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좌 우편의 승리의 왕
시편 110:1~7
1. 여호와께서 내 주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네 원수들로 네 발판이 되게 하기까지 너는 내 오른쪽에 앉아 있으라 하셨도다
2. 여호와께서 시온에서부터 주의 권능의 규를 내보내시리니 주는 원수들 중에서 다스리소서
3. 주의 권능의 날에 주의 백성이 거룩한 옷을 입고 즐거이 헌신하니 새벽 이슬 같은 주의 청년들이 주께 나오는도다
4. 여호와는 맹세하고 변하지 아니하시리라 이르시기를 너는 멜기세덱의 서열을 따라 영원한 제사장이라 하셨도다
5. 주의 오른쪽에 계신 주께서 그의 노하시는 날에 왕들을 쳐서 깨뜨리실 것이라
6. 뭇 나라를 심판하여 시체로 가득하게 하시고 여러 나라의 머리를 쳐서 깨뜨리시며
7. 길 가의 시냇물을 마시므로 그의 머리를 드시리로다
초등학교 시절 새벽에 일어나서 동네에 떨어진 반 홍시 상태의 감을 주워서 팔았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희미한 새벽에 감나무가 많은 밭을 지나가면 새벽이라 밭에는 아무도 없습니다. 발등에 새벽이슬이 흥건히 발에 젖어 들지만 떨어진 감 홍시를 새벽에 먼저 간 것으로 인해 늘 독식하게 됩니다. 당시 왜 아침에 이슬이 수북이 내려 발을 적시는지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신발에 이슬 물기가 가득하여 참 불편했던 기억이 많습니다. 고무신에 이슬이 가득해지면 미끄러져 넘어지기 십상입니다.
부활의 아침이 지난 지 일주일이 되었습니다. 부활은 단 하루의 축제가 아닙니다. 부활은 예수님을 구주로 믿음으로써 살아가는 우리 삶의 모든 순간을 지탱하는 우리를 전적으로 지배하는 기본 원리입니다. 오늘 시편 110편은 다윗이 성령의 감동을 받아, 약 1,000년 뒤에 오실 자신의 후손이자 하나님의 아들이신 메시아를 바라보며 기록한 찬양입니다. 어떻게 다윗은 이런 영감을 받았을까요? 말씀을 통해 살펴보겠습니다.
1. 성자 하나님 만왕의 왕(1-2절)
1. 여호와께서 내 주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네 원수들로 네 발판이 되게 하기까지 너는 내 오른쪽에 앉아 있으라 하셨도다
2. 여호와께서 시온에서부터 주의 권능의 규를 내보내시리니 주는 원수들 중에서 다스리소서
"내가 네 원수들로 네 발판이 되게 하기까지"는 최종 승리로 발판, 즉 발등상은 고대 근동에서 승전국 왕이 패전국 왕의 목을 발로 밟는 관습에서 온 표현입니다. 이는 원수들에 대한 완전한 굴복과 승리를 의미합니다.
1절을 다시 보십시오.
"여호와께서 내 주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네 원수들로 네 발판이 되게 하기까지 너는 내 오른쪽에 앉아 있으라 하셨도다”라고 고백합니다.
‘여호와’께서의 ‘여호와’는 성부 하나님을, ‘내 주’는 성자 하나님 예수님을 말합니다. 성부 하나님 아버지께서 아들인 성자 하나님인 예수님께 내가(성부 하나님이) 네(성자하나님=예수님)의 원수들로 하여금 네(예수님) 발판(패배자)이 되게 하기까지 너(성자 하나님)는 내(성부 하나님) 오른쪽에 않아 있으라.
이런 의미를 예수님이 임마누엘 하시기 약 1000년전에 다윗에게 성령의 감동함으로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기도할 때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는 이유입니다.
1절 성부 하나님께서 성자 예수님께 모든 권세를 위임하셨습니다. 그래서 마태복음 1:1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라는 것이 한 맥락으로 연결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는 마태복음 28:18, “예수께서 나아와 말씀하여 이르시되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로
연결됩니다. 우리가 기도의 끝에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는 것은, **"나의 공로가 아니라, 하나님이 권세를 주신 유일한 통로인 예수님의 권세로 이 기도를 올립니다"**라는 신앙 고백입니다. 부활하여 승천하신 주님께서는 지금 어디에 계실까요? 우주의 중심,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앉아 계십니다. 그분은 한가하게 쉬고 계신 것이 아니라, 리워야단 같은 세상의 불의한 세력들을 발판 삼아 온 우주를 다스리고 계십니다.
