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6월, 효고현립미술관에서

2026년 6월, 고베의 효고현립미술관에 갔다.

처음부터 안도 다다오를 깊이 공부하러 간 것은 아니었다. 그런데 전시를 보고 건물을 걷고, 미술관 안의 Ando Gallery에서 그의 건축 모형과 스케치, 삶의 궤적을 따라가다 보니 작품보다 한 사람의 시간이 더 오래 남았다.

효고현립미술관은 1995년 한신·아와지 대지진 이후 ‘문화의 부흥’을 상징하는 시설로 안도 다다오가 설계해 2002년 문을 열었다. 2019년에 추가된 Ando Gallery 역시 그가 설계하고 기증한 공간으로, 초기 주택부터 해외 프로젝트까지 모형과 드로잉을 통해 그의 작업을 보여준다.

그곳에서 내가 보게 된 사람은 이미 완성된 ‘세계적인 건축가’만은 아니었다.

복싱을 하던 청년, 정규 건축교육을 받지 않은 사람, 책과 실제 건축물을 찾아다니며 스스로 배우던 사람, 그리고 자신이 본 어떤 장면을 수십 년 동안 자기 언어로 밀어붙인 사람이었다.

복서를 그만둔 청년

안도 다다오는 1941년 오사카에서 태어났다. 젊은 시절 잠시 프로 복서로 활동했고, 이후 건축을 독학했다. 프리츠커상 재단의 공식 전기는 그가 열여덟 살 무렵 교토와 나라의 절, 신사, 다실을 직접 찾아다니며 건축을 공부했다고 기록한다.

그의 출발선에는 건축학 학위도, 유명 사무소에서 보장된 경력도 없었다.

안도 자신은 인터뷰에서 복싱 체육관에서 훗날 세계 챔피언이 되는 파이팅 하라다의 연습을 보고 자신은 그 수준에 이를 수 없겠다고 느꼈다고 회상했다. 그리고 건축으로 방향을 틀었다.

중요한 것은 그 다음이다.

그는 건축을 알고 싶어서 직접 보러 갔다.

스물네 살 무렵, 1960년대 유럽을 여행하며 그리스의 파르테논, 로마의 판테온, 르 코르뷔지에의 롱샹 성당 같은 건축을 마주했다. 훗날 그는 그 여행이 자신에게 이전과 다른 시야를 주었다고 말했다.

아직 아무것도 증명하지 못한 청년이 세계의 건축 앞에 자기 몸을 데려간 것이다.

판테온에서 들어온 빛

내가 특히 마음에 두는 장소는 로마의 판테온이다.

판테온의 거대한 돔 중앙에는 원형의 오큘러스가 뚫려 있다. 그 구멍을 통해 자연광이 직접 내부로 들어온다. 빛은 시간에 따라 벽과 바닥을 이동하고, 그 움직임 자체가 공간을 바꾼다.

안도는 훗날 여러 인터뷰에서 판테온을 반복해서 이야기했다. 2022년 인터뷰에서는 벽과 같은 물질과 빛이라는 비물질이 건축 공간을 함께 만든다고 설명하며 판테온의 오큘러스를 예로 들었다. 2023년에는 롱샹과 로마의 판테온을 방문했을 때 희망을 느꼈다고 회상했다. 그에게 건축은 단순한 물리적 크기가 아니라 그 희망을 얼마나 크게 만들 수 있는가의 문제라고 말했다.

이 부분에서 나는 잠시 멈추게 된다.

왜 어떤 사람에게는 여행 중 본 아름다운 장면 하나가 추억으로 끝나고, 다른 사람에게는 평생 되풀이해서 묻는 질문이 될까.

누군가는 판테온에 들어가 빛을 보고 나온다.

누군가는 그 빛이 공간을 바꾸는 방식을 기억한다.

그리고 어떤 사람은 몇십 년 뒤에도 여전히 빛으로 공간을 만들고 있다.

빛의 교회

안도의 대표작 가운데 하나인 **빛의 교회(Church of the Light)**는 오사카부 이바라키에 1987~1989년 설계·완성되었다.

공간은 놀랄 만큼 절제되어 있다. 노출 콘크리트 벽, 어두운 예배실, 그리고 제단 뒤 벽을 가로지르는 수평과 수직의 개구부. 그 틈으로 들어오는 자연광이 십자가의 형상을 만든다.

뉴욕현대미술관(MoMA)의 자료 역시 이 교회를 설명하면서, 제단 뒤 벽 전체에 난 수평·수직의 유리 개구부가 십자가를 이루고 그 빛이 예배자들을 향해 강한 이미지를 만든다고 기록한다.

내가 흥미롭게 보는 것은 십자가에 무엇을 더한 것이 아니라 벽에서 무엇인가를 비웠다는 점이다.

빛은 안도가 만든 재료가 아니다.

건축가가 할 수 있는 것은 빛을 소유하는 일이 아니라, 빛이 들어올 자리를 만드는 일이다.

기독교인인 나에게 이 장면은 자연스럽게 요한일서의 짧은 문장을 떠올리게 한다.

