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을 전하시는 하나님의 보이지 않는 손
사도행전 25:1-27 (현대인의 성경)
1 총독으로 부임한 지 3일 후에 베스도는 가이사랴에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갔다.
2 그러자 대제사장들과 유대인 지도자들이 바울을 고소하며
3 그를 예루살렘으로 보내 줄 것을 부탁했다. 그들은 도중에 사람들을 숨겨 놓았다가 바울을 죽일 음모를 꾸미고 있었던 것이다.
4 그때 베스도가 이렇게 대답하였다. “바울은 가이사랴에 갇혀 있고 나도 곧 그리로 가야 합니다.
5 만일 바울에게 어떤 잘못이 있으면 여러분의 대표자가 나와 함께 가서 그를 고소하도록 하시오.
6 예루살렘에서 열흘 가까이 머물다가 가이사랴로 내려간 베스도는 이튿날 법정에 앉아 바울을 데려오라고 명령하였다.
7 바울이 나타나자 예루살렘에서 온 유대인들이 둘러서서 여러 가지 죄로 그를 고소하였으나 전혀 증거를 대지 못하였다.
8 그때 바울이 “나는 유대인의 율법이나 성전이나 황제에 대해서 아무런 죄도 짓지 않았습니다” 하고 변명하였다.
9 베스도는 유대인들의 호감을 사려고 “네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서 이 사건에 대하여 내 앞에서 재판을 받겠느냐?” 하고 물었다.
10 그래서 바울이 이렇게 대답하였다. “나는 황제의 법정에서 재판을 받겠습니다. 각하께서도 아시다시피 나는 유대인들에게 잘못한 일이 전혀 없습니다.
11 내가 만일 죽을 죄를 지었다면 사형도 달게 받겠습니다. 그러나 이들의 고소가 사실이 아니라면 아무도 나를 그들에게 넘겨 줄 수 없습니다. 나는 로마 황제에게 상소합니다.”
12 베스도는 배석한 사람들과 의논한 후 “네가 황제께 상소하였으니 황제에게 갈 것이다” 하고 선언하였다.
13 며칠 후에 아그립바왕과 버니게가 새로 부임한 베스도를 예방하려고 가이사랴에 왔다.
14 그들이 거기서 여러 날을 지내는 중에 베스도는 바울의 사건을 다음과 같이 왕에게 이야기했다. “여기에 벨릭스가 인계한 죄수 하나가 있습니다.
15 내가 예루살렘에 올라갔을 때 유대인의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이 그를 고소하여 유죄 판결을 내려 달라고 하였으나
16 나는 그들에게 피고가 원고를 대면하여 그 사건에 대해 변명할 기회를 갖기 전에 그를 넘겨 주는 것은 로마 관례가 아니라고 설명해 주었습니다.
17 그들이 이 곳에 온 다음날 나는 지체하지 않고 법정을 열어 바울을 데려오라고 했습니다.
18 그를 고발한 사람들이 일어나 말했으나 내가 생각했던 것과 같은 죄는 하나도 들춰내지 못하고
19 자기들의 종교 문제와 또 죽은 예수를 바울이 살아났다고 주장하는 것에 관한 것뿐이었습니다.
20 나는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까 망설이다가 예루살렘에 가서 재판을 받는 것이 어떠냐고 그에게 물어 보았습니다.
21 그러나 바울은 황제의 판결을 받겠다고 상소하기에 내가 그를 황제에게 보낼 때까지 가두어 두었습니다.”
22 이 말을 듣고 아그립바가 “그의 말을 직접 듣고 싶소” 하자 베스도는 “내일 그렇게 하도록 하겠습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23 이튿날 아그립바와 버니게가 화려하게 차리고 와서 군 지휘관들과 그 도시 유지들과 함께 법정으로 들어갔고 베스도의 명령으로 바울도 끌려나왔다.
24 이때 베스도가 이렇게 말하였다. “아그립바왕과 이 자리에 계신 여러분, 보시는 바와 같이 이 사람은 예루살렘과 이 곳 유대인들이 죽여야 한다고 외치며 내게 고소한 사람입니다.
25 그러나 내가 조사해 보니 그에게는 죽일 만한 죄가 없었고 또 그가 황제께 상소했기 때문에 로마로 보내기로 결정했습니다.
26 그런데 나는 그에 대하여 황제께 올릴 확실한 자료가 없습니다. 그래서 오늘 조사하여 보고할 자료를 얻으려고 여러분 앞과 특히 아그립바왕 앞에 이 사람을 불러냈습니다.
