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메섹 도상에서 일어난 불가항력적 은혜
[사도행전 22:1-21]
1 부형들아 내가 지금 여러분 앞에서 변명하는 말을 들으라
2 그들이 그가 히브리 말로 말함을 듣고 더욱 조용한지라 이어 이르되
3 나는 유대인으로 길리기아 다소에서 났고 이 성에서 자라 가말리엘의 문하에서 우리 조상들의 율법의 엄한 교훈을 받았고 오늘 너희 모든 사람처럼 하나님께 대하여 열심이 있는 자라
4 내가 이 도를 박해하여 사람을 죽이기까지 하고 남녀를 결박하여 옥에 넘겼노니
5 이에 대제사장과 모든 장로들이 내 증인이라 또 내가 그들에게서 다메섹 형제들에게 가는 공문을 받아 가지고 거기 있는 자들도 결박하여 예루살렘으로 끌어다가 형벌 받게 하려고 가더니
6 가는 중 다메섹에 가까이 갔을 때에 오정쯤 되어 홀연히 하늘로부터 큰 빛이 나를 둘러 비치매
7 내가 땅에 엎드러져 들으니 소리 있어 이르되 사울아 사울아 네가 왜 나를 박해하느냐 하시거늘
8 내가 대답하되 주님 누구시니이까 하니 이르시되 나는 네가 박해하는 나사렛 예수라 하시더라
9 나와 함께 있는 사람들이 빛은 보면서도 나에게 말씀하시는 이의 소리는 듣지 못하더라
10 내가 이르되 주님 무엇을 하리이까 주께서 이르시되 일어나 다메섹으로 들어가라 네가 해야 할 모든 것을 거기서 누가 이르리라 하시거늘
11 나는 그 빛의 광채로 말미암아 볼 수 없게 되었으므로 나와 함께 있는 사람들의 손에 끌려 다메섹에 들어갔노라
12 율법에 따라 경건한 사람으로 거기 사는 모든 유대인들에게 칭찬을 듣는 아나니아라 하는 이가
13 내게 와 곁에 서서 말하되 형제 사울아 다시 보라 하거늘 즉시 그를 쳐다보았노라
14 그가 또 이르되 우리 조상들의 하나님이 너를 택하여 너로 하여금 자기 뜻을 알게 하시며 그 의인을 보게 하시고 그 입에서 나오는 음성을 듣게 하셨으니
15 네가 그를 위하여 모든 사람 앞에서 네가 보고 들은 것에 증인이 되리라
16 이제는 왜 주저하느냐 일어나 주의 이름을 불러 세례를 받고 너의 죄를 씻으라 하더라
17 후에 내가 예루살렘으로 돌아와서 성전에서 기도할 때에 황홀한 중에
18 보매 주께서 내게 말씀하시되 속히 예루살렘에서 나가라 그들은 네가 내게 대하여 증언하는 말을 듣지 아니하리라 하시거늘
19 내가 말하기를 주님 내가 주를 믿는 사람들을 가두고 또 각 회당에서 때리고
20 또 주의 증인 스데반이 피를 흘릴 때에 내가 곁에 서서 찬성하고 그 죽이는 사람들의 옷을 지킨 줄 그들도 아나이다
21 나더러 또 이르시되 떠나가라 내가 너를 멀리 이방인에게로 보내리라 하셨느니라
대부분의 사람들은 중요한 것은 반복하여 Remind 합니다. 말할 것도 없이 중요한 것은 다시 반복하여 재강조합니다. ‘사람은 결코 변하지 않는다’라는 말을 종종 듣습니다. 성격, 습관, 가치관까지도 한 번 고착되면 그것을 바꾸기란 피를 깎는 노력 없이는 불가능에 가깝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은 그 어떤 인간의 의지나 노력으로도 설명할 수 없는, 한 인간의 본질이 통째로 뒤바뀐 우주적인 대사건을 강변하고 있습니다. 기독교 역사상 가장 신랄한 박해자였던 다소 사람 사울이, 이방인의 사도 바울로 거듭난 사건입니다.
