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RMON TEXT

성령의 능력과 증인의 삶으로 [사도행전 10:32-43]

성령의 능력과 증인의 삶으로 사도행전 10:32-43

32 사람을 욥바에 보내어 베드로라 하는 시몬을 청하라 그가 바닷가 무두장이 시몬의 집에 유숙하느니라 하시기로
33 내가 곧 당신에게 사람을 보내었는데 오셨으니 잘하였나이다 이제 우리는 주께서 당신에게 명하신 모든 것을 듣고자 하여 다 하나님 앞에 있나이다
34 베드로가 입을 열어 말하되 내가 참으로 하나님은 사람의 외모를 보지 아니하시고
35 각 나라 중 하나님을 경외하며 의를 행하는 사람은 다 받으시는 줄 깨달았도다
36 만유의 주 되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화평의 복음을 전하사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보내신 말씀
37 곧 요한이 그 세례를 반포한 후에 갈릴리에서 시작하여 온 유대에 두루 전파된 그것을 너희도 알거니와
38 하나님이 나사렛 예수에게 성령과 능력을 기름 붓듯 하셨으매 그가 두루 다니시며 선한 일을 행하시고 마귀에게 눌린 모든 사람을 고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함께 하셨음이라
39 우리는 유대인의 땅과 예루살렘에서 그가 행하신 모든 일에 증인이라 그를 그들이 나무에 달아 죽였으나
40 하나님이 사흘 만에 다시 살리사 나타내시되
41 모든 백성에게 하신 것이 아니요 오직 미리 택하신 증인 곧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신 후 그를 모시고 음식을 먹은 우리에게 하신 것이라
42 우리에게 명하사 백성에게 전도하되 하나님이 살아 있는 자와 죽은 자의 재판장으로 정하신 자가 곧 이 사람인 것을 증언하게 하셨고
43 그에 대하여 모든 선지자도 증언하되 그를 믿는 사람들이 다 그의 이름을 힘입어 죄 사함을 받는다 하였느니라

20년전 해외에 근무할 때 주일이 되면 교회에 출석합니다. 한국에 있는 가족들을 생각하면서 제 가슴에 늘 기도에 대한 응답과 기다림에 대한 애환이 가득할 때입니다. 유일한 낙이 주일 날 교회에 가서 예배를 함께 드리는 것입니다. 당시 목사님의 설교가 제 마음에 아무런 감동으로 다가오지 않습니다. 설교는 하는 것 같은데 가슴에 와 닫지 않습니다. 일부 남자 집사님들은 예배 시작하기 직전에 밖에 나가서 담배를 한대 깊이 쭉 피우고 급히 뛰어 들어 옵니다. 예배 중에는 흡연이 불가하기 때문입니다.

신약 23권중 유일한 역사서는 사도행전 1권뿐입니다. 사도행전은 주님이 승천하신 후, 35여년 정도의, 초기 성령의 역사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역사가 주는 교훈은 무엇일까요? 사도행전을 성령행전이라고도 부릅니다. 그만큼 그 시대나 우리 시대가 어떤 시대인지를 강조하여 성령시대임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성령은 개인적으로도 공동체적으로도 임합니다. 말씀을 통해 성령님의 역사를 심령에 새겨보도록 하겠습니다.

1. 외모로 판단하지 않으시는 하나님(32-35절)

32 사람을 욥바에 보내어 베드로라 하는 시몬을 청하라 그가 바닷가 무두장이 시몬의 집에 유숙하느니라 하시기로
33 내가 곧 당신에게 사람을 보내었는데 오셨으니 잘하였나이다 이제 우리는 주께서 당신에게 명하신 모든 것을 듣고자 하여 다 하나님 앞에 있나이다
34 베드로가 입을 열어 말하되 내가 참으로 하나님은 사람의 외모를 보지 아니하시고
35 각 나라 중 하나님을 경외하며 의를 행하는 사람은 다 받으시는 줄 깨달았도다

32절 “사람을 욥바에 보내어 베드로라 하는 시몬을 청하라 그가 바닷가 무두장이 시몬의 집에 유숙하느니라 하시기로”, 사람을 보낸 장본인은 백부장 고넬료입니다. 로마 제국 백부장 고넬료는 베드로에 대해서 이미 잘 파악하고 있습니다. 왜 그는 베드로를 잘 알게 되었을까요? 당시 백부장은 어떤 정도 지위에 있었을까요?