2. 여호와께서 시온에서부터 주의 권능의 규를 내보내시리니 주는 원수들 중에서 다스리소서
‘시온에서부터’는 통치의 시작점을 말합니다. 영적인 의미로는 '시온'은 하나님의 임재가 있는 예루살렘 성전이자, 오늘날의 교회를 상징합니다. 교회의 머리는 예수님이십니다. 주님의 통치는 먼 우주 밖이 아니라, 죽음을 이기신 예루살렘(시온)에서부터 시작되어 온 천하로 퍼져 나갑니다. 이는 부활의 소식이 사도행전 1:8처럼 예루살렘에서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퍼진 것과 맥을 같이 합니다.
"주의 권능의 규를 내보내시리니" 이는 통치의 수단을 말합니다. 규(Scepter)는 왕이 손에 쥐는 지팡이로, 왕권과 심판의 권세를 상징합니다. 마치 대부분의 왕에게 쥐어진 금 막대기 같은 봉을 말합니다. 이는 말씀으로의 통치로 주님은 칼과 총이 아니라, '복음의 말씀'이라는 권능의 규로 세상을 다스리십니다. 이승만 대통령이 감옥에서 성경 말씀을 권능의 규로 붙들었을 때 그의 인생과 민족의 운명이 변하기 시작한 것이 바로 이 '규'가 역사한 실례입니다.
"원수들 중에서 다스리소서", 이는 통치의 환경을 말합니다. 이미와 아직 (Already but Not Yet): 주님의 다스림은 원수들이 완전히 사라진 '진공 상태'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여전히 우리 주변에는 악의 세력과 고난(원수들)이 존재합니다. 전시적 통치로 주님은 원수들이 눈앞에 시퍼렇게 살아있는 그 한복판에서 "내가 왕이다"라는 것을 보여주십니다. 원종수 박사가 세상적인 불리함과 가난(원수들) 속에서도 새벽 기도를 통해 승리했던 것은, 그 '원수들 중에서' 주님이 다스리시기 때문입니다.
"원수가 없는 곳으로 도망가는 것이 신앙이 아니라, 원수들이 가득한 세상 한복판에서 주님의 권능의 규(말씀)를 의지해 승리하는 것이 부활의 신앙이 되어야 합니다. 1절의 보좌(지위)를 믿는 성도는 2절의 규(다스림)를 의지해 담대히 세상으로 나갈 수 있게 됩니다.
2. 새벽 이슬 같은 주의 청년들의 헌신(3절)
3. 주의 권능의 날에 주의 백성이 거룩한 옷을 입고 즐거이 헌신하니 새벽 이슬 같은 주의 청년들이 주께 나오는도다
21세기 현재 지구촌은 불의와 탐욕이 하수처럼 창일합니다. 법치는 무너진 것 같고 공의는 사라진 것 같습니다. 이렇게 기강이 무너진 세대가 일찍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 시대에도 일하고 계십니다. 3절은 장엄하게 선포합니다. "주의 권능의 날에 주의 백성이 거룩한 옷을 입고 즐거이 헌신하니 새벽 이슬 같은 주의 청년들이 주께 나오는도다."
여기서 '청년'은 단순히 생물학적 나이만을 뜻하지 않습니다. 부활의 생명력을 가진 자, 하나님 나라를 위해 자원하는 심령을 가진 모든 성도가 '주의 청년'입니다.
거룩한 옷은 세상의 불의와 야합하지 않는 정결함입니다. 즐거운 헌신은 억지로 하는 신앙 활동이 아닙니다. 부활의 주님이 너무 좋아 스스로 일어나는 환희로 가득찬 기동력입니다. 새벽 이슬은 소리 없이 내려 온 대지를 적십니다. 이 불의한 시대에 하나님 나라를 세워가는 방식은 리워야단처럼 요란하고 폭력적인 방식이 아닙니다. 이슬처럼 소리 없이, 그러나 거룩함으로 무장한 성도들의 헌신을 통해 하나님은 세상을 변화시키십니다.
18세기 영국, 노예 무역이라는 거대한 불의가 창일하던 시대입니다. 당시 사람들은 "노예가 없으면 경제가 무너진다"고 말하며 이 리워야단 같은 불의를 당연하게 여깁니다. 그때 '새벽 이슬 같은 주의 청년'이었던 윌리엄 윌버포스(1759-1833)가 일어납니다. 그는 시편 110편의 말씀처럼, 보좌 우편에 앉으신 주님이 세상의 왕들을 심판하실 진짜 왕임을 믿습니다. 그는 20년이 넘는 시간 동안 비난과 위협 속에서도 굴하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그가 미쳤다고 했지만, 그는 보이지 않는 주님의 '권능의 규(2절)'를 바라봅니다. 결국 그는 노예 무역 폐지를 이끌어냅니다.
