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의 법을 성취하는 공동체
갈라디아서 6:1-10
1 형제들아 사람이 만일 무슨 범죄한 일이 드러나거든 신령한 너희는 온유한 심령으로 그러한 자를 바로잡고 너 자신을 살펴보아 너도 시험을 받을까 두려워하라
2 너희가 짐을 서로 지라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라
3 만일 누가 아무 것도 되지 못하고 된 줄로 생각하면 스스로 속임이라
4 각각 자기의 일을 살피라 그리하면 자랑할 것이 자기에게는 있어도 남에게는 있지 아니하리니
5 각각 자기의 짐을 질 것이라
6 가르침을 받는 자는 말씀을 가르치는 자와 모든 좋은 것을 함께 하라
7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업신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
8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질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
9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포기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
10 그러므로 우리는 기회 있는 대로 모든 이에게 착한 일을 하되 더욱 믿음의 가정들에게 할지니라
한국인들에게 영어는 배우기가 쉽지 않습니다. 어순이나 발성의 호흡방식이 다른 것이 가장 큰 요인일 겁니다. 고등학교 1학년 때 독일어, 불어를 동시에 배웠습니다. 그런데 독일어에는 명사 앞에 붙는 '정관사'라는 것이 각각 따로 있습니다. 남성에게는 'Der(데르)', 여성에게는 'Die(디)', 중성에게는 'Das(다스)'가 붙습니다. 이는 영어에 공통으로 적용되는 정관사 the와 유사합니다. 독일어 정관사는 뒤에 오는 명사의 성격을 규정하며, 결코 서로 뒤섞이지 않습니다. 독일어는 단어마다 그 성을 알아야만 말을 할 수가 있습니다. 남성 명사에 여성 정관사를 붙이면 그것은 틀린 문장이 됩니다.
우리의 영적인 삶도 이와 같아야 합니다. 오늘 사도 바울의 말씀은 갈라디아 성도들에게 우리 인생의 '관사'를 어디에 고정해야 하는지를 가르쳐 줍니다. 우리가 '육체'라는 관사를 붙이고 사는지, 아니면 '성령'이라는 관사를 붙이고 사는지에 따라 그 결과는 하늘과 땅 차이로 달라집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다 보면 두 가지 큰 영적 위기를 만납니다. 하나는 타인의 허물을 보았을 때 찾아오는 '정죄의 유혹'이고, 또 하나는 자신이 스스로 무언가 된 줄로 착각하는 '교만의 독소'입니다. 우리는 오늘 말씀을 통해, 어떻게 하면 나를 감추고 예수님의 영광만을 드러내는 '성령의 사람'으로 거듭날 수 있을지 그 길을 찾아보고자 합니다.
1. 온유한 심령과 자기 살핌(1-5절)
1 형제들아 사람이 만일 무슨 범죄한 일이 드러나거든 신령한 너희는 온유한 심령으로 그러한 자를 바로잡고 너 자신을 살펴보아 너도 시험을 받을까 두려워하라
2 너희가 짐을 서로 지라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라
3 만일 누가 아무 것도 되지 못하고 된 줄로 생각하면 스스로 속임이라
4 각각 자기의 일을 살피라 그리하면 자랑할 것이 자기에게는 있어도 남에게는 있지 아니하리니
5 각각 자기의 짐을 질 것이라
공동체 안에서 누군가의 범죄나 허물이 드러날 때, 소위 '신령하다'고 자부하는 사람들이 범하기 쉬운 실수가 있습니다. 바로 비판의 칼을 휘두르는 것입니다. 그러나 1절은 엄중히 경고합니다. "온유한 심령으로 그러한 자를 바로잡고 너 자신을 살펴보아 너도 시험을 받을까 두려워하라." 롬2:1, 그러므로 남을 판단하는 사람아, 누구를 막론하고 네가 핑계하지 못할 것은 남을 판단하는 것으로 네가 너를 정죄함이니 판단하는 네가 같은 일을 행함이니라.