오늘 본문의 직전 배경인 사도행전 21장 27절 이하를 보면, 바울은 예루살렘 성전에서 유대인들에게 붙잡혀 집단 폭행을 당하고 있습니다. 아시아에서 온 유대인들이 바울을 선동군으로 “이 사람은 우리 백성과 율법과 이 곳을 비방하는 자”라며 군중을 충동질했기 때문입니다. 온 성이 소동하여 바울을 성전 밖으로 끌어내고 죽이려 할 때, 로마의 천부장이 군사들을 거느리고 달려와 가까스로 바울을 결박하여 진영 내로 끌고 들어가 보호합니다. 그 급박하고 살벌한 현장, 분노와 증오로 가득 찬 유대인 군중의 함성 소리 한복판에서 바울은 천부장에게 청하여 유대 백성들 앞에 서게 됩니다. 그리고 진영 문 계단 위에서 도망치거나 변명하는 대신, 자신을 죽이려는 동족들을 향해 손을 흔들어 주목시키고 오늘 본문 1절의 고백을 시작합니다.
“부형들아 내가 지금 여러분 앞에서 변명하는 말을 들으라.”
바울은 지금 자신의 목숨을 구걸하기 위해 변명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는 분노에 가득 찬 유대인들을 향해, 자신이 만난 ‘예수 그리스도’를 증언하고 있습니다. 그가 지금 로마의 공용어인 헬라어가 아니라, 유대인들의 심장과 영혼을 깨우는 ‘히브리 방언’으로 말합니다. 이 때, 성난 파도 같았던 군중은 일순간 깊은 침묵에 빠져듭니다. 사도 바울이 전하고자 했던 핵심은 단 하나입니다. “나도 과거에는 당신들처럼, 아니 당신들보다 더 격렬하게 예수를 증오하고 핍박했던 자입니다. 그러나 내가 지금 이 자리에 서서 예수를 주라 고백하는 것은, 내 의지나 선택이 아니라 하늘로부터 임한 예수님의 강권적인 역사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는 본문 21절까지의 말씀을 통해, 우리를 근본적으로 변화시키시는 주님의 일방적이고도 주권적인 은혜와 그 은혜가 이끄는 사명의 자리까지 깊이 묵상해 보고자 합니다.
1. 과거 하나님을 향한 잘못된 열심과 악행(1-5)
본문 3절부터 5절까지 바울은 자신의 과거 신분과 행적을 낱낱이 밝힙니다. 3절입니다.
“나는 유대인으로 길리기아 다소에서 났고 이 성에서 자라 가말리엘의 문하에서 우리 조상들의 율법의 엄한 교훈을 받았고 오늘 너희 모든 사람처럼 하나님께 대하여 열심이 있는 자라.”
바울은 당시 유대 사회에서 최고로 인정받던 가말리엘의 문화생임을 밝힙니다. 그는 철저한 바리새인이며, 조상들의 율법을 수호하기 위해 목숨을 걸었던 인물입니다. 그는 지금 자신을 죽이려는 유대인들을 향해 “오늘 너희 모든 사람처럼 나도 하나님께 대하여 누구보다 열정이 특심한 사람”이라며 동질감을 표합니다. 그러나 그 열심의 방향이 잘못되었을 때, 그것은 가장 끔찍한 죄악으로 변질됩니다. 4절과 5절을 보십시오.
4 내가 이 도를 박해하여 사람을 죽이기까지 하고 남녀를 결박하여 옥에 넘겼노니 5 이에 대제사장과 모든 장로들이 내 증인이라 또 내가 그들에게서 다메섹 형제들에게 가는 공문을 받아 가지고 거기 있는 자들도 결박하여 예루살렘으로 끌어다가 형벌 받게 하려고 가더니
이 도는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는 ‘예수 그리스도교’로 요즘 말로 기독교를 말합니다. 사울은 예수 믿는 자들을 박해하는 데 그치지 않고, 그들을 죽이는 일에 앞장섰음을 밝힙니다. 남녀를 가리지 않고 결박하여 감옥에 처넣습니다. 심지어 예루살렘의 경계를 넘어 시리아의 다메섹에 있는 성도들까지 잡아오기 위해 대제사장의 공식 문서까지 발부받아 길을 떠났던 사람입니다. 그는 기독교를 뿌리 뽑는 것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도리라고 굳게 믿습니다.