당시 유다는 로마의 지배를 받는 식민지 중 하나의 작은 국가입니다. 유대 총독 (Procurator/Prefect)이 가이사랴에 상주하며 유대 지역의 군사, 재판, 조세를 총괄합니다. (당시 빌라도, 벨릭스, 베스도 등). 그 다음 서열로 천부장(Tribunus)이 약 1,000명 단위의 부대(Cohort)를 지휘합니다. 사도 바울이 예루살렘에서 소요에 휘말렸을 때 그를 보호했던 인물이 천부장 루시아입니다. 그 다음이 백부장(Centurion)으로 로마 군대의 실질적인 중추 지휘관으로 약 100명의 보병을 지휘합니다. 고넬료가 바로 이 계급이었으며, 이들은 실전 경험이 풍부한 베테랑급 장교들입니다.

고넬료와 베드로의 만남은 단순히 한 개인의 회심을 넘어, 세계 역사를 바꾼 '복음의 대전환점'이 됩니다. 로마 관리 고넬료는 이미 구제와 기도를 열심히 하던 '믿음의 사람'입니다. 그는 베드로를 알기 前에 복음을 영접합니다. 그는 예루살렘에 핍박이 가해지자 예루살렘을 떠난 사도들이나 예루살렘을 떠나 사방으로 흩어진 복음을 가진 자들로부터 복음을 듣고 하나님 백성이 된 이방인 신자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것만으로 충분하다 하지 않으시고 베드로를 고넬료에게 보내십니다.

왜 하나님께서는 베드로를 고넬료에게 보내실까요?

그 핵심은 선행과 경건이 구원의 조건이 아니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십자가와 부활)이 들려져야 비로소 구원이 완성된다는 것을 보여주시기 위함입니다.

고넬료는 자신의 경건에 안주하지 않고, 사도의 입에서 나올 '말씀'을 듣기 위해 겸손히 엎드립니다. 베드로가 본 '부정한 동물로 인한 환상'과 고넬료의 '순종'의 교차가 가능했던 건 고넬료의 준비뿐만 아닙니다. 동시에 베드로의 유대인 우월주의에 대한 고정관념이 깨졌기 때문입니다. 그 당시까지 베드로는 유대교에 대한 우월의식이 강하게 남아 있습니다.

당시 유대인 베드로는 이방인 고넬료와 식사하거나 교제하는 것을 '부정한 것'으로 여깁니다. 이에 하나님은 베드로에게 부정한 짐승이 담긴 보자기 환상을 보여주시며 "내가 깨끗하게 한 것을 속되다 하지 마라"고 친히 환상을 보여 주십니다. 이는 고넬료의 간절한 초대가 있었지만, 베드로가 유대주의적 편견을 깨고 가이사랴로 발걸음을 옮기는 결단이 있었기에 이방인 선교의 문이 열릴 수 있게 된 것입니다.

베드로가 머물고 있는 욥바는 고넬료가 근무하는 로마 총독부 가이사랴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 약 60km 지점에 위치해 있습니다. 베드로가 욥바에서 죽은 여제자 다비다를 살린 사건(사도행전 9:36-42)은 인근 지역에 엄청난 파장을 일으킵니다. 성경은 "온 욥바 사람이 알고 많은 사람이 주를 믿더라"고 기록합니다. 고넬료 역시 이 '죽은 자를 살린 사도의 권능'에 대해 명확히 듣고 확신을 가졌을 것입니다. 이것은 성령 하나님의 직접적인 지시입니다. 결정적인 것은 환상 중에 나타난 천사가 "사람들을 욥바에 보내어 베드로라 하는 시몬을 청하라"고 구체적인 이름과 장소를 지정했다는 점입니다. 고넬료 입장에서는 자신이 평소 경외하던 하나님께서 직접 '최고의 권위자'를 연결해주신 셈입니다.

이후 고넬료의 집이 사도행전 2장에 성령이 역사하는 '작은 오순절' 가정이 됩니다. 베드로가 설교를 마칠 때가 아니라, 말씀을 전하고 있는 도중에 성령이 그곳에 모인 모든 사람에게 내려옵니다(행10:44). 이는 예루살렘에서 있었던 '오순절 성령 강림'이 이방인에게도 똑같이 일어났음을 확증하는 사건입니다. 이 사건 덕분에 베드로는 나중에 예루살렘 교회에 돌아가 "하나님이 우리와 똑같이 이방인에게도 성령을 주시는데 내가 누구관대 하나님을 능히 막겠느냐"며 이방인 전도의 정당성을 선포할 수 있게 됩니다.