서양 격언에 "타인의 허물은 눈앞에 두고, 자신의 허물은 등 뒤에 둔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남의 잘못은 망원경으로 보고, 내 잘못은 현미경으로도 보지 않으려는 속성이 있습니다.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를 빼내려 하기 전에,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를 먼저 깨달으라." 마태복음7:3-5, 3.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4. 보라 네 눈 속에 들보가 있는데 어찌하여 형제에게 말하기를 나로 네 눈 속에 있는 티를 빼게 하라 하겠느냐. 5. 외식하는 자여 먼저 네 눈 속에서 들보를 빼어라 그 후에야 밝히 보고 형제의 눈 속에서 티를 빼리라.
이런 말씀은 예수님께서 우리들에게 주신 가장 강력한 '자기 살핌'의 잠언입니다.
온유한 심령, 이는 성령의 열매입니다. 갈5:22에 등장하는 성령의 9가지 열매 사랑, 희락, 화평, 오래 참음, 자비, 양선, 충성, 온유, 절제 중에 하나인 ‘온유’한 심령을 말합니다. 정죄는 육체의 정관사이지만, 회복은 성령의 정관사인 것입니다. 타인의 허물은 내가 비판할 기회가 아니라, 내가 온유함을 연습할 기회입니다.
그리스도의 법(2절), 이는 서로 짐을 지는 것이 곧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는 것이라 말합니다. 주님은 우리의 죄짐을 대신 지셨습니다. 리더나 인플루언서나 우리가 공동체에서 할 일은 높은 곳에서 훈계하는 것이 아닙니다. 연약한 자의 짐 아래로 자신의 어깨를 밀어 넣어 대신 지는 것입니다. 진정한 리더는 결단력만큼 겸손으로 그 마음을 얻어야 합니다.
2절 말씀인 '너희가 짐을 서로 지라'는 구절을 묵상할 때, 떠오르는 엄한 어머니들의 모습이 있습니다. 자식이 큰 잘못을 저지르면 종아리를 호되게 치신 후, 그 자식 앞에서 당신의 치마를 걷어 올리고 똑같이 어머니 자신의 종아리에 매질을 하시던 어머니들입니다. 자식은 그 순간 알게 됩니다. '아, 내 잘못이 나 혼자만의 문제가 아니구나. 어머니께서 내 고통과 내 죄의 책임을 저렇게 대신 짊어지고 계시는구나.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는 자식을 사랑하는 비밀입니다. 리더는 형제의 허물을 보고 회초리만 드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 회초리를 내 종아리에도 내리치며, 그 아픔의 무게를 함께 짊어지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를 비판하는 보좌에 앉아 계시지 않고, 우리와 함께 채찍질 당하는 자리로 내려오셨습니다. 우리가 서로의 짐을 이렇게 나누어 질 때, 우리 공동체는 정죄의 감옥이 아니라 부활의 생명이 꽃피는 에덴이 될 것입니다.
3절의 말씀은 우리 가슴을 찌릅니다. "만일 누가 아무것도 되지 못하고 된 줄로 생각하면 스스로 속임이라." 고린도전서 10장 12절 말씀처럼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해야" 합니다. 배우는 자는 가르치는 자를 보며 교만하지 말고, 가르치는 자는 가르친다는 위치 때문에 스스로를 대단하게 여기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모두 주님의 은혜 없이는 한 순간도 살 수 없는 '용서받은 죄인'일 뿐이기 때문입니다.
에이브러햄 링컨 대통령이 백악관에서 자신의 구두를 직접 닦고 있을 때, 한 비서관이 다가와 놀라며 묻습니다. "대통령님, 아니 대통령께서 직접 자신의 구두를 닦으십니까?" 그러자 링컨이 미소 지으며 되묻습니다. "그럼, 남의 구두를 닦아줘야 한단 말인가요?" 링컨은 대통령이라는 거대한 위치에 올랐지만, 그는 그 자신을 '구두를 닦는 한 인간' 이상으로 보지 않습니다. 자신이 무엇이 된 줄로 착각하는 순간, 국민을 섬기는 리더십이 끝난다는 것을 그는 잘 알고 있습니다. 그는 매일 아침 거울 앞에서 "나는 아무것도 아니며,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이 자리에 있다"고 성찰했다고 합니다.