20대 초반의 이승만이 한성감옥에서 보낸 5년 7개월은 한국 근대사에서 가장 상징적인 새벽 이슬 같은 청년'이 빚어진 시간이라 비유할 수 있습니다. 절망 속의 부활로 영적 회심으로 승화합니다. 이승만은 당시 성령께서 자신이 갇힌 감옥 방을 환하게 비추는 것을 체험합니다. 구한말 1890년대 당시 조선 왕정을 부인하는 반역죄로 사형 선고를 받고 ‘칼틀’을 쓴 채 죽음의 공포 앞에 있던 청년 이승만은 감옥에서 복음을 받아들입니다. 그는 "오 하나님, 나의 영혼을 구원해 주시고 우리 나라를 구원해 주소서"라고 기도합니다. 그는 감옥 안에서 성경을 탐독하고 동료 죄수들에게 복음을 전하며, 옥중 학교를 세우고 도서실을 만듭니다.
이는 시편 110:3절이 말하는 "거룩한 옷을 입고 즐거이 헌신하는" 청년 군사의 전형적인 모습입니다. 민족의 새벽을 깨운 이슬로 감옥이라는 가장 어둡고 낮은 곳에서 내린 하나님의 은혜(이슬)가 청년 이승만을 변화시킵니다. 그 변화가 결국 대한민국이라는 나라의 기초를 세우는 밑거름이 됩니다. 120년 전 한성감옥의 차디찬 바닥에서 주님을 만나 민족의 새벽을 깨웠던 한 청년의 기도처럼, 오늘 우리가 드리는 이 새벽 기도가 이 땅을 적시는 생명의 이슬이 될 것입니다.
1960년대 원종수 박사는 고등학교 시절, 전교 400여 명 중 300등 밖을 맴돌 정도로 성적이 좋지 않았습니다. 뿐만 아니라 먹을 것이 없이 굶어야 하는 몹시 빈곤합니다. 그럼에도 그는 어머니를 따라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는 말씀을 붙들고, 공부할 시간도 부족한 상황에서 매일 새벽 제단을 쌓습니다. 어느 날 새벽 기도 중, 하나님께서 그의 머리에 안수하시듯 뜨거운 기운을 부어주시는 체험을 합니다. 그 이후 교과서를 읽으면 내용이 마치 사진을 찍은 것처럼 머릿속에 그대로 남는 놀라운 지혜를 경험하게 됩니다. 이 '하늘의 지혜'로 공부한 끝에 서울대 의대에 합격하고, 이후 미국에서도 암 전문의로서 독보적인 실력을 갖추게 됩니다. 원종수 박사가 지혜를 얻기 위해 새벽 기도를 이용한 것이 아니라, **주님을 사랑하여 먼저 즐거이 헌신(새벽 기도)**했을 때, 주님께서 그의 헌신을 통해 권능과 지혜를 덧입혀주신 것입니다. 마치 새벽 이슬이 내린 뒤에야 식물이 생동감을 얻듯, 자원하는 헌신 위에 주님의 초자연적인 능력이 임한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3. 멜기세덱의 서열을 따른 영원한 제사장(4-7절)
4. 여호와는 맹세하고 변하지 아니하시리라 이르시기를 너는 멜기세덱의 서열을 따라 영원한 제사장이라 하셨도다
5. 주의 오른쪽에 계신 주께서 그의 노하시는 날에 왕들을 쳐서 깨뜨리실 것이라
6. 뭇 나라를 심판하여 시체로 가득하게 하시고 여러 나라의 머리를 쳐서 깨뜨리시며
7. 길 가의 시냇물을 마시므로 그의 머리를 드시리로다
시편 110편의 핵심 선포는 4절에 있습니다. "너는 멜기세덱의 서열을 따라 영원한 제사장이라." 구약에서 왕과 제사장은 결코 섞일 수 없는 직분입니다. 그러나 메시아는 왕인 동시에 제사장이어야 했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창세기 14장에 등장하는 신비의 인물 멜기세덱을 통해 예수님의 대제사장직을 설명합니다.
