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RMON TEXT

고난 속에서 일하시는 하나님의 정교한 손길 [사도행전 26장 24-32]

고난 속에서 일하시는 하나님의 정교한 손길
사도행전 26:24-32 (개역개정)

24 바울이 이같이 변명하매 베스도가 크게 소리 내어 이르되 바울아 네가 미쳤도다 네 많은 학문이 너를 미치게 한다 하니
25 바울이 이르되 베스도 각하여 내가 미친 것이 아니요 참되고 온전한 말을 하나이다
26 왕께서는 이 일을 아시기로 내가 왕께 담대히 말하노니 이 일에 하나라도 아시지 못함이 없는 줄 믿나이다 이 일은 한쪽 구석에서 행한 것이 아니니이다
27 아그립바 왕이여 선지자를 믿으시나이까 믿으시는 줄 아나이다
28 아그립바가 바울에게 이르되 네가 적은 말로 나를 권하여 그리스도인이 되게 하려 하는도다
29 바울이 이르되 말이 적으나 많으나 당신뿐만 아니라 오늘 내 말을 듣는 모든 사람도 다 이렇게 결박된 것 외에는 나와 같이 되기를 하나님께 원하나이다 하니라
30 왕과 총독과 버니게와 그 함께 앉은 사람들이 다 일어나서
31 물러가 서로 말하되 이 사람은 사형이나 결박을 당할 만한 행위가 없다 하더라
32 이에 아그립바가 베스도에게 이르되 이 사람이 만일 가이사에게 상소하지 아니하였더라면 석방될 수 있을 뻔하였다 하니라

16세기 종교개혁자 마르틴 루터는 기독교인이 아니라도 대부분 알고 있는 인물입니다. 무엇이 그를 이렇게 세상에 널리 알리게 하였을까요?

오늘 우리는 사도행전의 가장 장엄하고도 기이한 순간에 서 있습니다. 당대 최고의 권력자인 로마 총독 베스도, 유대 땅의 왕 헤롯 아그립바 2세, 그리고 그의 누이 버니게가 화려한 관복을 입고 재판석에 앉아 있습니다. 그들 앞에는 사슬에 묶인 채 홀로 서 있는 한 죄수, 사도 바울이 있습니다. 인간적인 눈으로 보면 이것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모순의 현장입니다.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인격적으로 만났고, 1차부터 3차에 이르기까지 목숨을 걸고 이방 땅에 복음을 전파했던 사도 바울이 죄수의 신분으로 그들 앞에 끌려 나와 신문을 당하고 있습니다.

사도행전에는 놀랍게도 동일한 하나의 사건이 무려 세 번이나 반복하여 상세히 기록되어 있음을 알게 됩니다. 그것은 바로 '다메섹 도상에서 바울이 예수님을 만난 회심 사건'입니다(사전 9장, 22장, 26장). 하나님께서 사도행전 전체를 통해 이 사건을 세 번이나 반복하여 우리에게 보여주시는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 믿는 자들을 잡으러 가던 악동 사울을 꼬꾸라뜨리시고 "너는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내 이름을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사전 9:15)" 하셨던 그 주님의 첫 약속이, 바로 오늘 가이사랴 법정에서 통치자들 앞에 선 바울을 통해 정교하게 성취되고 있음을 보여주시기 위함입니다.

인생을 살아가다 보면 당장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고난과 정체기를 만납니다. 텐트 메이커로서 열정적으로 일하고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헌신하는데도, 왜 우리 가정에 이런 일을 허락하시는가? 하나님 해도 해도 너무 하시는 것 아닙니까? 때로는 사방이 막힌 것 같은 절망적인 생각에 갇힐 때가 있습니다.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그 고난의 한복판이 바로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가장 정교한 간섭하심이 작동하는 시간'일 수 있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우리를 향한 주님의 신비로운 인도하심에 힘을 얻는 시간 되기를 바랍니다.