고넬료는 "우리가 이제 하나님 앞에 있나이다"라고 고백하며 베드로를 맞이합니다. 이 '코람데오(하나님 앞에서)'의 태도가 기적을 만든 핵심입니다. 당시 베드로가 자신에게 엎드린 고넬료 앞에서 "나도 사람이라"며 일으켜 세운 장면에서 로마 장교와 유대인 어부라는 신분 차이를 생각하면 당시 세상적 기준으로는 매우 파격적 감동적 장면입니다.

34절에서 베드로는 경이로운 고백을 터뜨립니다. "내가 참으로 하나님은 사람의 외모를 보지 아니하시고 각 나라 중 하나님을 경외하며 의를 행하는 사람은 다 받으시는 줄 깨달았도다."
여기서 '깨달았도다'라는 표현은 단순히 지식적인 이해가 아니라, 성령의 충격 아래 자기 세계가 깨어지는 경험을 뜻합니다. 유대인들만이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그 완고한 선입견이 성령의 조명 아래 산산조각 난 것입니다. 베드로 눈에는 '부정한 이방인'이었으나, 하나님의 눈에는 고넬료는 '준비된 영혼'입니다. 이런 상황에서는 먼저 성령의 설득이 임합니다. 베드로가 변한 것은 그의 의지가 아니라, 보자기 환상과 성령의 세밀한 음성에 순종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사람을 볼 때 "이 사람은 이래서 안 돼, 저 사람은 저래서 힘들어"라고 내 기준의 잣대를 들이대고 있지는 않습니까? 성령의 능력은 우리로 하여금 사람의 외모(조건, 배경, 과거)가 아닌 그 배후에 있는 하나님의 계획을 보게 합니다.

2. 성령과 능력으로 기름 부음 받은 예수(36-38절)

36 만유의 주 되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화평의 복음을 전하사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보내신 말씀
37 곧 요한이 그 세례를 반포한 후에 갈릴리에서 시작하여 온 유대에 두루 전파된 그것을 너희도 알거니와
38 하나님이 나사렛 예수에게 성령과 능력을 기름 붓듯 하셨으매 그가 두루 다니시며 선한 일을 행하시고 마귀에게 눌린 모든 사람을 고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함께 하셨음이라

베드로는 이제 자신이 아닌 '예수 그리스도'에게 초점을 맞춥니다. 38절을 보십시오. "하나님이 나사렛 예수에게 성령과 능력을 기름 붓듯 하셨으매 그가 두루 다니시며 선한 일을 행하시고 마귀에게 눌린 모든 사람을 고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함께 하셨음이라."

베드로가 변화된 비결은 바로 이 '성령의 능력과 성령의 기름 부음'의 원리를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조차도 공생애 사역을 하실 때 성령의 능력을 입어 마귀에게 눌린 자를 고치셨다면, 하물며 연약한 우리는 어떠하겠습니까? 베드로는 깨닫습니다. 자신이 고넬료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은 자신의 능력이 아니라, 예수님께 임했던 그 동일한 성령께서 지금 자신을 강권하여 이곳으로 밀어 넣으셨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성령의 능력은 성령의 기름 부음으로 이어집니다. 이는 성령 하나님이 지속적인 권능(권세)을 의미합니다.

유대인과 이방인의 원수 된 담을 허무는 화평은 인간의 외교적 노력이 아닙니다. 성령의 능력으로만 가능합니다. 오직 보혜사 성령의 은혜로 인한 것입니다. 이것이 화평의 복음(36절)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권능과 은혜 안에서 가능한 것입니다.

근대 선교의 아버지라 불리는 영국의 윌리엄 캐리(William Carey)에 대한 일화가 있습니다. 18세기 영국 교회는 "하나님이 이방인을 구원하시려면 우리가 가지 않아도 알아서 하실 것"이라는 완고한 예정론적 편견에 갇혀 있습니다. 이에 캐리가 인도로 가겠다고 했을 때, 한 노목사는 이렇게 호통칩니다. "이보게 젊은이, 하나님이 이교도를 개종시키고자 하신다면 자네나 우리 도움 없이도 하실걸세" 이것이 당시 영국 교회의 '기준'입니다. 하지만 캐리는 사도행전 10장의 베드로처럼 성령의 음성에 귀를 기울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위대한 일을 기대하라, 하나님을 위해 위대한 일을 시도하라" 그는 자신의 안락한 삶과 교회의 전통적 기준을 깨뜨리고 인도로 향합니다. 그는 인도인들을 '부정한 자'로 보지 않고 '복음이 필요한 하나님의 자녀'로 봅니다. 그의 이 '기준의 변화'가 현대 선교의 문을 여는 열쇠가 되도록 편견을 깨어 버립니다. 선교는 성령님이 주관하십니다.

