닷가에 서 있는 푸른 사과.
두 사과 사이에 긴 시간이 흐르고 있지만, 제게는 하나의 이야기처럼 이어져 보입니다.
아직 끝난 것이 아니다.
우리는 다시 자랄 수 있다.
회복은 예전으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우리는 흔히 회복을 상처받기 전의 모습으로 되돌아가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살아보면 알게 됩니다.
깨어진 것을 완전히 없었던 일로 만들 수 없는 때가 있고, 잃어버린 것을 되찾을 수 없는 때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다시 일어나 밥을 짓고, 문을 열고, 나무를 심고, 집을 세우며 살아갑니다.
어쩌면 회복은 과거로 돌아가는 일이 아니라 상처를 품은 채 새로운 길을 걸어가는 일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성경 이사야 61장에는 오래 황폐하였던 곳을 다시 세우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회복도 우리의 아픈 시간을 모두 지워버리는 방식만은 아닐 것입니다.
때로는 그 상처를 통과한 사람에게 이전에는 보이지 않던 사람을 보게 하시고, 다른 이의 아픔 곁에 머물 수 있는 마음을 주시며, 무너진 자리에서 다시 무엇인가를 세우게 하십니다.
그래서 교회도 그런 곳이었으면 합니다.
상처받은 사람에게 쉽게 “힘내세요”라고 말하고 지나가는 곳이 아니라,
필요하다면 한 알의 사과를 들고 그 사람 곁으로 가는 교회.
말보다 먼저 손을 내밀고,
혼자 견디지 않도록 곁에 머물며,
아직 삶이 끝나지 않았음을 함께 믿어주는 공동체 말입니다.
1995년 겨울, 고베의 폐허 속으로 보내졌던 한 알의 사과.
그리고 오늘 고베 바닷가에 서 있는 한 알의 푸른 사과.
두 사과를 바라보며 저는 다시 생각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소망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삶에 있는 것이 아니라,
무너진 자리에서도 다시 사랑하고, 다시 심고, 다시 세울 수 있다는 데 있는 것은 아닐까요.
아직 푸르기에 다시 자랄 수 있고,
아직 완성되지 않았기에 하나님께서 새롭게 하실 일이 남아 있습니다.
우리도 누군가에게 그런 한 알의 사과가 되어 주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