인간적인 시선으로 볼 때, 사울은 절대로 변화될 수 없는 사람입니다. 그는 감정적인 불만 때문에 예수쟁이를 미워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신앙적 신념과 신학적 확신을 가지고 예수를 대적합니다. 똑똑하고, 권력이 있으며, 종교적 확신으로 똘똘 뭉친 악한 핍박자, 그것이 다메섹으로 가던 사울의 실체입니다. 그 누구도 사울을 설득할 수 없었고, 그 어떤 인간도 그의 폭주를 막을 수 없습니다. 요즘 시대로 비유하면 하나의 이상한 원칙에 사로잡혀 악랄하기 그지없는 독종 특별검사 같은 자가 바울입니다.
2. 예수님의 강권적인 역사와 위로부터 임한 큰 빛과 음성(6-13)
그렇게 살기등등하여 다메섹에 거의 가까이 이르렀을 때, 사울의 인생을 영원히 뒤바꿔 놓은 초자연적인 사건이 일어납니다. 본문 6절과 7절입니다.
6 가는 중 다메섹에 가까이 갔을 때에 오정쯤 되어 홀연히 하늘로부터 큰 빛이 나를 둘러 비치매 7 내가 땅에 엎드러져 들으니 소리 있어 이르되 사울아 사울아 네가 왜 나를 박해하느냐 하시거늘
시간은 정오, 즉 낮 12시였습니다. 중동의 뜨거운 태양이 머리 위에 내리쬐는 가장 밝은 시간이었지만, 하늘로부터 임한 빛은 그 태양 빛을 압도하는 ‘큰 빛’입니다. 사울은 그 자리에서 말에서 떨어져 땅에 엎드러질 수밖에 없습니다. 인간의 모든 기세와 당당함이 영광의 빛 앞에서 완전히 무력화된 순간입니다.
그리고 하늘로부터 사울의 이름을 두 번 부르시는 음성이 들립니다. “사울아, 사울아 네가 왜 나를 박해하느냐.” 사울은 깜짝 놀라 묻습니다. “주님 누구시니이까?” 그러자 주님께서 대답하십니다. “나는 네가 박해하는 나사렛 예수라.” 이 대답은 사울의 영혼을 뒤흔드는 천둥소리와 같았을 것입니다. 사울은 자신이 나사렛 예수를 추종하는 가난하고 무지한 자들을 당연히 박해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예수는 이미 십자가에서 저주를 받아 죽은 실패자라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지금 하늘의 영광 가운데 살아계셔서 자신에게 친히 말씀하시는 분이 바로 그 ‘나사렛 예수’라는 사실을 직면했을 때, 사울의 모든 세계관은 산산조각이 납니다.
예수님은 “왜 내 교회를 박해하느냐”라고 묻지 않으시고, “왜 ‘나’를 박해하느냐”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은 지상의 교회가 당하는 고통을 자신의 고통으로 여기시는 분이십니다. 이 사건은 사울이 스스로 연구해서 얻을 결론이 아닙니다. 사울이 죄를 뉘우치고 회개 기도를 하다가 깨달은 것도 아닙니다. 사울은 여전히 예수 믿는 자들을 잡으러 가던 잔인한 죄인의 길 위에 있습니다. 바로 그 죄의 정점에서, 예수님께서 일방적으로 찾아오셔서 그를 꺾으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인간의 저항을 무너뜨리는 주님의 강권적인 역사입니다.
3. 구약의 약속과 일방적인 주권의 성취(14-16)
우리가 여기서 반드시 주목해야 할 점은, 바울이 경험한 이 강권적인 변화가 결코 우연이나 돌발적인 사건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이것은 구약 성경 전체를 통해 흐르고 있는, 자기 백성을 구원하시기 위한 하나님의 ‘일방적인 언약의 방법’입니다.
본문 14절과 15절에서 경건한 유대인 아나니아는 눈이 멀어 고통받던 사울에게 나아와 하나님의 주권적인 선택을 선포합니다. 당시 아나니아는 제사장이나 장로가 아닙니다. 아나니아는 하나님께서 악동 사울의 변화를 위해 준비해두신 일꾼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사역을 위해 사람을 준비하여 두십니다.