3. 부활의 증인과 특별한 사명(39-43절)

39 우리는 유대인의 땅과 예루살렘에서 그가 행하신 모든 일에 증인이라 그를 그들이 나무에 달아 죽였으나
40 하나님이 사흘 만에 다시 살리사 나타내시되
41 모든 백성에게 하신 것이 아니요 오직 미리 택하신 증인 곧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신 후 그를 모시고 음식을 먹은 우리에게 하신 것이라
42 우리에게 명하사 백성에게 전도하되 하나님이 살아 있는 자와 죽은 자의 재판장으로 정하신 자가 곧 이 사람인 것을 증언하게 하셨고
43 그에 대하여 모든 선지자도 증언하되 그를 믿는 사람들이 다 그의 이름을 힘입어 죄 사함을 받는다 하였느니라

마지막으로 베드로는 부활의 확실성을 증언합니다. 41절을 보십시오. "모든 백성에게 하신 것이 아니요 오직 미리 택하신 증인 곧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신 후 그를 모시고 음식을 먹은 우리에게 하신 것이라." 부활하신 주님과 함께 음식을 먹었다는 것은 환상이 아닌 실제를 목격했다는 뜻입니다. 이는 누가복음 24장 말씀을 반복하여 강조하는 것입니다. 눅24: 49 “볼지어다 내가 내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을 너희에게 보내리니 너희는 위로부터 능력으로 입혀질 때까지 이 성에 머물라 하시니라”이는 하나님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은 성령을 말합니다.

이 성령인 '아버지의 약속'은 요한복음 14:16, 26에서 언급된 동일한 보혜사 성령을 의미합니다. 동시에 사도행전 1:4-5,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 너희는 몇 날이 못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 요엘 2:28-29, 말세에 남종과 여종에게 **영(성령)**을 부어주시겠다는 하나님의 약속과, 사도행전 1:8, 성령의 권능과 증인된 삶과, 사도행전 2:1-4, 오순절 날 성령이 각 사람 위에 임함과, 이방인 선교의 동력이 성령의 주권적인 역사임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우리 시대는 성령 시대입니다. 성령 하나님과 기도로 동행하므로 성령 하나님의 은혜가 충만한 우리들이 되어야 합니다.

재판장으로 정하신 자(42절)는 성자 하나님 예수님을 말합니다. 예수님은 단순히 좋은 스승이 아니라 산 자와 죽은 자의 재판장이 되십니다. 우리 인생의 최종 심판 기준은 세상의 법이나 내 양심이 아니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마태복음 28:18-20, 18. 예수께서 나아와 말씀하여 이르시되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19.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20.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예수 그 이름을 힘입는 자는 죄사함(43절)을 다 받습니다. 베드로는 이방인 고넬료에게 "너희도 예수의 이름을 힘입으면 죄사함을 받는다"고 선포합니다. 이는 유대인의 특권을 완전히 내려놓고 복음의 보편성을 선언한 역사적 순간입니다.

오늘 본문의 주인공 베드로는 누구입니까? 그는 부활하신 주님을 직접 만났고, 갈릴리(디베랴) 바닷가에서 "내 양을 먹이라"는 사명을 예수님으로부터 다시 받은 사람입니다. 하지만 오늘 사도행전 10장에 이르기까지 베드로는 여전히 '유대인'이라는 틀과 '율법적 기준'이라는 견고한 성벽 안에 갇혀 있습니다. 부활을 경험한 사도 베드로조차도 단번에 완성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 역시 예수님을 믿고 부활의 소망을 가졌지만, 삶의 구석구석에는 여전히 내 고집, 내 경험, 내가 정해놓은 '깨끗함과 속됨'의 기준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이에 주님께서는 이방인 고넬료와의 만남을 앞두고 베드로에게 보자기에 싸인 부정한 짐승 환상을 보여주시며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 깨끗하게 하신 것을 네가 속되다 하지 말라(행10:15)." 오늘 말씀은 바로 그 환상 이후, 베드로가 고넬료의 집에 도착하여 자신의 기준이 무너지고 오직 주님의 기준만이 세워졌음을 고백하는 장엄한 선포입니다.