멜기세덱(Melchizedek)은 누구일까요? 창세기 14장에 갑자기 등장하여 아브라함을 축복한 '살렘 왕'이자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입니다. 그는 족보가 전혀 없습니다. 성경에 부모나 시작과 끝이 기록되지 않아, 히브리서 기자는 그를 '하나님의 아들과 닮아서 항상 제사장으로 있는 자'로 해석합니다(히브리서7:3). 구약의 일반적인 제사장은 '아론의 후손인 레위 지파'이어야 합니다. 하지만 그들은 죽음이라는 한계가 있어 제사장 직분이 계속 바뀝니다. 예수님은 유다 지파로 오셨기에 인간적인 법으로는 제사장이 될 수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예수님을 멜기세덱과 같은 특별한 서열로 세우십니다. 이는 인간의 혈통이 아닌, '불멸의 생명의 능력'으로 세워진 제사장임을 뜻합니다. 이런 흐름을 정확히 인지함이 매우 중요합니다.
아론의 후예들은 죽음으로 인해 그 직분이 끊어졌지만, 우리 주님은 부활하심으로 영원히 살아 계십니다. 텐트 메이커로서 세상의 거친 풍파를 맞는 우리에게 가장 큰 위로는 무엇입니까? 우리를 위해 하늘 보좌에서 쉬지 않고 중보하시는 대제사장이 계신다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비즈니스 현장에서 정직을 지키려다 고뇌할 때, 주님께서는 보좌 우편에서 우리의 눈물을 닦아주시며 새 힘을 공급하실 것입니다.
이 보좌 우편의 권능이 어떻게 역사 속에 나타나는지 보여주는 유명한 실화가 있습니다. 1차 세계대전 당시인 1917년, 예루살렘을 탈환한 영국의 에드먼드 앨런비(Edmund Allenby) 장군이 있습니다.
당시 예루살렘은 오스만 제국이 점령하고 있었고, 영국군은 지독한 갈증과 험난한 지형 때문에 고전하고 있습니다. 독실한 그리스도인이었던 앨런비는 공격 전날 밤, 바로 오늘 본문 시편 110편을 묵상하며 기도합니다. "주님, 주의 권능의 날에 이 땅을 회복시켜 주옵소서."
다음 날, 기적이 일어납니다. 한 발의 총성도 없이 오스만 군대가 예루살렘 성문을 열고 도망친 것입니다. 나중에 밝혀진 이유는 놀라웠습니다. 하늘에 뜬 영국군 비행기를 본 오스만 병사들이, 아랍어로 '알라의 예언자(Allah-Nabi)'라는 말과 발음이 비슷한 '앨런비(Allenby)' 장군이 하늘에서 내려왔다고 착각하여 공포에 질려 퇴각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세상의 오해와 언어조차 사용하여 원수를 발판(footstool)으로 삼으십니다. 이것이 2절에 기록된 '시온에서부터 내보내시는 주의 권능의 규'의 실체입니다.
5절과 6절은 공의로운 심판을 묘사합니다. "그의 노하시는 날에 왕들을 쳐서 깨뜨리실 것이라." 여러 나라의 머리를 쳐서 깨뜨리시는 주님의 심판은 단호합니다. 인간의 잔꾀와 조작과 불법으로 세운 바벨탑은 반드시 무너집니다.
7절은 따뜻한 위로로 끝을 맺습니다. "길 가의 시냇물을 마시므로 그의 머리를 드시리로다." 전쟁 중에 목이 타시는 주님이 시냇물을 마시고 다시 힘을 내어 머리를 드시는 모습입니다. 이것은 최후의 승리를 향해 전진하시는 주님의 기동력을 상징합니다.
주님은 지금도 우리 삶의 현장에 흐르는 '시냇물'과 같은 은혜를 마시며 우리와 함께 행진하고 계십니다. 우리가 부활의 심령을 유지하며 세상 밖으로 나아갈 때, 주님께서는 결코 지치지 않으시고 우리의 머리를 들어주실 것입니다.
앨런비 장군은 승리 후 말에서 내려 겸손히 걸어서 예루살렘에 입성합니다. 그리고 갈증에 지친 병사들에게 광야의 오아시스를 마시게 하며 그들의 머리를 들게 합니다. 이것이 오늘 본문 7절 "길가의 시냇물을 마시므로 그의 머리를 드시리로다."의 생생한 묘사입니다. 물이 귀한 중동 광야에서, 패퇴하는 적을 추격할 때 가장 큰 적은 갈증입니다. 보통의 왕들은 목이 마르면 행군을 멈추고 쉬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 왕 예수님은 다릅니다. 주님은 멈춰 서서 쉬는 것이 아니라, 행군하는 속도 그대로 길가에 흐르는 시냇물인 하나님의 즉각적인 은혜를 마시고 곧바로 '머리를 들어' 다시 원수를 추격하십니다.