“우리 조상들의 하나님이 너를 택하여 너로 하여금 자기 뜻을 알게 하시며 그 의인을 보게 하시고 그 입에서 나오는 음성을 듣게 하셨으니 네가 그를 위하여 모든 사람 앞에서 네가 보고 들은 것에 증인이 되리라.” 아나니아는 “우리 조상들의 하나님”을 언급합니다. 즉, 사울을 부르신 분은 유대인들이 그토록 신봉하는 “구약의 여호와 하나님”이라고 합니다. 이 일은 하나님의 주권적인 ‘선택’에 의해 이루어졌다는 것입니다.
구약의 역사를 보십시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선택하시고 변화시키실 때, 이스라엘이 자격이 있거나 먼저 손을 내밀었기 때문입니까? 아닙니다. 신명기 7장 7절에서 말씀하듯, 이스라엘은 모든 민족 중에 가장 소수였고 유약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상을 숭배하던 아브라함을 갈대아 우르에서 일방적으로 불러내셨습니다. 야곱이 모태에 있을 때부터 그의 행위와 상관없이 사랑하셨습니다.
구약 선지자 에스겔을 통해 약속하신 새 언약의 핵심이 무엇입니까? 에스겔 36장 26절에, “또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너희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거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며”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죄로 인해 돌처럼 굳어진 인간의 마음을 일방적으로 깨뜨리시고, 새 영과 새 마음을 주시겠다는 약속입니다. 새 영은 성령을 말합니다.
다메섹 길 위에서 일어난 사건은 바로 이 구약의 약속이 사울이라는 한 악한 죄인의 삶에 문자 그대로 성취된 사건입니다. 사울의 의지나 동의를 구하지 않으시고,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열심과 은혜로 사울의 완악한 마음을 깨뜨리십니다. 눈이 멀어 다른 사람의 손에 끌려 다메섹으로 들어가는 사울의 모습은, 자신의 의지와 힘이 완전히 철거되고 오직 주님의 주권 아래 장악된 인간의 상태를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이처럼 완악한 자를 일방적으로 변화시키시는 주님의 역사는 비단 2천 년 전 바울에게만 일어난 일이 아닙니다. 교회의 역사 속에서, 그리고 오늘날 우리가 살아가는 이 시대 속에서도 주님은 여전히 살아계셔서 악한 자들을 강권적으로 변화하고 계십니다.
20세기 미국 뉴욕의 거리를 공포로 몰아넣었던 악명 높은 폭력 조직 ‘마우마우스(Mau Maus)’의 두목, 니키 크루즈(Nicky Cruz, 1938~)가 바로 현대판 사울 입니다. 그는 1938년, 푸에르토리코의 라스 피에드라스에서 태어납니다. 그의 부모는 기독교인이 아닙니다. 사탄을 숭배하고 주술을 행하는 주술인입니다. 19명의 자녀 중 한 명이었던 그는 부모로부터 극심한 정신적, 신체적 학대를 받습니다. 이로 인해 그는 마음에 깊은 증오와 상처를 품은 채 자랐고, 자살을 시도하기도 합니다. 이에 견디다 못한 부모는 그가 15세가 되던 1954년에 미국 뉴욕 브루클린에 있는 형에게로 그를 보내버립니다. 그는 어린 시절 부모에게 버림받고 증오로 가득 찬 채 자라납니다. 뉴욕에 도착한 그는 곧 집을 나와 거리의 부랑자가 되었고, 당시 뉴욕에서 가장 잔인하기로 악명 높았던 푸에르토리코계 청소년 갱단 '마우마우스(Mau Maus)'에 가입합니다. 그리고 그는 악명 높은 갱단 두목이 됩니다.