20세기 성령 강림의 역사인 미국 LA 아주사 거리(1906)와 인도네시아 부흥(1965)은 교회사에서 매우 중요한 사건들입니다. 이외에도 1907년 한국 평양 대부흥 운동이 있습니다. 평양 장대현교회에서 사경회 도중, 길선주 장로의 공개적인 죄 고백을 시작으로 성령의 강한 임재가 나타납니다. 이 사건으로 평양은 '동방의 예루살렘'이라 불리어 지고, 당시 평양 부흥회는 전세계에 대서특필로 보도됩니다.

웨일스 대부흥 (1904~1905년, 영국)은 평범한 청년 이반 로버츠의 기도를 통해 웨일스 전역에 성령의 불길이 번집니다. 얼마나 강력했는지 광부들이 욕설을 멈추자, 욕설 섞인 명령만 알아듣던 조랑말들이 말을 듣지 않아 광산 운영이 힘들었다는 일화가 유명합니다. 술집이 문을 닫고 법원에 범죄 사건이 접수되지 않는 등 사회 전체가 변합니다. 단순한 감정적 고조가 아니라, 도둑질한 물건을 돌려주고 원수를 용서하는 등 도덕적 갱신과 철저한 회개가 동반됩니다.

헤브라이디스 부흥(1949~1952년, 스코틀랜드)은 20세기 중반, 스코틀랜드 북서쪽 외딴 섬에서 일어난 신비로운 역사입니다. 두 명의 눈먼 노자매가 부흥을 위해 기도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던컨 캠벨 목사가 설교할 때 성령이 마을 전체를 뒤덮습니다. 교회에 가지 않은 사람들도 길을 가다가 갑자기 죄를 깨닫고 길가에 무릎을 꿇었으며, 마을 술집에 앉아 있던 사람들이 이유 없이 통곡하며 교회로 달려왔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아스버리 부흥 (1970년 그리고 2023년, 미국) 이는 가장 최근의 사례로 유명한 아스버리 대학교의 부흥입니다. 평범한 대학 채플 시간이 끝난 뒤에도 학생들이 떠나지 않고 기도하기 시작하여, 낮과 밤을 가리지 않고 수주 동안 찬양과 회개가 이어집니다. 인위적인 프로그램 없이 오직 '성령의 임재'만으로 수만 명이 몰려든 사례입니다.

이러한 사례들을 보면 공통점이 있습니다. 바로 '간절한 기도'와 '철저한 회개'가 성령 강림의 통로가 되었다는 점입니다. 우리 조국 대한민국도 철저와 회개와 기도가 절실한 시점입니다. 눈물로 간구하며 우리 공동체의 죄악을 철저히 회개해야 합니다. 부정과 불법의 만연, 마약 창궐, 창조질서를 파괴하는데 교회가 침묵하고 있습니다. 가슴을 찢어 회개할 때 성령의 부흥 역사는 단순한 '이벤트'가 아니라, 마치 거대한 파도가 밀려와 한동안 머물며 지형을 바꿔놓는 것과 같을 것입니다.

성령 강림은 오순절 다락방처럼 특정 시간에 강력하게 임하는 '사건'으로 시작되지만, 그 결과는 제자들이 순교하기까지 평생 지속된 '삶의 변화'로 나타나게 됩니다. 고넬료의 가정 역시 그날의 성령 체험 이후 온 가족이 기독교 공동체의 핵심으로 거듭납니다. 부흥이 수개월에서 수년간 지속되는 이유는 성령이 한 개인을 넘어 공동체와 사회 전체의 구조를 다루시기 때문입니다. 웨일스 부흥은 약 1년 이상 뜨겁게 지속되며 10만 명 이상이 회심했고, 술집이 문을 닫는 등의 사회적 변화가 고착화되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아주사 거리 부흥은1906년부터 약 3년 넘게 매일 집회가 이어집니다. 이 긴 시간 덕분에 전 세계로 선교사들이 파송될 수 있는 에너지가 축적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성령을 약속하실 때 "그가 너희와 영원토록 함께 있게 하리니"(요한복음 14:16)라고 말씀하십니다. 성령은 잠시 방문했다 떠나는 손님이 아니라, 우리 안에 거처를 삼고 머무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공부를 많이 하거나 신분이 높은 사람만이 아니라, 글을 모르는 노인이나 가난한 노동자도 성령을 받으면 '하나님의 증인'이 되어 당당하게 복음을 전합니다.
고넬료라는 로마 장교와 베드로라는 어부가 성령 안에서 하나가 되었듯, 전세계 믿음의 자매들이 성령을 통해 자존감을 회복하고 삶의 태도를 바꾸면서 근본적인 변화가 일어난 것입니다. 이처럼 오순절 성령 역사는 단순히 '뜨거운 예배'에 그치지 않고, 인간의 존엄성을 회복시키고 사회의 어두운 곳을 정화하는 실질적인 능력으로 나타납니다. 성령의 역사는 고넬료(군인), 베드로(어부), 바울(사도), 지성인, 일반인 신분과 지식을 초월하여 동일하게 임합니다. 특히 "위로부터 입혀지는 능력"은 지식인에게는 '겸손'을, 소외된 자에게는 '자존감'을 불어넣어 세상을 변화시킵니다.

