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자가의 흔적을 따르는 리더십
고린도전서 9:1-14
1. 내가 자유인이 아니냐 사도가 아니냐 예수 우리 주를 보지 못하였느냐 주 안에서 행한 나의 일이 너희가 아니냐
2. 다른 사람들에게는 내가 사도가 아닐지라도 너희에게는 사도이니 나의 사도 됨을 주 안에서 인친 것이 너희라
3. 나를 비판하는 자들에게 변명할 것이 이것이니
4. 우리가 먹고 마실 권리가 없겠느냐
5 .우리가 다른 사도들과 주의 형제들과 게바와 같이 믿음의 자매 된 아내를 데리고 다닐 권리가 없겠느냐
6. 어찌 나와 바나바만 일하지 아니할 권리가 없겠느냐
7. 누가 자기 비용으로 군 복무를 하겠느냐 누가 포도를 심고 그 열매를 먹지 않겠느냐 누가 양 떼를 기르고 그 양 떼의 젖을 먹지 않겠느냐
8. 내가 사람의 예대로 이것을 말하느냐 율법도 이것을 말하지 아니하느냐
9. 모세의 율법에 곡식을 밟아 떠는 소에게 망을 씌우지 말라 기록하였으니 하나님께서 어찌 소들을 위하여 염려하심이냐
10. 오로지 우리를 위하여 말씀하심이 아니냐 과연 우리를 위하여 기록된 것이니 밭 가는 자는 소망을 가지고 갈며 곡식 떠는 자는 함께 얻을 소망을 가지고 떠는 것이라
11. 우리가 너희에게 신령한 것을 뿌렸은즉 너희의 육적인 것을 거두기로 과하다 하겠느냐
12. 다른 이들도 너희에게 이런 권리를 가졌거든 하물며 우리일까보냐 그러나 우리가 이 권리를 쓰지 아니하고 범사에 참는 것은 그리스도의 복음에 아무 장애가 없게 하려 함이로다
13. 성전의 일을 하는 이들은 성전에서 나는 것을 먹으며 제단에서 섬기는 이들은 제단과 함께 나누는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14. 이와 같이 주께서도 복음 전하는 자들이 복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명하셨느니라
000 대통령 시절 ‘000’이라는 중앙정보부장(현재 국정원)이 있습니다. 한번은 대통령께 000 중앙정보부장이 업무 보고를 하는데, 자네는 왜 그렇게 말을 잘 못하는가? 라는 질책을 받습니다. 이에 000 부장이 “각하, 제가 알고 있는 것은 너무 많고 할말도 많아 그렇습니다.” 라고, 시간은 제한되어 있고 입이 따라가지 못해 그렇다고 해명했다는 말이 있습니다. 참고로 000대통령은 브리핑에 일가견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살펴볼 때, 바울은 사도로서 마땅히 대접받을 충분한 권리가 있습니다. 그는 주님을 직접 뵈었고, 고린도 교회를 개척한 영적 아버지입니다. 그러나 그는 오늘 본문에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내가 사도가 아니냐? 내가 자유인이 아니냐? 그러나 나는 이 모든 권리를 쓰지 아니하였노라." 왜 바울은 당연한 권리를 포기합니까? 그것은 바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보여주신 '자기 헌신의 길을 따르기 위함입니다. 우리는 바울의 고백을 통해, 우리 공동체를 위해, 우리 자신들을 위해 어떻게 먼저 낮아지고, 섬기고, 희생해야 하는지 그 본질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1. 당연한 권리를 복음 아래 복종시킴 (1-11절)
1. 내가 자유인이 아니냐 사도가 아니냐 예수 우리 주를 보지 못하였느냐 주 안에서 행한 나의 일이 너희가 아니냐
2. 다른 사람들에게는 내가 사도가 아닐지라도 너희에게는 사도이니 나의 사도 됨을 주 안에서 인친 것이 너희라
상대방의 감정을 건드릴 때 대부분은 폭발하게 됩니다. 요즘 말로 긁혔다고 할 때 반발합니다. 자존심이 침해를 당한다고 느낄 때 사람들은 강력하게 튀어 오릅니다. 사도 바울은 예수님의 12제자 중 하나가 아닙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12제자보다 더 전도와 선교에 앞장서서 헌신합니다. 바로 이런 시기에 사도 바울이 한 말이 오늘 본문입니다. 다만 사도 바울은 감정적으로 대응한 것이 전혀 아닙니다. 본인이 주를 위해 하나님 영광이 드러나도록 자신의 권리를 포기하므로 하나님 영광을 드러낸 것입니다.