27 죄명을 확실하게 밝히지 않고 죄수를 보낸다는 것은 옳은 일이 아닌 것 같습니다.”
어떤 사람이 부자일까요? 어떤 사람이 강한 자일까요?
오늘 우리는 대제국 로마의 총독 베스도와 유대 땅을 통치하던 아그립바 왕, 그리고 버니게라는 당대 최고의 권력자들이 화려하게 장식된 법정에 모여 있는 모습을 봅니다. 그들은 화려한 관복을 입고, 군 지휘관들과 도시의 유지들을 거느린 채 기세 등등하게 법정의 상석에 앉아 있습니다(23절).
반면, 그들 앞에 끌려 나온 사도 바울의 모습은 어떠합니까? 2년 동안 가이사랴 감옥에 갇혀 지내며 안색은 창백한, 손과 발에는 차가운 쇠사슬이 채워진 초라한 죄수의 몰골입니다. 객관적으로 드러난 범죄 사실이 단 하나도 없음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유대 종교 권력자들의 끊임없는 암살 음모와 정치적 야욕에 밀려 사지로 내몰리고 있습니다.
인간적의 눈으로 보면 이것은 철저한 패배요, 불의한 세상 권력 앞에 무기력하게 짓밟히는 신앙인의 절망처럼 보입니다. "하나님, 공의를 행하시는 하나님께서 살아 계신다면 왜 죄 없는 바울을 저 화려하고 타락한 권력자들 앞에서 죄수의 몸으로 조롱을 받게 하십니까?" 라는 원망이 터져 나올 법한 상황입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영적인 눈을 열어 역사의 배후를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이 법정은 바울이 심판받는 자리가 아니라, 세상의 최고 통치자들이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서 복음을 듣는 '거룩한 성소'입니다. 본래 나사렛이라는 유대의 작은 변두리 마을에서 보잘것없이 돋아났던 임마누엘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싹이, 이제는 대제국 로마의 심장부를 향해 전진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무런 죄도 없으면서 억울하게 죄수의 몸으로 끌려가신 예수님의 그 십자가 길을 바울에게 그대로 걷게 하심으로써, 인간의 방법으로는 도저히 접근할 수 없었던 총독과 왕들의 안방에 복음의 폭탄을 투하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1. 사슬에 매인 복음의 전진 (1-12)
벨릭스의 뒤를 이어 새로 총독으로 부임한 베스도는 유대인들의 환심을 사기 위해, 죄 없는 바울을 다시 예루살렘으로 보내 재판을 받게 하겠느냐고 제안합니다(9절).
9 베스도는 유대인들의 호감을 사려고 “네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서 이 사건에 대하여 내 앞에서 재판을 받겠느냐?” 하고 물었다.
왜 총독들은 유대인들의 환심을 사려할까요? 민란을 두려워하기 때문입니다. 총독으로 부임된 자는 현지에서 민란이 일어나면 바로 직위해제로 파면되는 것입니다. 대제사장들과 유대인 지도자들이 길목에 자객들을 숨겨두었다가 바울을 암살하려는 무서운 음모를 꾸미고 있었음을 베스도는 알지 못합니다(3절). 만약 바울이 예루살렘 행을 수용했다면 길거리에서 비참하게 목숨을 잃고 복음의 여정은 멈추어 섰을 것입니다.
바로 그 절체절명의 순간, 바울은 성령의 지혜로 단호하게 외칩니다. 10-11절을 보십시오.
10 그래서 바울이 이렇게 대답하였다. “나는 황제의 법정에서 재판을 받겠습니다. 각하께서도 아시다시피 나는 유대인들에게 잘못한 일이 전혀 없습니다.
11 내가 만일 죽을 죄를 지었다면 사형도 달게 받겠습니다. 그러나 이들의 고소가 사실이 아니라면 아무도 나를 그들에게 넘겨 줄 수 없습니다. 나는 로마 황제에게 상소합니다.
바울의 이 한마디, "가이사 황제에게 상소하노라"라는 이 선언은 법정을 뒤흔듭니다. 로마 시민권을 가진 자의 이 상소는 총독이라 할지라도 결코 거부할 수 없는 절대적인 법적 권리이기 때문입니다. 2000년전 로마 법의 선진 수준을 동시에 볼 수 있습니다. 바울은 수차의 전도여행을 하면서 로마시민권을 최대한 활용합니다. 결국 베스도는 배석자들과 의논한 후 "네가 황제께 상소하였으니 황제에게 갈 것이다"라고 선언합니다(12절).