1. 베스도의 조롱과 바울의 담대함 (24-26)

바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만난 부활의 주님과 선지자들의 예언이 성취된 복음을 열정적으로 간증하자, 신임 총독 베스도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큰 소리로 외칩니다. 24절을 보십시오.

"바울이 이같이 변명하매 베스도가 크게 소리 내어 이르되 바울아 네가 미쳤도다 네 많은 학문이 너를 미치게 한다 하니."

베스도의 눈에 바울은 제정신이 아닌 광신자로 보였습니다. 당대 로마와 헬라의 최고 학문으로 로마 식민지를 다스리던 총독의 지식으로는,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나사렛 예수가 다시 살아났다'는 이 부활의 복음을 도저히 수용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고린도전서 1장 18절 말씀처럼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세상은 복음에 열심인 성도들을 향해, 그리고 세상의 타락한 흐름과 타협하지 않고 직장과 사업장에서 하나님의 공의와 창조 질서를 지키려는 텐트 메이커들을 향해 "너희가 미쳤다", "시대에 뒤떨어졌다"며 조롱하고 비웃습니다.

그러나 바울의 대답을 보십시오. 25-26절입니다.

25 바울이 이르되 베스도 각하여 내가 미친 것이 아니요 참되고 온전한 말을 하나이다.
26 왕께서는 이 일을 아시기로 내가 왕께 담대히 말하노니 이 일에 하나라도 아시지 못함이 없는 줄 믿나이다 이 일은 한쪽 구석에서 행한 것이 아니니이다.

바울은 총독의 서슬 푸른 호통 앞에서도 기죽지 않고 품격 있게 대답합니다. "내가 미친 것이 아니라, 당신이 아직 영적인 눈이 열리지 않아 보지 못하는 참되고 온전한 진리를 말하고 있을 뿐입니다" 바울은 나아가 유대의 역사와 선지자의 글을 잘 알고 있던 아그립바 왕을 향해 시선을 돌리며,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과 부활은 숨겨진 신화가 아니라 온 천하가 다 아는 역사적 사실임을 담대히 선포합니다.

어떻게 죄수의 몸으로 고립된 바울이 총독을 향해 이토록 당당할 수 있습니까? 다메섹 도상에서 세상의 어떤 학문이나 권력보다 비교할 수 없이 크신 '빛으로 오신 주님'을 인격적으로 만났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논리, 여론, 강포가 아무리 거세게 우리를 압박할지라도 결코 우리는 기죽지 않아야 합니다. 우리가 가진 복음은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참되고 온전한 진리'입니다. 우리 삶에 이해할 수 없는 시련이 찾아올 때, 그것이 장시간 지속되더라도, 세상은 우리를 실패자라 부르며 비웃을지라도, 우리는 하늘 보좌의 권세를 쥔 자로서 담대히 진리를 선포해야 합니다. 실망하지 않아야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우리 생각으로는 하나님의 원대한 뜻을 다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2. 권력자들의 심령을 찌른 복음의 폭탄 (27-29)

바울의 화살은 이제 유대의 통치자인 아그립바 왕의 심장을 정조준합니다. 27절을 보십시오.

"아그립바 왕이여 선지자를 믿으시나이까 믿으시는 줄 아나이다."

바울은 정치적 재판의 피고인으로 서 있었지만, 영적으로는 아그립바 왕의 영혼을 구원하기 위해 복음을 제시하는 영적 재판관으로 서 있습니다. 아그립바 2세는 유대교의 전통과 구약 성경을 잘 아는 인물입니다. 그는 선지자를 믿는다면 예수 그리스도가 메시아임을 인정할 수밖에 없는 외통수에 걸려듭니다.

당황한 아그립바 왕이 바울에게 어떻게 반응합니까? 28절입니다.

"아그립바가 바울에게 이르되 네가 적은 말로 나를 권하여 그리스도인이 되게 하려 하는도다."

여기서 아그립바의 반응은 거부인 동시에, 그 마음 깊은 곳에 임한 거대한 찔림과 울림을 보여줍니다. "네가 이렇게 짧은 연설로 나 같은 왕을 당장 예수 믿는 자(그리스도인)로 만들 수 있을 줄 아느냐?"라며 방어막을 칩니다. 하지만 이미 그의 영혼은 바울이 전한 복음의 강력한 빛 앞에 떨고 있던 것입니다.