내가 자유인이 아니냐? 나도 내 마음대로 하고 싶은 것이 없겠느냐? 하나님께서 우리 모두에게 자유를 주시지 않았느냐? 내가 모든 것을 버리고 헌신하는 것이 보이지 않느냐? 라고 사도 바울이 반박합니다.
(내가) 사도가 아니냐? 사도 바울은 주님의 3년 6개월 공생애 기간의 12제자는 아닙니다. 하지만 자신이 하는 사역을 보라는 것입니다. 자신이 12사도보다 못한 것이 있느냐? 자신이 누구보다도 선교와 전도에 목숨을 걸고 헌신하는 것이 보이지 않느냐?
(내가) 예수 우리 주를 보지 못하였느냐? 사도 바울은 12제자들처럼 옆에서 직접 주님과 공생 애를 보내지는 않았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12제자들처럼 같이 동거하면서 본적이 없습니다. 그럼 어떤 이유로 이렇게 주장할까요? 다메섹 도상에서 강권적으로 주님께서 바울을 만나 주신 것입니다. 당시 바울은 예수 믿는 자들을 잡아 옥에 쳐 넣을 일념으로 대제사장으로부터 공문을 받아 특별검사가 되어 광기를 부립니다. 닥치는 대로 잡아 가두고 핍박합니다. 예수를 믿는 자들을 잡아 옥에 가두는 것이 자신의 사명이었던 시절에 일어난 대사건으로 인한 주님과의 만남을 말합니다. 바울은 다메섹 도상(길위)에서 예수님께서 친히 그에게 나타나셔서 사울아, 사울아 네가 왜 나를 핍박하느냐?고 바울(당시 사울)에게 나타내 보이신 것입니다. 얼마나 그 사건이 강렬했는지 바울은 그 자리에서 앞을 보지 못하고 고꾸라집니다. 이 사건을 계기로 예수님을 직접 본 사울은 바울로 거듭나 사도가 됩니다. 이래서 바울 자신도 예수님을 직접 보았다고 본 그대로 강변하는 것입니다.
(내가) 주 안에서 행한 나의 일이 너희가 아니냐? 앞에 열거한 것 외에도 바울 자신이 전하는 복음을 너희가 듣고 변화를 받아 너희가 주님을 영접한 것이 증거가 아니냐? 병이 낫고, 기적이 일어나고, 투옥되어 간수가 지켜도 기도하고 찬양할 때 바울과 실라가 풀려나고 이런 것이 바울이 사도라는 명백한 증거가 아니냐? 바울은 ‘주 안에서 행한 그의 열매가 고린도 교인들 너희가 아니냐’라고 반박합니다. 극히 음란하고 타락한 고린도에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하는 교회가 세워진 것이 증거가 아닌가? 바울이 뿌린 씨앗이 자라게 하신 이가 하나님이시라는 데에서 사도의 적법성을 바울은 입증하고 있습니다. 다른 교회가 바울의 사도권 시비를 제기한다고 해도, 고린도 교회만은 그럴 수 없다는 것입니다.
3. 나를 비판하는 자들에게 변명할 것이 이것이니
4. 우리가 먹고 마실 권리가 없겠느냐
5 .우리가 다른 사도들과 주의 형제들과 게바와 같이 믿음의 자매 된 아내를 데리고 다닐 권리가 없겠느냐
6. 어찌 나와 바나바만 일하지 아니할 권리가 없겠느냐
7. 누가 자기 비용으로 군 복무를 하겠느냐 누가 포도를 심고 그 열매를 먹지 않겠느냐 누가 양 떼를 기르고 그 양 떼의 젖을 먹지 않겠느냐
8. 내가 사람의 예대로 이것을 말하느냐 율법도 이것을 말하지 아니하느냐
9. 모세의 율법에 곡식을 밟아 떠는 소에게 망을 씌우지 말라 기록하였으니 하나님께서 어찌 소들을 위하여 염려하심이냐
10. 오로지 우리를 위하여 말씀하심이 아니냐 과연 우리를 위하여 기록된 것이니 밭 가는 자는 소망을 가지고 갈며 곡식 떠는 자는 함께 얻을 소망을 가지고 떠는 것이라
11. 우리가 너희에게 신령한 것을 뿌렸은즉 너희의 육적인 것을 거두기로 과하다 하겠느냐
바울은 12제자 출신의 사도가 아닙니다. 그런데 12제자 출신의 사도들보다 열매가 훨씬 많습니다. 이에 바울은 시기를 받습니다. 사람들이 웅성거립니다. 바울 쟤는 12사도가 아니잖아? 고린도후서를 보면 바울은 외형적으로는 매력적이지 않아 보입니다. 그는 말도 유창하지 안았고, 안짱 다리에, 대머리에 볼품도 별로 없어 보입니다. 당시 고린도에서 사역할 때 사도 바울은 40중반 정도 되었을 것입니다. 아직 젊고 경험이 많지 않을 때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사도로서 할말은 해야 한다고 판단하여 작심하고 예수님의 사도로서 나섭니다.