12 베스도는 배석한 사람들과 의논한 후 “네가 황제께 상소하였으니 황제에게 갈 것이다” 하고 선언하였다.
이것이 왜 하나님의 절묘한 손길입니까? 바울은 일찍이 사도행전 19장 21절에서 "내가 로마도 보아야 하리라"고 고백합니다. 주님 역시 밤에 바울에게 나타나셔서 "네가 예루살렘에서 나의 일을 증언한 것 같이 로마에서도 증언하여야 하리라(사전 23:11)"고 약속하셨습니다.
유대인들은 바울을 가두고 죽여서 복음의 입을 막으려 했습니다. 베스도 총독은 정치적 이익을 위해 바울을 유대인들에게 제물로 넘겨주려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악한 꾀와 정치적 계산을 역 이용하셔서, 바울이 합법적으로 로마 제국의 호위와 보호를 받으며 제국의 심장인 로마 황제 앞에 설 수 있는 공식적인 통로를 열어 젖히십니다.
세상은 우리들을 사슬로 묶을 수 있고, 우리의 발걸음을 제약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삶의 현장에서 억울한 일을 당할 수 있습니다. 만연한 부정과 불법, 법적인 횡포, 혹은 불의한 무리들의 방해로 인해 사방이 막힌 것 같은 순간을 만날 때가 있습니다. 어둠이 깊을수록 빛은 그 가치를 드러냅니다. “복음으로 말미암아 내가 죄인과 같이 매이는 데까지 고난을 받았으나 하나님의 말씀은 매이지 아니하니라(딤후 2:9). 우리 눈에는 위기요 막다른 골목처럼 보이는 그 자리가, 사실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로마'를 향해 나아가도록 유도하시는 거룩한 신호탄이 될 수 있습니다. 자신들만의 이익을 구하지 않고 오직 주님의 소명을 붙잡고 나아갈 때, 세상의 음모는 오히려 우리를 하나님의 목적지로 실어 나르는 전차(Chariot)로 뒤바뀔 것입니다.
2. 예수님의 발자취를 따르는 바울 (13-22)
며칠 후 아그립바 왕과 그의 누이 버니게가 신임 총독 베스도를 축하하기 위해 가이사랴를 방문합니다(13절). 베스도는 왕에게 바울의 사정을 이야기하며 당혹감을 토로합니다. 18-19절을 보십시오.
18 그를 고발한 사람들이 일어나 말했으나 내가 생각했던 것과 같은 죄는 하나도 들춰내지 못하고
19 자기들의 종교 문제와 또 죽은 예수를 바울이 살아났다고 주장하는 것에 관한 것뿐이었습니다.
로마 총독 베스도의 이 객관적인 보고는 매우 중요한 영적 실재를 드러냅니다. 바울에게는 '죽일 만한 죄가 전혀 없다'는 사실입니다. 죄가 없는데 죄수의 신분으로 신문을 당하고 있는 이 바울의 모습은, 수년 전 본디오 빌라도의 법정에 서셨던 예수님의 모습과 거의 완벽하게 OVERLAP됩니다. 당시 빌라도 총독 역시 예수님을 심문한 뒤 "나는 그에게서 아무 죄도 찾지 못하노라(요 18:38)"고 세 번이나 선언합니다. 죄 없으신 예수님이 인류의 죄짐을 지고 도살장에 끌려가는 어린양처럼 묵묵히 십자가의 길을 가셨던 것처럼, 이제 그의 신실한 종 바울 역시 아무런 죄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복음의 전진을 위해 묵묵히 죄수의 길, 즉 십자가의 길을 걸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복음이 세상에 전파되는 거룩한 공식입니다. 복음은 화려한 보좌 위에서 군림하며 전파되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의 불의함 때문에 억울함을 당하고, 죄가 없으나 낮아지며, 형제의 죄짐과 세상의 모함을 내 몸에 짊어지는 '십자가의 삶'을 통해 전파됩니다. 억울한 일을 당할 때, 상식적으로 일어나지 않아야 할 일이 일어날 때, 우리가 알 수 없는 감당할 수 없는 일이 일어날 때, 그것이 오래 지속될 때 우리는 낙담할 수 있습니다. 