'머리를 든다'는 것은 승리와 통치를 의미합니다. 주님께서는 지치지 않으십니다. 리워야단의 세력들이 아무리 우리를 지치게 하려 해도, 주님께서는 우리 삶의 고비마다 예비하신 '길가의 시냇물'로 힘을 얻게 하십니다. 이에 우리는 주님을 신뢰하므로 고개를 번쩍 들고 최후의 승리를 향해 매진해야 합니다.
우리는 어떤 역경에도 부활의 심령으로 새벽 이슬처럼 일어나야 합니다. 21세기 지구촌은 불의가 하수처럼 창일합니다. 법치가 무너지고 조작과 선동이 판을 치는 어둠 속에서도 하나님은 일하고 계십니다. 우리는 보좌 우편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세상의 소음과 불의에 일희일비하지 않아야 합니다. 진짜 왕은 하늘 보좌에서 모든 원수를 발판 삼아 누르고 계십니다.
우리 모두는 새벽 이슬 같은 청년이 되어야 합니다. 3절 말씀처럼, 거룩한 옷을 입고 즐거이 헌신하는 자들이 일어날 때 하나님 나라는 확장됩니다. 텐트 메이커인 우리가 일터에서 정직과 공의로 행하는 것이 바로 '거룩한 헌신'입니다. 지칠 때 주님께서 예비하신 성령의 위로를 마시고 다시 머리를 들어야 합니다. 주님은 결코 패배하지 않으시며, 결코 멈추지 않으십니다. 이번 한 주간, 시편 110편의 말씀을 가슴에 품고, 길가의 시냇물을 마시며 힘차게 머리를 드시는 부활의 증인으로 승리하는 우리들이 되어야 합니다. 새벽 이슬 같은 기도로 힘을 다시 얻는 우리 모두가 되어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시간을 정하여 새벽이슬 같은 청년의 자세로 주님께 나아가 힘을 얻어야 합니다. 꼭 새벽일 필요는 없습니다. 본인만이 가장 집중할 수 있는 시간을 정하여 새벽이슬 같은 순수함으로 주님과 교제해야 합니다. 이슬은 소리 없이 내려 모든 식물에 생명을 주는 유일한 수분입니다. 새벽 이슬은 티 없이 맑고 깨끗합니다. 이는 '거룩한 옷'을 입고 세상의 유혹에 물들지 않은 채, 순수한 믿음으로 주님을 따라야 하는 우리들의 성결함을 상징합니다. 이슬은 비처럼 요란하지 않지만, 조용히 내려 대지를 변화시킵니다. 순수한 우리의 새벽이슬 같은 기도는 우리 민족과 우리 운명을 바꾸는 강력한 원동력이 될 것을 확신해야 합니다. 부활의 생명력으로 우리 공동체 대한민국과 지구촌의 공의를 위해, 하나님 나라 확장을 위해, 우리 사업장을 위해, 우리 자매를 위해 이슬같이 마음을 드려야 합니다. 불가능을 가능하게 해 달라고 간구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임마누엘 하시기 약 1000년전에 다윗은 성령의 감동함으로 주님을 만난 것입니다. 우리도 성령님의 감동을 체험하도록 새벽이슬 같은 지체로 주님과 동행해야 합니다.
1. 하나님 주권을 인정해야 합니다. 눈에 보이는 불의한 권세보다 보좌 우편에 앉으신 예수 그리스도의 통치권이 절대적임을 믿어야 합니다. 앨런비 장군에게, 이승만 대통령에게, 원종수 박사에게 기적을 베푸셨던 그 하나님이 우리 “이슬 같은 기도에도 100% 응답하여 주옵소서”라고 간구해야 합니다.
2. 지치지 않는 인내가 필요합니다. 고난의 광야에서 길가의 시냇물 같은 성령의 위로를 마시게 하시고, 주님처럼 다시 머리를 들어 세상을 향해 담대히 나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게 하옵소서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응답이 당장 없더라도 우리를 실망시키지 않게 해 달라고 간청해야 합니다.
3. 거룩한 헌신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 모두가 이 시대의 “새벽 이슬 같은 군사'가 되게 하옵시고, 거룩한 옷을 입고 각자의 삶의 현장에서 하나님 나라를 일구어 가게 하옵소서.”라고 마음을 드려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