이탈리아 출신 20세기 당대 최고의 지휘자 아르투로 토스카니니(Arturo Toscanini, 1867~1957)는 완벽주의자로 유명합니다. 오케스트라 단원들이 그를 찬양할 때마다 늘 이렇게 외쳤다고 합니다. “나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여러분도 아무것도 아닙니다. 오직 베토벤(작곡가)만이 모든 것입니다.” 리더가 되고 가르치는 자가 되었을 때 토스카니니처럼 외쳐야 합니다. '나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오직 예수님만이 모든 것입니다' 내가 무언가 된 줄로 생각하며 대접받으려 하는 순간, 우리는 주님의 권세와 은혜를 무시하는 서툰 지휘자가 되고 말 것입니다. '누가 아무것도 되지 못하고 된 줄로 생각하면 스스로 속임이라.' 세계적인 지휘자 토스카니니는 박수갈채 속에서도 '나는 아무것도 아니다. 오직 작곡가만이 전부다'라고 외칩니다. 링컨 대통령은 백악관에서도 자신의 구두를 닦으며 '나는 구두를 닦는 평범한 인간일 뿐'임을 잊지 않습니다.
진짜 위기는 실패할 때 오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무언가 되었다고 착각할 때 찾아온다고 합니다. 그때 이들은 하나님을 조롱하고(7절) 형제의 짐을 무시하게 됩니다.
'텐트 메이커'로 살아가는 우리들은 비즈니스에서 성공하고 주변으로부터 존경을 받을 때 더욱 주의해야 합니다. 우리는 그저 구멍 난 바구니처럼 매일 주님의 은혜로 씻겨져야만 하는 존재일 뿐임을 심령에 조각해야 합니다. 내가 '아무것도 아님(Nothing)'을 고백할 때, 울부짖을 때, 우리 안에서 '모든 것(Everything)'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이 드러날 것입니다.
2. 가르침의 선순환과 심음의 법칙(6-8절)
6 말씀을 배우는 사람은 가르치는 사람과 모든 좋은 것을 같이 나누어야 합니다.
7 자기를 속이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조롱을 받으실 분이 아니십니다. 사람은 무엇을 심든지, 심은 대로 거둘 것입니다.
8 자기 육체의 욕망을 따라 심는 사람은 육체로부터 썩을 것을 거두고, 성령의 뜻을 따라 심는 사람은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둘 것입니다.
6절은 특별히 공동체 안에서의 관계를 다룹니다. "가르침을 받는 자는 말씀을 가르치는 자와 모든 좋은 것을 함께 하라." 이는 영적 소통으로 가르치는 자는 지식을 자랑하지 않고, 배우는 자는 가르치는 자의 수고를 귀히 여기며 영육 간의 좋은 것을 나누어야 합니다. 이것은 보상의 개념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몸' 안에서 흐르는 은혜의 순환입니다.
하나님을 업신여김(7절)은 우리 모두가 가장 경계해야할 초점입니다. 사도 바울은 여기서 '심음의 법칙'을 꺼내 듭니다. 겉으로는 경건한 척하면서 속으로는 자신의 유익과 교만을 심는 자들은 결국 하나님을 조롱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중심을 보십니다.
자기 자신을 위하여 교만과 자랑을 심는 자는 썩어질 것을 거둡니다. 그러나 성령을 위하여 겸손과 섬김을 심는 자는 영생을 거두게 될 것입니다. 비즈니스 현장에서 tentmaker로 살아가는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나의 성과를 자랑하기 위해 일한다면 그것은 육체를 위해 심는 것입니다. 이 일을 통해 주님의 영광이 드러나길 구하며 낮아진다면 그것은 성령을 위해 심는 것입니다.
