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선생님의 한마디
신명숙 · 2026년 9월 4일
초등학교 2학년 2월이었다.
담임선생님은 출산휴직 중이셨고, 봄방학을 앞둔 2~3주 동안 임시로 우리 반을 맡아주신 남자 선생님이 계셨다. 어린 내 눈에는 마흔쯤 되어 보이는, 아버지처럼 온화한 분이었다.
어느 미술 시간, 나는 국화를 그렸다.
가늘고 긴 꽃잎이 겹겹이 뻗어 있는 모습을 자세히 들여다보며 어린 나름대로 한 잎 한 잎 그렸다.
선생님께서 내 그림 앞에 멈춰 서시더니 말씀하셨다.
“국화를 아주 잘 보고 그렸구나.”
그 한마디는 이상하리만큼 오래 내 마음속에 남았다.
그 시절 어린 내 눈에는 부모님이 학교에 자주 오시거나 집안 형편이 좋은 아이들이 더 많은 관심과 칭찬을 받는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었다. 물론 어린아이의 시선이었으니 모든 사정을 정확히 알 수는 없었다.
하지만 아이들은 생각보다 일찍 알아차린다.
누가 자주 칭찬받는지, 누가 쉽게 인정받는지, 누구의 말에 어른들이 더 귀를 기울이는지를 말이다.
그런데 그날 선생님은 내 부모님이나 집안 형편을 보지 않으셨다.
그저 내가 그린 그림을 보셨다.
그리고 그림 속에서 내가 국화를 자세히 바라보고 애써 표현한 것을 알아봐 주셨다.
어린 나는 그때 처음으로 생각했다.
‘아, 이렇게 공평하게 봐주는 선생님도 계시는구나.’
돌이켜보면 나는 그날 ‘공의’라는 말보다 먼저, 공의의 느낌을 배웠던 것 같다.
사람의 배경보다 그 사람이 한 것을 보는 것.
가진 것보다 눈앞에 있는 사실을 보는 것.
잘한 것을 발견했을 때 누구에게나 잘했다고 말해주는 것.
세월이 흐른 뒤 성경을 읽으면서 나는 예수님께서 사람을 바라보시는 모습에서 그때 느꼈던 마음을 다시 발견한다.
사람들이 삭개오를 ‘세리’라는 이름으로 먼저 보았을 때 예수님은 그의 이름을 불러주셨다. 사람들이 바디매오의 외침을 막으려 할 때 예수님은 걸음을 멈추셨다. 사람들은 조건과 평판을 먼저 보았지만, 예수님은 그 사람을 보셨다.
마가복음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예수께서 머물러 서서 그를 부르라 하시니.”
(마가복음 10장 49절)
나는 이 ‘머물러 서서’라는 표현이 좋다.
사람들은 지나가지만 예수님은 멈춰 보셨다.
우리도 사람을 보면서 정작 그 사람을 제대로 보지 못할 때가 있다.
그 사람의 학력, 직업, 경제적인 형편, 외모, 말투, 나와의 친분을 먼저 볼 수 있다. 교회 안에서도 눈에 잘 띄는 사람의 수고는 쉽게 알아보면서, 조용히 자기 몫을 감당하는 사람은 지나칠 수 있다.
그래서 가끔 스스로에게 묻는다.
나는 사람을 잘 보고 있는가.
어린 시절 선생님은 내게 말씀하셨다.
“국화를 아주 잘 보고 그렸구나.”
그런데 지금 생각해보면 그날 정말 잘 보고 계셨던 분은 선생님이었다.
국화 그림 한 장뿐 아니라, 그 그림을 그린 한 아이까지 보아주셨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 사람을 바라보셨던 것처럼, 나도 누군가를 그렇게 바라볼 수 있기를 바란다.
조건보다 사람을 먼저 보는 눈.
그리고 발견한 좋은 것을 아끼지 않고 말해줄 수 있는 마음.
한 사람을 제대로 바라보는 일은 어쩌면 우리가 할 수 있는 가장 작은 사랑의 시작인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