부활의 주님을 만난 베드로를 다시 변화시키신 성령님은 오늘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역사하십니다. 우리는 자기 자신의 기준 '보자기'를 주님 앞에 내려놓아야 합니다. 내가 절대로 용서할 수 없는 사람, 내가 절대로 함께할 수 없다고 그어놓은 선이 있습니까? 주님은 오늘 그 보자기를 거두시며 "내가 깨끗하다 한 것을 네가 속되다 하지 말라"고 명령하십니다.

성령의 기름 부어주심을 사모해야 합니다. 내 힘으로 변화되려 하면 지치고 낙심합니다. 베드로가 성령의 능력으로 입을 열었을 때 고넬료의 온 집안이 구원을 얻었듯이 (행10:44),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성령의 권능입니다. 우리는 '선택된 증인'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41절 말씀처럼 우리는 미리 택함 받은 증인입니다. 세상이 정치적으로 매우 혼란스럽고 경제적 위기가 닥쳐와도, 우리 인생의 최종 재판장은 주님 이십니다. 그 주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며 우리를 통해 새로운 역사를 써 내려가실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성령의 능력으로 다시 일어나야 합니다. 베드로는 고넬료의 집에서 복음을 전하며 비로소 완성된 사도로 거듭납니다. 부활을 경험한 이후에도 여전히 머뭇거리던 베드로를 성령님은 이방인의 안방까지 몰아넣으셨고, 그곳에서 하늘 문이 열리는 것을 보게 하십니다. 성령의 역사하심은 우리 편견이 깨지고 주님의 기준이 세워지는 그곳으로 이 곳이 바로 기적의 시작점입니다.

제 자신을 돌아볼 때 얼마나 형편없이 살아왔는가를 생각하면 부끄러워서 어떻게 해야 할지 몸둘바를 모를 정도입니다. 회개할 제목만 가득한 자신을 발견하게 됩니다. 더욱 겸손하게 자신을 돌아보면서, 성령 하나님의 인도함을 받도록 주님과 시간을 정하여 교제하는 은혜가 절실해 집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번 한 주간, 우리 모두 외형이나 외모가 아닌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의 눈을 소유하길 바랍니다. 마귀에게 눌린 세상을 고치셨던 예수님의 성령의 능력이 우리의 사업장에, 우리 가정에, 우리 모두에게 충만하길 강권합니다. 우리는 부활의 증인이 되어야 합니다. 오직 예수의 이름을 힘입어 승리하시는 복된 삶이 되어야 합니다. 말씀을 전하는 자가 어떠하든 하나님 말씀은 살아 역사하는 운동력이 있습니다. 성령 하나님의 능력과 은혜가 개별적으로 역사하시는 우리 모두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 삶이 예배가 되어야 합니다. 삶의 현장은 우리를 예배하는 자로 초대하고 있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주님, 나의 좁은 경험과 편견으로 사람을 판단하고 정죄했음을 회개합니다. 하나님이 깨끗하다 하신 것을 속되다 하지 않는 겸손한 마음을 주옵소서.

우리에게 성령과 능력을 기름 붓듯 부어 주옵소서. 내 힘이 아닌 성령의 능력으로 세상의 벽을 허물고 화평의 복음을 전하는 증인이 되게 하옵소서.

부활하신 주님과 함께 먹고 마신 자들처럼, 우리 삶의 모든 현장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주인이심을 담대히 선포하게 하옵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