그때 사도 바울은 사도행전 전체를 통틀어 가장 감동적이고 장엄한 고백을 내뱉습니다. 29절입니다.

"바울이 이르되 말이 적으나 많으나 당신뿐만 아니라 오늘 내 말을 듣는 모든 사람도 다 이렇게 결박된 것 외에는 나와 같이 되기를 하나님께 원하나이다 하니라."

바울의 손과 발에는 차가운 쇠사슬이 채워져 있습니다. 반면 아그립바와 버니게, 베스도는 왕관을 쓰고 비단옷을 입고 있습니다. 바울은 그들의 화려한 겉모습을 조금도 부러워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 쇠사슬을 들고 선포합니다. "내가 묶여 있는 이 사슬 외에는, 당신들도 나처럼 부활의 주님을 만나고 하늘의 생명을 얻어 나와 같은 자가 되기를 원합니다"

바울은 자신이 갇힌 죄수라는 사실에 위축되지 않습니다. 그에게는 세상의 왕들이 갖지 못한 영원한 하나님 나라의 자유와 평강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누리는 진정한 자유함과 권세는 왕궁의 보좌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비록 손에 쇠사슬을 차고 있을지라도 내 안에 계신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 영생과 하나님 안에 참 평강이 있으면 족해야 합니다. 아무리 돈을 많이 주고 유혹하더라도 그것이 불의한 것이면 하나님 나라 시민권을 소유한 우리는 마음이 불편해야 합니다. 마음에 화평이 있는 자가 천국을 소유한 자입니다. 예수님께서 산상수훈에서 말씀하시기를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마5:1) 라고 설파하셨습니다. 그 심령을 온유함이 지배할 때 가장 귀한 땅 같은 천국이 임한다는 말씀입니다.

이처럼 자신이 갇힌 고난의 현장에서 세상을 향해 "나와 같이 되기를 원한다"고 선포하여 거대 권력자들의 심령을 뒤흔든 믿음의 용사가 있습니다. 과거 구소련 시절, 공산당 정권 아래에서 지하 교회를 섬기다 체포되었던 이반 모이세예프(Ivan Moiseyev, 1952-1972) 청년이 있습니다.

소련 군부대의 상관들은 이반이 하나님을 부정하도록 만들기 위해 온갖 물리적 박해를 가했다고 합니다. 어느 추운 겨울날, 기온이 영하 30도까지 떨어지는 혹한 속에서 상관들은 이반에게 단지 여름 군복 한 벌만 입힌 채 밤새 야외 연병장에 서 있으라는 벌을 내립니다. 상관들은 이반이 추위를 견디지 못하고 몇 시간 만에 손을 들며 "하나님은 없다"고 부르짖을 것이라 잔뜩 기대합니다. 다음 날 아침, 상관들이 그가 얼어 죽었을 것으로 생각하고 연병장으로 나갔습니다. 그러나 이반은 얼어 죽기는커녕, 얼굴에 환한 미소를 띤 채 하나님을 찬양하며 멀쩡히 서 있습니다. 깜짝 놀란 장교가 "어떻게 영하 30도에서 얼어 죽지 않고 살아있는 것이냐?"며 소리칩니다. 그때 20세의 청년 이반 모이세예프는 당당하게 이렇게 대답했다고 합니다.