18세기 경건주의 운동의 지도자였던 진첸도르프(Zinzendorf, 1700-1760) 백작이 있습니다. 그는 귀족의 신분과 막대한 재산을 가졌지만, 오직 복음을 위해 모라비안 공동체를 섬깁니다. 어느 날, 한 방문객이 공동체의 아름다운 질서와 헌신을 보고 감탄하며 그에게 묻습니다. "이 모든 위대한 일을 계획하고 이끈 리더가 누구입니까? 그의 이름을 칭송하고 싶습니다." 그때 진첸도르프는 이렇게 대답합니다. "이곳에 사람의 이름은 없습니다. 오직 죽임 당하신 어린양의 이름만 있을 뿐입니다. 나는 그분의 종일 뿐이며, 내 이름은 잊혀도 좋습니다."
Die Losungen(디 로중엔)은 독일어입니다. 독일의 헤른후트(Herrnhut) 공동체에서 시작된 300년 전통의 매일 묵상집(성경 구절집)을 뜻합니다. 독일어는 명사의 성별에 상관없이 복수형이 되면 정관사가 무조건 die로 통일됩니다. 모라비안 성도들은 매일 아침 '로중엔' 말씀을 제비뽑아 받습니다. 왜 제비뽑기일까요? 그것은 "내가 읽고 싶은 말씀을 고르는 교만"마저 내려놓기 위함입니다. "하나님이 오늘 나에게 주시는 말씀이라면 그것이 책망이든 위로든 수동적으로 순종하겠다"는 그 철저한 자기 비움이 그들을 300년 동안 평강의 길로 인도합니다. 1735년 대서양의 폭풍 속에서 감리교 창시자 요한 웨슬리는 죽음의 공포에 떨었지만, 동승한 모라비안 교도들은 배가 파산하는 폭풍에도 평온하게 찬송합니다. 그 평강의 힘은 어디서 나왔을까요? 그들은 그날 아침에도 '로중엔' 말씀을 통해 성령의 인도를 심었기 때문입니다. 폭풍이라는 현실보다,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이라는 실재를 더 신뢰했던 그들은 죽음의 공포 속에서도 찬양할 수 있었습니다. 모라비안 공동체가 100년 넘게 24시간 연속 기도를 이어가고, 300년 동안 말씀을 발행할 수 있었던 비결은 당장의 열매보다 '하나님의 때'를 신뢰하며 낙심을 이겨냈기 때문입니다.
3. 낙심을 이기는 인내와 기회(9-10절)
9.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포기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
10. 그러므로 우리는 기회 있는 대로 모든 이에게 착한 일을 하되 더욱 믿음의 가정들에게 할지니라
겸손하게 섬기고 선을 행하다 보면 찾아오는 불청객이 있습니다. 바로 낙심입니다. "나만 손해 보는 것 아닌가?", "왜 나만 낮아져야 하는가?"라는 육체의 소리가 들려옵니다.
9절은 선포합니다.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포기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 이때가 성령의 타이밍입니다. 거두는 때는 내가 정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정하십니다. 이 때가 기회입니다. 바울은 '기회 있는 대로' 선을 행하라고 합니다. 특히 믿음의 가정들에게 더욱 그렇게 하라고 권면합니다. 공동체 안에서 서로 낮아져 섬기는 훈련이 되어야 세상 밖에서도 그리스도의 향기를 발산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안질(눈병)과 시력 장애가 있었습니다. 갈라디아서 4장 15절에서 "너희의 눈이라도 빼어 나에게 주었으리라"는 표현과, 6장 11절에서 "큰 글자로 쓴 것을 보라"는 언급이 그 근거가 됩니다. 언어 장애, 말의 졸함, "말에는 부족하나"(고후 11:6)라는 표현을 근거로 심한 말더듬이나 설득력 없는 말투를 바울의 육체의 약함으로 보기도 합니다. 바울에게는 그런 것들이 "남들이 보기에 멸시할 만하거나 복음 전파에 걸림돌이 될 정도로 외견상 좋지 않은 상태"였음은 분명해 보입니다. 그럼에도 갈라디아 교인들이 그를 '천사와 같이' 영접했다는 점이 바울에게는 큰 감동이 됩니다.