이 때 우리는 고난 당하신 주님을 묵상하며 우리들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이에 아그립바 왕이 유대 총독 베스도의 말을 듣고 "나도 그의 말을 직접 듣고 싶소"라고 반응합니다(22절). 하나님은 죄 없는 바울의 고난을 통해, 감히 일반적인 방법으로는 접근조차 할 수 없었던 유대 땅의 최고 통치자 아그립바 왕의 마음에 복음에 대한 호기심과 영적 갈망의 씨앗을 심고 계십니다. 누구에게나 복음의 문은 열려있습니다. 이 아그립바2세 왕의 할아버지 되는 헤롯 안디바(해롯대왕 아들)는 유대를 다스리는 로마 정부에서 인정한 분봉왕입니다. 분봉왕이란 유대 전체가 아니라 일부 지역인 예루살렘과 갈릴리까지를 로마 정부의 승인을 받아 통치하는 왕입니다. 이 헤롯 안디바는 예수님을 핍박합니다. 그런데 이 안티바와 같이 같은 유모 엄마 젓을 먹고 자란 젖 동생인 마나엔은 반대로 예수님을 영접하고 안디옥 교회를 섬기는 지도자 교사로 활동합니다. (사도행전13:1)
안디옥 교회에 선지자들과 교사들이 있으니 곧 바나바와 니게르라 하는 시므온과 구레네 사람 루기오와 분봉 왕 헤롯의 젖동생 마나엔과 및 **사울(바울)**이라
분봉 왕 헤롯의 젖동생 마나엔은 비록 헤롯가 출신이지만, 시온의 대로가 있었기에 예수님을 만나 악의 굴레를 벗고 하나님께 쓰임 받는 축복된 인생으로 변화됩니다.
우리가 의롭게 살려고 애를 쓰다가 억울한 일이나 손해를 볼 때가 있습니다. 이 때 낙심하지 말아야 할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의인들이 겪는 고난은 그들이 주님의 참된 제자라는 증거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가신 십자가의 흔적을 그들 몸에 채우는 영광스러운 과정입니다. 믿음 때문에 억울함을 감내하고 온유함으로 그 길을 걸어갈 때, 세상은 그들의 무죄함과 당당함을 보며 그 배후에 계신 예수 그리스도의 살아계심을 목격하게 될 것입니다.
이처럼 죄수로 갇힌 상황에서도 오직 부활의 주님만을 선포하여 권력자들의 심령을 뒤흔든 현대판 바울이 있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 직후, 1948년경, 소련이 동유럽을 공산화하고 기독교를 잔인하게 박해할 때입니다. 루마니아의 리처드 웜브란트(Richard Wurmbrand, 1909~2001**)** 목사님은 비밀리에 복음을 전하다가 체포되어 14년 동안 악명 높은 공산당 감옥에 갇힙니다. 그는 아무런 죄가 없었으나, 예수 그리스도를 전했다는 이유로 매일 밤 잔인한 고문과 심문을 당합니다. 어느 날, 수용소의 악독한 공산당 총책임자이자 심문관이었던 한 고위 장교가 피투성이가 된 웜브란트 목사님을 앞에 두고 비웃으며 이렇게 말합니다. "네가 믿는 예수가 살아 있다면 왜 너를 이 차가운 감옥에서 건져내지 않느냐? 기독교는 인민을 마취시키는 아편일 뿐이다" 그때 웜브란트 목사님은 사도행전 25장의 바울처럼, 손에 쇠사슬을 찬 채로 당당하게 그 장교의 눈을 바라보며 말합니다.
"장교님, 예수님은 이미 2000년 전에 죽음의 권세를 깨뜨리고 부활하셨습니다. 그 부활하신 주님이 지금 이 어둡고 추악한 감옥 안에도 저와 함께 계십니다. 그리고 그 주님은 나를 고문하는 장교님을 불쌍히 여기시며, 장교님의 영혼도 구원받기를 원하십니다."
감옥에 갇힌 죄수가 자신을 심판하는 절대 권력자를 향해 오히려 부활의 복음을 선포하며 그의 영혼을 불쌍히 여긴 것입니다. 이 죄 없는 자의 당당한 부활의 증언과 십자가의 사랑 앞에, 철혈 같았던 공산당 장교의 심령에 거대한 영적 지진이 일어납니다. 그는 밤마다 웜브란트 목사가 갇힌 독방을 찾아와 몰래 복음을 들었고, 결국 예수를 구주로 영접하고 비밀리에 기독교인들을 돕는 자로 뒤바뀌는 놀라운 역전의 역사가 일어나게 됩니다. 세상의 권력은 웜브란트 목사를 죄수로 묶었으나, 하나님은 그 사슬을 사용하셔서 공산 제국의 핵심 권력자에게 복음의 불 방망이를 내리치신 것입니다.