"지휘관님, 저는 밤새 전혀 춥지 않았습니다. 제가 하나님을 버리지 않고 서 있을 때, 주님께서 사자 굴 속의 다니엘을 지키셨던 것처럼 천사들을 보내주셔서 저를 따뜻한 온기로 감싸주셨기 때문입니다." 이 광경을 목격한 동료 군인들과 하급 장교들은 큰 충격을 받았고, 겉으로는 공산당의 명령을 따르면서도 속으로는 "이반이 믿는 하나님이야말로 진짜 하나님이신가 보다"라며 몰래 예수를 믿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이 실화는 사도행전 26장의 바울이 사슬에 매여 있으면서도 총독과 왕들을 향해 "나와 같이 되기를 원한다"고 선포했던 영적 자부심과 완벽하게 닿아 있습니다 20세의 청년 이반 모이세예프는 영하 30도의 혹한 속에서도 주님이 주시는 하늘의 온기 때문에 굴복하지 않았습니다. 세상의 권력은 그를 추위로 꽁꽁 묶으려 했으나, 그 안에 계신 성령의 불길은 가둘 수 없었습니다. 20세라는 어린 나이에 세상을 복음으로 압도했던 이반 모이세예프의 이 짧고 강렬한 생애는 우리 심령에 울림을 줍니다.

3. 죄 없는 고난을 통해 로마로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섭리 (30-32)

바울의 장엄한 선포가 끝나자, 왕과 총독과 버니게와 거기 함께 앉았던 모든 자들이 자리에서 일어납니다(30절). 그리고 그들이 뒤로 물러가 서로 나눈 대화가 31-32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물러가 서로 말하되 이 사람은 사형이나 결박을 당할 만한 행위가 없다 하더라 이에 아그립바가 베스도에게 이르되 이 사람이 만일 가이사에게 상소하지 아니하였더라면 석방될 수 있을 뻔하였다 하니라."

이 판결은 법정 안에 있던 모든 통치자들이 한 목소리로 내린 결론입니다. "바울에게는 죽일 죄도, 가둘 죄도 전혀 없다"

여기서 한 가지 의문이 생깁니다. 바울에게 아무런 죄가 없고 당장 석방될 수 있는 상황이었다면, 왜 하나님께서는 그가 황제에게 상소하게 만들어서 계속 죄수의 몸으로 로마까지 끌려가게 하십니까? 인간적인 눈으로 보면 "바울이 괜히 가이사에게 상소해서 석방될 기회를 날려 버렸구나"라고 안타까워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이것이야말로 '하나님의 정교하고 깊은 인도하심의 하이라이트'입니다.

아그립바와 베스도가 바울을 석방하여 유대 사회로 보냈다면, 바울은 예루살렘에서 기다리고 있던 유대인 자객들의 암살 음모에 휘말려 목숨을 잃었을 것입니다. 여기에는 하나님의 정교한 보호와 목적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바울이 무죄 판결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가이사에게 상소한 죄수'의 신분을 유지하게 하셨습니다. 왜 그렇게 하십니까? 제국의 법에 따라 로마 군대의 완벽한 보호를 받으며, 모든 경비와 비용을 로마 정부가 부담하게 하여, 바울의 최종 목적지인 '로마 제국의 심장부'로 그를 안전하게 이송하기 위함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마주해야 하는, 경험해야 하는 고난의 배후에 있는 하나님의 역사입니다.

우리는 때로 "하나님, 이 난관이 빨리 해결되게 하시고, 나를 이 번거로운 상황에서 당장 석방해 주옵소서"라고 기도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때로 우리를 그 상황에 얼마간, 더 오래, 아주 오래 묶어 두십니다. 왜냐하면 그 묶임 자체가 나를 원수의 공격으로부터 지키는 '하나님의 거룩한 방어막'이며, 나를 더 거대한 소명의 자리(로마)로 이끌어가는 '하나님의 전차'이기 때문입니다.

1517년 종교개혁의 문을 연 마르틴 루터(Martin Luther)는 사투(死鬪)를 벌입니다. 루터는 그냥 루터가 아닙니다. 사도행전 26장의 바울이 총독 베스도와 아그립바 왕이라는 당대 절대 권력 앞에서 선포했던 "나와 같이 되기를 원한다", 그리고 "내 많은 학문이 너를 미치게 한다"라는 실천을 한 믿음의 거장이 루터입니다.