사도 바울이 하도 괴로워서 자신의 병을 고쳐달라고 세 번이나 간절히 기도했을 때 하나님께서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고린도후서12:9)라는 답변을 바울은 받습니다. 바울은 그토록 괴로운 질병을 고쳐달라고 세 번이나 간절히 매달렸지만, 하나님은 병을 고쳐주시는 대신 '관점의 변화'를 주셨습니다. 바울은 이 응답을 통해 중요한 원리를 깨닫게 됩니다. ‘약함이 곧 강함이 된다는 것’을 말입니다. 바울이 육체적으로 너무 완벽했다면 자신의 능력이라 착각했을 수도 있습니다. 몸이 아프고 약했기 때문에 오히려 그리스도의 능력이 자신에게 머물며 역사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엄청난 영적 체험과 계시를 받은 바울이 자만하지 않도록 하나님께서 주신 '안전장치'가 바로 그 질병이었다고 고백합니다.
우리에게도 바울처럼 말로 다할 수 없는 고통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럴수록 이런 우리의 약함을 통해 드러내시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는 우리들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의 연약함을 모두 들고 나아가 간구하며, 하나님의 뜻을 묻고 도전하는 우리들, 이루어질 것을 확신하면서 기도로 동행하는 우리들이 되어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의 수고가 당장 인정받지 못한다고 해서 교만의 길로 돌아가지 않아야 합니다. 포기하지 않고 겸손의 씨앗을 계속 심는다면, 하나님의 때에 반드시 영생의 열매, 생명의 열매를 거두게 될 것입니다. 나를 죽이고 성령의 도우심으로 살아야 합니다. 갈라디아서 6장은 우리에게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는 구체적인 삶의 자세를 가르쳐줍니다.
1. 서로의 짐을 져야 합니다. 정죄 대신 온유함을, 비판 대신 격려를 선택하십시오. 그것이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는 길입니다.
2. 스스로 속이지 않아야 합니다. 무엇이 된 줄로 착각하는 교만을 십자가에 못 박아야 합니다. 우리는 오직 주님의 은혜로만 서 있는 자들입니다.
3. 끝까지 심어야 합니다. 육체의 자랑이 아닌 성령의 열매를 위해 오늘 하루도 겸손의 씨앗을 심어야 합니다. 낙심하지 않으면 반드시 거두게 됩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 앞에 어떤 정관사를 놓아야 할까요?
이번 한 주간, 우리는 가정과 일터에서 "나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주님이 전부이십니다" 라는 ‘진첸도르프’ 백작의 고백이 우리의 고백이 되길 원합니다. 가르치는 자와 배우는 자가 하나 되어 서로 발을 씻기며, 오직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만을 전적으로 드러내는 성령의 인도함을 받는 삶이 되어야 합니다. 결단을 위한 기도입니다.
1. 하나님, 무언가 된 줄로 착각했던 교만을 회개합니다. 타인의 허물을 정죄하기보다 저의 연약함을 먼저 살피게 하시고, 온유한 심령으로 서로의 짐을 나누어 지게 하옵소서.
2. 나의 이름을 드러내기 위해 육체의 것을 심지 않게 하시고, 오직 주님의 영광을 위해 성령의 씨앗을 심게 하옵소서. 당장 열매가 보이지 않아도 낙심하지 않고 끝까지 인내하게 하옵소서.
3. 공동체 안에서 가르치는 자와 배우는 자가 모든 좋은 것을 함께 나누며, 서로 낮아져 섬기는 천국 공동체를 이루게 하옵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