3. 제국의 통치자들을 복음의 청중으로 삼으신 하나님의 주권 (23-27)
BC 5세기 대제국 페르시아의 수사궁에서 에스더가 왕 앞에 나아갔을 때처럼, 가이사랴의 법정에는 상상을 초월하는 화려한 광경이 펼쳐집니다. 아그립바 왕과 버니게가 온갖 보석과 화려한 관복으로 치장하고, 로마 군대의 높은 지휘관들과 도시의 최고 유지들과 함께 위엄을 과시하며 법정 안으로 걸어 들어옵니다(23절). 그리고 베스도 총독의 명령에 따라, 마침내 사도 바울이 그 화려한 무리들 앞으로 끌려 나옵니다. 23을 보겠습니다.
23 이튿날 아그립바와 버니게가 화려하게 차리고 와서 군 지휘관들과 그 도시 유지들과 함께 법정으로 들어갔고 베스도의 명령으로 바울도 끌려나왔다.
본문의 아그립바 왕은 아그립바 2세로 아기 예수님을 죽이려 했던 헤롯 대왕의 증손자입니다. 헤롯 가문은 온전한 정통 유대인 가문이 아닙니다. 헤롯대왕이 야곱의 형 에서의 후손인 ‘이두매’인으로 절반만 유대인인 반쪽자리 가문입니다. 이에 헤롯 대왕은 자신의 약점을 보완하려고 유대인 부인 둘을 아내로 맞이합니다. 그는 혈통적으로 열등감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화려하게 치장함으로써 그의 약점을 가립니다.
사도 야고보를 죽인 살인자가 본문 아그립바 2세의 부친인 아그립바1세입니다. 그 살인자의 아들인 아그립바 2세와 그 여동생 버니게가 아주 화려하게 치장하고 등장합니다. 이 버니게는 그의 친 여동생이자 간음과 죄악으로 영혼이 완전히 썩어 문드러진 여인입니다. 세상은 그들의 겉모습과 보석을 보며 부러워하고 기가 죽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쇠사슬에 묶여 있던 사도 바울의 눈에는 그들이 구원받아야 할 가장 초라하고 불쌍한 영적 죄인들에 불과합니다. 사도 바울은 유대인이므로 그들의 실상을 잘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진정한 진짜 왕의 권세는 죄악으로 가득 찬 헤롯의 아그립바 마차와 화려한 의복이 아닙니다. 비록 죄수의 몸일지라도 마음에 '시온의 대로(시84:5)'가 활짝 열려있는 임마누엘 예수의 이름을 선포하던 바울에게 있습니다. 시온의 대로는 주님께서 인도하시는 주님과 함께 하는 길들을 말합니다.
세상의 저울로 보면, 이 자리는 권력자들이 죄수 바울을 일방적으로 심문하고 구경하는 자리에 불과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저울로 이 장면을 다시 보면 총독 베스도는 아그립바 왕 앞에서 진실대로 고백하게 합니다. 26, 27절을 보십시오.
26 그런데 나는 그에 대하여 황제께 올릴 확실한 자료가 없습니다. 그래서 오늘 조사하여 보고할 자료를 얻으려고 여러분 앞과 특히 아그립바왕 앞에 이 사람을 불러냈습니다.
27 죄명을 확실하게 밝히지 않고 죄수를 보낸다는 것은 옳은 일이 아닌 것 같습니다.”
로마의 총독과 당시 유대 왕이 모였으나, 바울에게서 아무런 죄명도 찾지 못해 쩔쩔매고 있습니다. "죄명을 확실하게 밝히지 않고 죄수를 보낸다는 것은 옳은 일이 아닌 것 같습니다(27절)"라는 베스도의 고백은 세상 권력의 영적 무지함과 무능함을 폭로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복음을 전하기 위해 왕궁을 찾아다니거나 구걸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베스도의 정치적 처신의 난감함과 아그립바의 호기심을 사용하셔서, 당대 최고의 지배자들을 바울 한 사람의 설교를 듣기 위해 모인 '정장한 복음의 청중'으로 바꾸어 버리신 것입니다.