1521년 보름스 제국 의회에서 루터는 "내 양심은 하나님의 말씀에 포로가 되었다"라고 고백합니다. 1517년 10월 31일, 비텐베르크 대학교 성문에 95개조 반박문을 걸어 종교개혁의 불꽃을 당긴 마르틴 루터는, 1521년 4월 보름스 제국 의회로 호출됩니다. 그 자리에는 당대 세계 최고의 권력자인 로마 제국 황제 카를 5세를 비롯하여, 교황의 사절, 제후들, 그리고 수많은 귀족과 사제들이 화려한 관복을 입고 루터를 심문하기 위해 진을 치고 있습니다. 마치 유대 땅의 총독 베스도와 아그립바 왕, 버니게가 화려하게 차려입고 법정에 앉아 죄수 바울을 심문했던 사도행전 26장의 법정과 판박이처럼 말입니다.

당시 황제의 심문관은 루터가 쓴 책들을 쌓아놓고 호통칩니다. "루터, 이 책들을 네가 썼음을 인정하느냐? 그리고 이 안의 주장들을 지금 당장 취소하겠느냐?" 취소하지 않으면 즉시 이단으로 정죄되어 화형에 처해질 절체절명의 위기에 루터는 처해집니다. 루터는 하루의 생각할 시간을 달라고 허가를 받은 후, 다음 날 황제와 교황의 권력자들 앞에 다시 선 루터는 손을 떨며 기도한 후, 그 거대한 권력자들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역사를 뒤흔든 선언을 내뱉습니다.

“성경의 증거나 명백한 이성에 의해 제 오류가 입증되지 않는 한, 저는 제가 인용한 성경 구절들에 의해 설득을 당했으며 내 양심은 하나님의 말씀에 포로가 되었습니다. 나는 아무것도 취소할 수 없고 하지도 않을 것입니다. 양심에 반하여 행동하는 것은 안전하지도 않고 현명하지도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나를 도우소서. 내가 여기 서 있나이다(Here I stand). 아멘”

이 루터의 양심 고백은 사도행전 26장 25절, "내가 미친 것이 아니요 참되고 온전한 말을 하나이다"와 29절, "다 나와 같이 되기를 하나님께 원하나이다"의 메시지와 그대로 연결됩니다.

당시 세상 사람들은 목숨을 걸고 하나님의 진리를 외치던 마르틴 루터를 향해 '미쳤다', '교황의 권위에 도전하는 광신자'라고 손가락질 합니다. 총독 베스도가 바울을 향해 '네 많은 학문이 너를 미치게 했다'고 크게 소리쳤던 것처럼 말입니다. 그러나 황제와 교황의 서슬 퍼런 권력 앞에서도 루터는 기죽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그의 손에는 썩어 없어질 세상의 교황권이 아니라, '하나님의 살아있는 말씀'이 쥐어져 있었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총독과 왕들은 자신들이 루터를 심판하고, 바울을 심판하는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영적으로 보면, 사슬에 매인 바울의 설교와 루터의 담대한 선언 앞에서 정작 떨고 있던 것은 세상의 권력자들이었을 것입니다. 이와 같이 바울의 설교를 들은 유대 아그립바 왕은 엄청난 갈등에 빠졌을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을 돌아보면 창조 질서를 파괴하고 가짜 평화를 퍼뜨리는 세상의 거짓 여론과 불의한 권력들이 우리를 향해 '취소하라, 타협하라'며 압박해 옵니다. 우리는 루터처럼, 바울처럼 선포해야 합니다. '내 양심은 하나님의 말씀에 포로가 되었습니다. 세상의 그 무엇과도 진리를 바꿀 수 없습니다. 진실을 알려야 합니다., 라고 우리는 선포하고 투쟁해야 합니다. 이 거룩한 기개와 부활의 소망을 가지고 나아갈 때, 세상이 감당하지 못하는 역전의 승리가 우리에게 임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위로가 우리에게 임할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사도행전 26장의 이 위대한 법정 장면은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강력한 위로와 힘이 될 것입니다. 바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만났던 그 주님은, 가이사랴 감옥에서도, 아그립바 왕의 법정에서도, 그리고 훗날 로마로 가다가 유라굴로 광풍을 만난 풍랑 위의 배 안에서도 한 번도 바울을 떠나지 않으십니다. 우리는 이해할 수 없는 고난 앞에서 하나님의 정교한 손길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당장은 왜 우리 가정에, 하나님을 믿는 우리들에게, 우리 사업에 이런 브레이크가 걸리는지, 왜 우리가 이런 시련과 억울함을 당해야 하는지, 알 수 없을 때가 있습니다. 주님은 실수가 없으신 분입니다. 지금의 멈춤과 환난과 묶임은 우리를 파멸시키기 위함이 아닐 것입니다. 우리를 보호하시고 더 큰 로마의 사명으로 이끌어 가시는 정교한 간섭의 시간일 수 있습니다.