왜 사도 바울은 이렇게 반박하고 강변할까요? 그가 겸손하지 않아서일까요? 아님 본래 기질대로 믿는 자들을 잡아 넣는 무례한 본성이 재 발동되어 그럴까요? 아닙니다. 복음이라는 진리의 정수를 드러내고자 작심하므로 그렇게 실천하는 것입니다. 바울 자신의 양심이 그를 그렇게 불러냅니다.
바울은 4절부터 11절까지 자신이 누릴 수 있는 권리들을 조목조목 나열합니다.
"우리에게 먹고 마실 권리가 없겠느냐?" (4절)
"다른 사도들처럼 아내를 데리고 다닐 권리가 없겠느냐?" (5절)
"일하지 아니할 권리가 없겠느냐?" (6절)
“누가 자기 비용으로 군 복무를 하겠느냐? (7정)
“누가 포도를 심고 그 열매를 먹지 않겠느냐? (7절)
“누가 양 떼를 기르고 그 양 떼의 젖을 먹지 않겠느냐? (7절)
“내가 사람의 예대로 이것을 말하느냐 율법도 이것을 말하지 아니하느냐 (8-10절)
“너희에게 신령한 것을 뿌렸은즉 너희의 육적인 것을 거두기로 과하다 하겠느냐 (11절)
9,10절은 신명기 25:4관련 말씀으로, “곡식 떠는 소에게 망을 씌우지 말지니라” 이는 탈곡을 돕는 소도 먹으면서 일을 도울 수 있도록, “곡식을 밟아 떠는 소에게 망을 씌우지 말라”는 것은 하나님의 지극한 긍휼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생명을 구하는 사도는 말할 것도 없지 않느냐고 바울이 자신의 입장을 강변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군인이 자기 비용으로 복무하지 않고, 농부가 열매를 먹는 것이 당연하듯 사역자가 공동체로부터 부양받는 것은 율법으로나 상식으로나 정당한 권리임을 역설합니다. 신령한 것 즉 믿음을 뿌려 영접한 이들에게 구원에 이르게 해 주었으므로 육적인 것, 즉 물질을 받는다고 그것이 과하다고 말할 수 있느냐? 조금도 양심적으로 부끄러울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여기서 멈추지 않습니다.
그는 이 '권리'보다 더 소중한 가치가 있음을 역설합니다. 그것은 바로 '복음의 진보'입니다. 리더는 "내가 무엇을 받을 수 있는가?"를 묻는 사람이 아니라, "내가 무엇을 포기해야 공동체가 살아나는가?"를 묻는 사람입니다. 세상의 일반적인 리더들은 자기 배를 채우기 위해 타인을 이용하지만, 하나님의 리더는 타인을 살리기 위해 자기 권리를 십자가에 못 박습니다. 이럴 때 진정한 리더가 될 수 있습니다. 자신을 험지에, 어려움에 던질 때 하나님 영광을 드러내게 됩니다.
2. 장애물이 되지 않기 위한 자기 비움 (12-13절)
12. 다른 이들도 너희에게 이런 권리를 가졌거든 하물며 우리일까보냐 그러나 우리가 이 권리를 쓰지 아니하고 범사에 참는 것은 그리스도의 복음에 아무 장애가 없게 하려 함이로다
13. 성전의 일을 하는 이들은 성전에서 나는 것을 먹으며 제단에서 섬기는 이들은 제단과 함께 나누는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12절은 오늘 본문의 핵심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 권리를 쓰지 아니하고 범사에 참는 것은 그리스도의 복음에 아무 장애가 없게 하려 함이로다." 바울은 자신이 사례를 받는 것이 혹여나 복음을 전파하는 데 걸림돌이 될까 봐 스스로 '텐트 메이커'가 되어 노동하며 복음을 전합니다. 리더가 공동체에 요구하기 시작하면, 사람들은 리더의 '말'이 아니라 리더의 '욕심'으로 보게 됩니다.