사람을 찌르고 폭력을 행사하면서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 냉혈한입니다. 정신과 의사마저도 그를 진찰한 후 “이 소년은 치유 불가능하다. 감옥이나 사형대에서 생을 마감할 전형적인 악인”이라고 결론 내립니다. 그러던 어느 날, 데이빗 윌커슨(David Wilkerson)이라는 시골 출신의 젊은 개척 목회자가 성령의 이끌림을 받아 목숨을 걸고 그 뉴욕의 슬럼가로 찾아옵니다. 그리고 니키 크루즈(Nicky Cruz)를 향해 외칩니다. “니키, 네가 나를 토막 내어 길거리에 뿌린다 할지라도, 예수님은 여전히 너를 사랑하신다.”
니키 크루즈는 처음에 이 말을 비웃고 목사님을 때리며 핍박합니다. 마치 사울이 예수 믿는 자들을 잡으러 다녔던 것처럼 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일방적인 은혜는 니키의 증오보다 강합니다. 윌커슨 목사님의 헌신적인 사랑과 전도 집회 속에서, 성령의 강권적인 빛이 니키 크루즈의 영혼에 비추어집니다. 집회 마지막 날, 그는 자신도 모르게 단상 앞으로 나아가 무릎을 꿇습니다. 그의 마음을 지배하던 얼음 같은 증오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랑 앞에 순식간에 녹아 내립니다. 그는 그 자리에서 통곡하며 회개합니다. 평생 손에 쥐고 있던 칼과 총을 버립니다. 변하지 않을 것 같던 뉴욕 최고의 폭력배 두목이 예수님의 강권적인 역사로 변화됩니다. 이후 평생을 전 세계의 방황하는 청소년들을 구원하는 전도자의 삶을 살게 됩니다. 무엇이 니키 크루즈를 변화시킵니까? 인간의 도덕입니까? 법률입니까? 아닙니다. 사울을 꺾으셨던 나사렛 예수의 강권적인 은혜가 그를 일방적으로 사로잡았기 때문입니다.
1900년대 조선 황해도에는 김익두(1875-1950)라는 치료 불가능한 깡패, 안악골 호랑이로 알려진 악동이 있습니다. 김익두는 황해도 안악 일대에서 시장의 상판을 뒤엎고, 사람들을 두들겨 패며 돈을 갈취하던 악명 높은 깡패입니다. 장날에 서낭당 고개를 넘는 사람들이 "제발 오늘은 익두를 만나지 않게 해주십시오"라고 산신령에게 빌 정도였다고 합니다. 어느 장날, 미국에서 온 소안론(William L. Swallen, 스왈런) 선교사 부인이 장터에서 전도지를 나누어주고 있습니다. 깡패 김익두는 그 전도지를 빼앗아 그 자리에서 부인의 얼굴 앞에서 코를 혓바닥처럼 풀고는 전도지를 땅에 팽개쳐 버립니다. 인간적으로 보면 머리끝까지 화가 날 불의한 참소요 모욕입니다. 그때 소안론 선교사 부인은 눈을 부릅뜨고 싸우는 대신, 성령의 온유함으로 가만히 그를 바라보며 이렇게 말합니다. "청년, 예수님의 말씀을 그렇게 더럽히면 코가 썩어요" 이 한마디가 니키 크루즈를 찔렀던 성령의 방망이처럼 깡패 김익두의 심령을 찌릅니다. 그날 밤 김익두는 '진짜 코가 썩으면 어쩌나' 하는 두려움과 함께, 자신이 살아온 추악한 죄악들이 성령의 조명 아래 낱낱이 드러나 가슴을 치며 잠을 이루지 못합니다. 성령께 사로잡힌 김익두는 제 발로 안악읍 교회로 찾아갔고, 소안론 선교사의 설교를 들으며 강단 앞에서 눈물을 쏟으며 회개하고 거듭납니다. 김익두는 자신을 품어준 소안론 선교사에게 세례를 받고 완전히 새로운 피조물이 됩니다. 소안론 선교사님은 그의 과거를 다 알면서도 외모를 보지 않고 그를 신학교로 보내 목회자로 키웁니다. 깡패 김익두가 성령의 권능을 받자, 수많은 병자를 고치고 수천명을 주님께로 인도하는 한국 교회사 최고의 신유 대부흥사가 됩니다.