아그립바 왕과 버니게가 아무리 보석으로 치장했어도 그들은 죄의 사슬에 매인 불쌍한 영혼입니다. 일터에서 힘을 다해 정직하게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영생이 있고, 부활의 소망이 있습니다. 우리를 부르신 하나님 사랑으로, 다메섹의 은혜를 우리 모두 새롭게 회복해야 할 것입니다. 바울이 인생의 가장 깊은 위기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고 왕들 앞에서 주님을 증언할 수 있었던 동력은, 그 옛날 다메섹 도상에서 나 같은 죄인을 찾아와 주셨던 그 강권적인 사랑의 역사 때문입니다.

이번 한 주간, 우리 삶의 지치고 억울한 현장 속에서 다시 한번 우리를 부르신 주님의 음성을 듣는, 그 주님의 음성에 귀 기울이는 겸비한 우리들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불의한 세상 속에서 담대히 승리하며, 당장은 이해할 수 없는 상황에서도, 우리 일터와 가정을 하늘의 생명으로 채워나가시는 하나님을 신뢰하며 전진하는 신실한 우리들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지금 대한민국과 전세계가 부정과 불법으로 혼동과 혼란의 도가니에 빠져 있습니다. 창조질서를 파괴하는 악법이 창궐한 이 시대는 소돔과 고모라 같은 심판의 때가 되었습니다. 전세계가 거짓과 어둠의 세력들과 전쟁 중에 있습니다. 전쟁의 양상이 완전 바뀐 것입니다. 이러한 때에 사도 바울이나 마르틴 루터 같은 믿음의 용사들의 외침이 반드시 살아나야 합니다. 우리 한 사람은 미약하지만 하나님을 신뢰함으로써 우리 모두가 바울이나 루터처럼 목소리를 내는 지혜가 절실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인생에 이해할 수 없는 고난과 정체기가 찾아올 때 낙심하거나 원망하지 않게 하옵소서. 바울의 사슬을 사용하셔서 로마로 가는 길을 여셨던 주님의 정교하고 거룩한 손길을 신뢰하게 하옵소서. 세상의 권세와 화려함 앞에 기죽지 않게 하시고, 사슬에 묶여 있으면서도 "나와 같이 되기를 원한다" 외쳤던 바울의 기개를 우리에게 부어주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 우리 삶의 가장 큰 자랑과 권세가 되게 하옵소서. 다메섹 도상에서 나 같은 죄인을 강권적으로 불러주셨던 그 첫 사랑을 기억하게 하사, 텐트 메이커로서 우리의 일터와 경영 현장이 세상 사람들에게 참된 진리와 소망을 전하는 거룩한 복음의 전초기지가 되게 하옵소서. 기도 응답이 늦어도 하나님을 신뢰하므로 평강이 우리를 지배하는 하루, 하루가 되게 하옵소서, 조국 대한민국 국민들을 긍휼히 여기셔서 자유 대한민국을 수호하고자 오늘도 투쟁하고 있는 백성들을 전적으로 보호하시고 힘을 실어 주옵소서. 인내 하며 실망하지 않고 더욱 가열차게 하나님께 울부짖으며 하나님의 나라를 맛보아가는, 하나님 나라가 임하는 우리들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