“하나님은 빛이시라.” — 요한일서 1장 5절

물론 여기에는 선을 그어야 한다. 안도 다다오가 이 성경 구절을 표현하기 위해 빛의 교회를 설계했다고 내가 단정할 근거는 없다. 그의 개인적 신앙을 대신 말할 수도 없다.

이것은 그의 의도를 설명하는 문장이 아니라, 그의 건축을 바라보는 나의 시선이다.

그럼에도 나는 어둠 속 콘크리트 벽에 빛이 들어올 틈을 만든 이 교회를 보며,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이 오히려 공간 전체를 지배할 수 있다는 사실을 생각한다.

나는 그에게서 ‘소명’을 본다

판테온의 빛이 안도에게 정확히 어떤 종교적 사건이었는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나는 그의 인생을 따라가면서 소명이라는 단어를 떠올리게 된다.

소명은 반드시 하늘에서 완성된 지도를 받아드는 사건일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처음에는 이유를 다 알지 못하지만 이상하게 눈을 떼기 어려운 것, 다른 사람은 지나치는데 자신은 계속 돌아보게 되는 것, 몇 년이 지나도 마음속에 남아 결국 행동하게 만드는 것. 어쩌면 그런 것에서 길이 시작되기도 한다.

안도에게 건축은 갑자기 완성된 성공으로 찾아오지 않았다.

1969년 자신의 사무소를 열었고, 30대 중반에 설계한 **스미요시 나가야(Row House in Sumiyoshi)**가 주목을 받았다. 이 작품으로 1979년 일본건축학회상을 받았고, 이후 활동 범위는 일본을 넘어 넓어졌다. 1995년에는 프리츠커 건축상을 받았다.

결과를 알고 과거를 바라보면 모든 점이 원래부터 하나의 선이었던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 시간을 실제로 살던 사람에게 미래는 보이지 않았을 것이다.

복싱을 그만둘 때 프리츠커상을 알 수는 없었다.

판테온을 올려다보던 스물네 살의 청년이 훗날 세계 곳곳에 자기 건축을 남길 것이라고 확신할 수도 없었을 것이다.

그에게도 보였던 것은 아마 다음 한 걸음 정도였을지 모른다.

한 나라보다 넓은 시야

안도 다다오의 건축은 일본에서 태어났다. 교토와 나라의 전통 공간을 직접 보며 배웠고, 일본의 빛과 그림자, 자연과 건축의 관계가 그의 작업에 깊이 남아 있다.

그런데 내가 그에게서 매력을 느끼는 이유는 그것이 국경 안에서 닫히지 않았기 때문이다.

젊은 시절 그는 직접 세계의 건축을 찾아갔다. 이후 그의 작업 역시 일본의 작은 주택에서 시작해 미국의 미술관, 나오시마의 지중미술관, 파리의 부르스 드 코메르스 등 서로 다른 문화와 장소로 확장됐다.

나는 이것을 단순한 ‘해외 진출’로 보고 싶지 않다.

오히려 자기의 뿌리를 가지고 더 큰 세계와 대화하는 태도에 가깝다고 느낀다.

세계적인 사람이 된다는 것이 어느 나라가 더 뛰어난지를 증명하는 일만은 아닐 것이다. 자신에게 주어진 언어를 깊이 파고들어, 그것이 국적이 다른 사람의 감각까지 건드리게 만드는 것. 나는 그런 사람에게서 그릇의 크기를 본다.

우리에게도 한 줄기의 빛이 있을까

2026년 6월 효고현립미술관에서 나와서도 이상하게 건축물의 형태보다 한 사람의 시간이 오래 남았다.

복서였던 청년.

정규 건축학교를 나오지 않은 사람.

직접 세계의 건축을 보러 떠난 사람.

판테온의 빛을 기억한 사람.

그리고 훗날 콘크리트 벽에 십자가 모양의 틈을 내어 다시 빛이 들어오게 한 사람.

나는 그 삶을 보면서, 모든 사람에게 각자의 방식으로 나아가야 할 길이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 길이 반드시 유명해지는 길일 필요는 없다. 세상에서 큰 이름을 얻는 것과 자기에게 주어진 길을 걷는 것은 같은 말이 아니다.

또 그 길이 스무 살에 완성되어 보일 필요도 없다.

어떤 사람에게는 서른 이후에야 서로 관련 없어 보이던 경험들이 이어지기 시작할 수도 있다. 더 늦을 수도 있다.

믿음을 가진 나는 그 연결을 볼 때 인도하심이라는 말을 떠올린다.

처음에는 의미를 몰랐던 경험이 나중에 다른 의미로 돌아오고, 막힌 길이라고 생각했던 일이 방향을 바꾸고, 우연히 마주친 장소나 사람이나 문장이 오랫동안 마음에 남아 다음 걸음을 이끌기도 한다.

판테온의 거대한 천장에서도 빛이 들어오는 곳은 하나의 원형 틈이다.

빛의 교회의 무거운 콘크리트 벽에서도 필요한 것은 모든 벽을 없애는 일이 아니라, 빛이 지나갈 자리를 내어주는 것이었다.

어쩌면 우리에게도 처음부터 모든 답이 필요한 것은 아닐지 모른다.

다음 한 걸음을 볼 수 있을 정도의 빛.

그 정도면 다시 걸어갈 수 있으니까.


참고한 자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