나사렛이라는 작은 마을의 구유에서 태어나신 임마누엘 예수님의 복음의 싹이, 이제 바울이라는 사슬에 매인 마차를 타고 대제국의 심장부와 그 통치자들의 귀에 다이렉트로 꽂히는 순간입니다. 바울이 죄수가 되지 않았다면, 어떻게 이 완고하고 높은 자들이 한자리에 모여 고개를 숙이고 죄수의 입에서 나오는 예수의 부활 소식을 들을 수 있겠습니까? 이것이 바로 역사를 주관하시고 역전시키시는 하나님의 거대하고 정교한 손길입니다.
오늘 사도행전 25장의 이 장엄한 법정 드라마는 우리에게 세 가지 영적 메시지를 던져 줍니다.
1. 삶의 배후에 있는 하나님의 로마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유대인들은 바울을 가두려 했으나 하나님은 그 사슬을 로마 황제에게로 가는 '정치적 프리패스'로 사용하십니다. 바울처럼 텐트 메이커로서 우리가 일터에서 겪는 정체기와 억울함은 실패가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더 높은 차원의 사명, '로마'로 인도하시는 보이지 않는 손길임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2. 고난의 현장에서 진리의 발자취를 따라야 합니다. 바울이 빌라도 앞의 예수님처럼 베스도 앞에서 무죄함을 증명하며 당당히 섰던 것처럼, 우리 역시 세상의 불의한 참소와 편향된 가치관 앞에서도 '거리낄 것 없는 양심'을 가지고 묵묵히 십자가의 길을 지혜롭게 걸어가야 합니다. 우리 공동체 지구촌 환경이 더 이상 악화될 수 없을 정도로 파괴되어 가고 있습니다. 청교도로 세워진 미국이 부정과 부패 마약으로 무너지고 있습니다. 1907년 평양 부흥회로 전세계 이목을 집중시킨 대한민국 기독교가 참회하고 깨어나야 합니다.
3. 세상의 화려함에 기죽지 말고 복음의 권세를 선포해야 합니다. 아그립바와 버니게가 아무리 보석으로 치장했을지라도, 그들은 죄명을 찾지 못해 쩔쩔매는 영적 소경에 불과합니다. 진짜 권세는 사슬에 묶여 있으나 '예수의 부활'을 손에 쥔 바울에게 있습니다. 우리 일터와 기업이 아무리 거대한 세상 권력 앞에 초라해 보일지라도, 세상 권력이 아무리 막강해도 주님께서 주신 것입니다. 만유의 주 되신 예수의 이름을 힘입어 담대히 진리를 선포해야 합니다.
나사렛에서 시작된 그 임마누엘 예수의 생명의 싹은 그 어떤 세상의 감옥도, 암살 음모도, 총독의 권력도 막아 설 수 없습니다. 그 복음은 마침내 로마를 정복했고 오늘 우리들의 심령에까지 도달한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번 한 주간, 세상의 불의한 흐름이나 사방이 막힌 것 같은 답답한 현실 앞에서도 "내가 너와 함께 하겠다" 하시는 임마누엘의 주님을 신뢰해야 합니다. 당장 또는 현재 응답이 없다고 우리는 실망하지 않아야 합니다. 우리 인생의 재판장은 세상이 아니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이심을 입으로 선포해야 합니다. 바울처럼 당당히 옷을 털고 일어나 날마다 영적 승리를 일구어 가는 우리들이 되어야 합니다.
진정한 힘이나 부유함은 어디에 있을까요? 이는 무엇으로부터 나올까요?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삶에 이해할 수 없는 억울한 브레이크가 밟히고 사방이 가로막힌 감옥 같은 상황을 만날지라도 원망하지 않게 하옵소서. 바울의 사슬을 통해 로마의 문을 여셨던 주님의 정교하고 거룩한 손길을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게 하옵소서. 죄 없으신 예수님이 가신 그 길을 바울이 묵묵히 따랐던 것처럼, 우리 역시 세상의 불의한 참소와 창조 질서를 파괴하는 왜곡된 여론 앞에서도 타협하지 않고, 거리낄 것 없는 양심과 부활의 소망으로 당당히 승리하게 하옵소서. 세상 통치자들의 화려함 앞에 기죽지 않게 하시고, 비록 초라한 죄수의 모습일지라도 만유의 주이신 예수의 이름으로 세상을 호령했던 바울의 기개를 주옵소서. 우리 기업과 일터가 세상을 향해 생명의 조서를 쓰는 복음의 전초기지가 되게 하옵소서. 당장 기도 응답이 없어도 실망하지 않는 우리들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