우리는 힘들 때 예수님을 바라 보아야 합니다. 주님은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셨습니다(빌2:6-7). 십자가는 주님의 '권리 포기'가 정점에 달한 자기 비움입니다. 온 인류를 죄에서 구원하시기 위해 성자 하나님께서 창조주로서의 권리를 버리시고 피조물의 손에 못 박히신 것입니다. 내가 낮아질 때 비로소 그리스도가 높아지며, 내가 죽을 때 공동체가 살아납니다.
중국 내지 선교의 개척자 허드슨 테일러(Hudson Taylor, 1832-1905)는 중국 선교를 위해 모른 것을 내려 놓습니다. 그는 영국 신사로서 누릴 수 있는 모든 권위를 내려놓고 중국인들과 똑같이 변발을 하고 중국 옷을 입습니다. 한번은 그가 강을 건너기 위해 배를 기다리고 있는데, 부유한 중국인이 나타나 테일러를 서양인이라 무시하며 먼저 배에 타려고 그를 밀쳐 진흙탕에 빠뜨립니다. 테일러는 충분히 화를 내고 자신의 신분을 이용해 항의할 수 있지만, 그는 묵묵히 일어나 진흙을 닦으며 미소 짓습니다. 그 광경을 본 중국인들이 큰 충격을 받습니다. "어떻게 저 서양인은 화를 내지 않는가?" 테일러는 그 기회를 빌려 복음을 전합니다. 그는 자신의 '존중받을 권리'를 포기함으로써 '복음이 전해질 통로'를 엽니다. 이런 것이 바울이 말한 "복음에 아무 장애가 없게 하려 함"의 실천입니다.
3. 복음의 빚진 자로서의 솔선수범 (14절)
14. 이와 같이 주께서도 복음 전하는 자들이 복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명하셨느니라
14절에서 주님은 "복음 전하는 자들이 복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고 명하셨습니다. 이것은 공동체의 의무입니다. 진정한 리더의 미덕은 그 의무를 당연시하지 않는 데 있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이 디베랴 바닷가에서 제자들에게 나타나셨을 때를 기억해야 합니다. 주님은 부활의 영광을 누리며 대접받으신 것이 아니라, 밤새 고기 잡느라 지친 제자들을 위해 직접 숯불을 피우고 생선을 구우십니다. "와서 조반을 먹으라" 하시며 먼저 서빙(Serving)하십니다. 부모가 먼저 희생할 때 자녀가 변화됩니다. 직장에서 리더가 먼저 궂은 일을 마다하지 않을 때 상생하는 분위기가 살아납니다. 공동체에서 인플루언서가 자신의 영향력을, 자기 입장을, 자기 과시가 아닌 타인을 세우는 데 쓸 때, 그곳에 하나님 나라가 임할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9:1-14은 사도 바울이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기보다, 복음을 위해 그 권리를 스스로 포기한 희생의 본을 보여주는 장입니다. 리더와 인플루언서가 범람하는 이 시대에, 진정한 리더십은 '누림'이 아니라 '자기 비움'에 있습니다. 누릴 수 있지만 양보하는 데 있습니다. 당연히 주장할 수 있지만 당연시하지 않는데 있습니다. 할말이 많아도 다 하지 않는 지혜에 있습니다. 사려 깊은 말에서부터 우리는 주님의 품격을 드러내어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 성도들에게 자신의 권리를 내세워 명령할 수 있지만, 사랑으로 권면하고 몸소 희생함으로 그들의 마음을 얻습니다.
1. 내려놓아야 합니다.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그 권리, 그 대우를 복음을 위해 내려놓아야 합니다.
2. 낮아져야 합니다. 남이 나를 섬겨주길 기다리기보다, 주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셨듯 우리가 먼저 허리를 굽혀야 합니다.
3. 복음의 통로가 되어야 합니다. 자존심이나 권리가 그리스도의 복음을 가로막는 장애물이 되지 않도록 낮아져 처신해야 합니다.
우리 모두가 먼저 죽고 헌신할 때, 하나님은 우리를 통해 우리 공동체, 하나님 나라를 확장할 것입니다. 한 주간,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권리를 포기하고 사랑을 선택하신 주님의 발자취를 따라 우리 각자의 현장에서 믿는 자로서 본을 보이는 우리들이 될 수 있기를 권면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아버지 하나님, 회사 경영자로서, TENT MAKER로서, 부모로서 권리들을 내려놓게 하옵소서. 제가 먼저 낮아질 때 우리 가정과 단체가 살아나는 기적을 보게 하옵소서. 저의 성격이나 고집, 기득권이 복음을 가로막는 장애물이 되지 않게 하시고, 오직 저를 통해 그리스도의 향기만이 흘러나오게 하옵소서. 우리 모두가 이런 고백이 넘쳐나게 하옵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