4. 한계를 뛰어넘는 사명과 유대인들을 향한 진심(17-21)
오늘 본문의 마지막 부분인 17절부터 21절까지 바울은 회심 이후 예루살렘 성전에서 기도할 때 일어났던 또 다른 강권적인 역사를 고백합니다. 18절에서 주님은 바울에게 “속히 예루살렘에서 나가라 그들은 네가 내게 대하여 증언하는 말을 듣지 아니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때 바울은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기보다, 자신의 생각을 내세우며 주저했습니다. 19절과 20절을 보십시오.
“내가 말하기를 주님 내가 주를 믿는 사람들을 가두고 또 각 회당에서 때리고 또 주의 증인 스데반이 피를 흘릴 때에 내가 곁에 서서 찬성하고 그 죽이는 사람들의 옷을 지킨 줄 그들도 아나이다.”
바울의 생각은 이러합니다. ‘주님, 유대인들은 제가 과거에 어떤 박해자였는지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 제가 변화되어 예수를 전한다면, 유대인들도 큰 충격을 받고 제 고백을 들어주지 않겠습니까? 제가 이곳 예루살렘에 남아서 동족 유대인들을 변화시키겠습니다.’ 바울의 마음속에는 동족 유대인들을 향한 피 끓는 사랑과 진심이 있었습니다. 자신과 같이 눈이 멀어 예수를 박해하는 저들도 이 고백을 들으면 변화되기를 바라는 간절함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인간의 생각과 하나님의 계획은 달랐습니다. 오늘 본문의 결론이자 정점인 21절을 다 함께 읽어보겠습니다.
“나더러 또 이르시되 떠나가라 내가 너를 멀리 이방인에게로 보내리라 하셨느니라.”
바울은 예루살렘에 머물며 유대인에게 복음을 전하고 싶어 했지만, 주님은 단호하게 “떠나가라”고 명하셨습니다. 그리고 바울의 지경을 유대라는 좁은 울타리를 넘어 “멀리 이방인에게로” 일방적으로 확장시키셨습니다.
유대인들에게 ‘이방인’이라는 단어는 결코 받아들일 수 없는 금기어입니다. 그들은 이방인을 지옥의 땔감 정도로 여겼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일방적인 구원 계획은 유대인들의 편견과 한계를 완전히 뛰어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바울의 부르심 자체도 강권적으로 역사하셨을 뿐만 아니라, 그가 걸어가야 할 사명의 길과 대상마저도 주님의 일방적인 주권으로 결정하십니다. 바울은 이 주님의 불가항력적인 명령 앞에 자신의 고집을 꺾고 이방인의 사도로 순종의 발걸음을 옮겼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예루살렘 성전 계단 위에서 바울은 지금 자신을 향해 분노하며 돌을 던지려는 과격한 유대인들에게, 이 모든 다메섹의 사건과 주님의 일방적 은혜와 계시를 쏟아내고 있습니다. 바울이 목숨이 위태로운 상황에서 이 이야기를 꺼낸 진심이 무엇이겠습니까?
부형들이여, 나 역시 당신들처럼 예수를 이단이라 생각했고, 예수를 믿는 자들을 죽이는 것이 하나님을 위한 일이라 확신했습니다. 내가 이렇게 변화된 것은 내 지혜나 의지가 아닙니다. 부활하신 나사렛 예수께서 나를 강권적으로 만나주셨고, 심지어 이방인에게 가라는 명령까지 일방적으로 내리셨습니다. 그러니 내 진심을 들으십시오. 당신들이 십자가에 못 박은 예수가 바로 우리 조상들이 그토록 기다리던 메시아이십니다. 나 같은 죄인의 괴수도 깨뜨리시고 변화시키신 주님의 은혜가, 지금 내 고백을 듣는 당신들에게도 임하여 당신들도 변화되기를 원합니다.
이러한 것이 바울의 진심입니다.
바울의 마음에는 자신을 때린 자들을 향한 분노나 원망이 없습니다. 오직 자신처럼 영적인 맹인이 되어 예수를 박해하고 있는 동족 유대인들을 향한 피끓는 사랑과 진심 어린 애통함이 있습니다. 기독교는 인간이 도덕적으로 수양을 쌓아서 도달하는 종교가 아닙니다. 기독교는 살아계신 하나님께서 죄인인 우리를 찾아오셔서 일방적으로 깨뜨리시고 새 생명을 주시는 ‘은혜의 종교’입니다.
바울을 변화시키시고 그의 사명의 지경을 이방인에게까지 강권적으로 넓히신 예수님은, 오늘 우리의 완악함도, 연약함도 깨뜨리실 수 있으며, 우리의 삶을 주님의 주권대로 인도하시는 분이십니다. 우리 주변에 절대로 변하지 않을 것 같은 완악한 이웃, 가족, 낙심한 자들, 불가능한 것으로 보이는 것들이 있습니까? 우리는 낙심하지 않아야 합니다. 사울을 바울로 만드신 주님의 일방적인 손길이 임하면, 그 어떤 악인도 새벽이슬 같은 주의 백성으로 거듭나게 될 것입니다. 뿐만 아닙니다. 우리에게는 간절한 기도제목이 있습니다.
하나님 너무 하십니다. 언제까지 기다려야 합니까? 하나님 너무하지 않으십니까? 꼭 이렇게 하셔야 합니까? 우리는 작은 것부터 하나 하나 변화를 받아야 합니다. 자신의 자존심, 아집, 생각과 무지, 연역함을 우리는 인정해야 합니다. 한 단계 성장을 위해 자기를 부인해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원대한 계획을 다 알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더 깊이 알아가도록 말씀과 기도로 동행해야 합니다. 어제 보다는 더 나아진 오늘, 오늘 보다는 더 성숙한 내일, 온전한 믿음을 소유한 우리들이 되어야 합니다. 말씀을 기억하며, 나를 일방적으로 택하시고 변화시켜 주신 주님의 은혜에 감사해야 합니다. 그리고 바울처럼 내 생각과 한계를 내려놓고 주님이 원하시는 것이 뭔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눈이 멀어 주님을 보지 못하는 이 세상을 향해 담대히 보고 들은 바를 증언하는 은혜와 증인의 삶이 되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의 다메섹 도상에서의 일방적인 은혜와 고백은 사도행전에서만 3회(9장, 22장, 26장) 반복합니다. 3회 반복은 예수님을 강권적으로 만난 이 감격이 사도 바울의 삶의 전환 기둥이 된 것을 말합니다. 우리들도 치열한 삶 속에서 이런 고백이 있어야 합니다. 동시에 조국 대한민국과 우리 지구촌 공동체에 하나님의 공의와 권세와 긍휼히 여기심이 충만하도록, 저희 가정을 위해, 사업장을 위해 간구하는 우리들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사고를 초월하여 역사하시는 주님을 신뢰하므로 성령 하나님의 인도함을 받는 우리들이 되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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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하겠습니다.
사랑과 은혜가 충만하신 하나님 아버지,
오늘 사도 바울이 고백한 다메섹 도상의 불가항력적인 은혜와 이방인을 향한 사명의 말씀을 마주하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바울처럼 완악했던 죄인을 버려두지 않으시고 일방적으로 찾아와 꺾어주시고 변화시키신 주님을 찬양합니다. 주님, 우리 주위에 여전히 눈이 멀어 참된 진리이신 예수를 알지 못하고 방황하는 영혼들이 있습니다. 자신들이 하는 행동이나 주장이 하나님 나라를 얼마나 심각하게 파괴하는 것인지 모르고 자행자지하고 있습니다. 불법과 불의가 가득한 이 땅을 고쳐주옵소서, 인간의 힘과 설득으로는 저들을 변화시킬 수 없사오니, 성령 하나님께서 강권적으로 역사하셔서 이 땅을 고쳐 주옵소서. 저들의 돌 같은 마음을 제거하시고 부드러운 마음을 주시옵소서. 바울의 생각을 넘어 이방인에게로 그를 보내신 것처럼, 우리의 삶도 우리의 생각과 한계에 갇히지 않게 하시고 주님의 주권적인 인도하심에 온전히 순종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우리의 간증과 삶과 체험을 통해 수많은 심령이 주님께로 돌아오는 역사가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우리를 변화시키신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