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RMON TEXT

시대를 관통하여 흐르는 하나님의 메시지 [이사야 1:1]

시대를 관통하여 흐르는 하나님의 메시지

이사야 1장 1절

1. 유다 왕 웃시야와 요담과 아하스와 히스기야 시대에 아모스의 아들 이사야가 유다와 예루살렘에 관하여 본 계시라
1 The vision of Isaiah the son of Amoz, which he saw concerning Judah and Jerusalem in the days of Uzziah, Jotham, Ahaz, and Hezekiah, kings of Judah.

그린란드는 지구에서 가장 큰 섬입니다. 이 얼음으로 뒤덮인 북극 섬에 세상의 이목이 집중되고 있습니다. 이 큰 섬에 거주하는 인구는 6만명이 채 못됩니다. 주민은 몽골계 종족으로 우리 한국인과 외모가 많이 닮았습니다. 그린란드 주민을 보면 꼭 어릴 적 가난한 우리를 보는 느낌이 강하게 몰려 옵니다. 그린란드는 이누이트(에스키모)족의 터전이며, 이들은 척박한 북극 환경에 적응하여 자신들만의 독특한 문화를 발전시켜 온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이 그린란드를 근래 미국 트럼프 대통령이 미국이 인수를 하겠다고 나섭니다. 2016년 당시 트럼프 대통령이 1기 트럼프 정권이 되었을 때에도 그린란드에 대한 관심을 피력한 적이 있습니다. 이번에 다시 인수한다고 하자 여러 반응이 나옵니다. 남의 나라를 침공하는 것이 아니냐 등 반응이 다양합니다.

이사야서는 구약 성경의 복음서라 불립니다. 예수님께서 오실 것을 이주 REAL하게 예언한 대 선지서입니다. 이사야 1장 1절은 단순한 서지(書誌,bibliograph)나 서문이 아닙니다. 이는 하나님의 말씀이 구체적인 역사의 현장 속에 침투했음을 알리는 선언입니다. 선지자 이사야는 유다 역사 345년, 총 20인의 왕 중에서 4인을 거론합니다. 웃시야, 요담, 히스기야는 선한 왕이고, 아하스는 악한 왕입니다. 특히 아하스는 아주 악한 왕으로 불립니다. 본문을 통해 선지자 이사야가 무엇을 말씀하는지를 살펴보겠습니다.

1. 웃시야에서 히스기야까지 변치 않는 하나님의 신실하심

1. 유다 왕 웃시야와 요담과 아하스와 히스기야 시대에 아모스의 아들 이사야가 유다와 예루살렘에 관하여 본 계시라

본문은 네 명의 왕을 언급합니다. 통치기간으로 보면 웃시야 52년, 요담 26년, 아하스 16년, 히 기야 29년입니다. 웃시야 왕의 나병으로 인한 섭정으로 중복 기간을 감안하면 약 60년에 걸친 긴 통치기간에 이사야가 본 선지적 말씀입니다.

웃시야 시대는 강력한 국방력과 경제 성장을 이뤘으나, 왕이 교만하여 성소에서 분향하려다 나병에 걸린 '풍요 속의 위기' 시대입니다. 성소에서 분향은 제사장만이 할 수 있는데 웃시야 왕이 선을 넘은 것입니다. 이에 하나님께서 벌을 내려 웃시야 왕이 나병에 걸리게 합니다. 신약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는 그럴 수도 있지 라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성막과 성전에 대한 이해가 없는 분들은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지켜야 할 율법(規則)을 주신 것입니다. 왜 그렇게 하실까요? 백성들이 연약하고, 악하고, 넘어지는 것을 알기에 그렇게 규정을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께 나아갈 때는 제사장처럼 철저히 회개하고 죄가 없이 나아가라는 율법을 주신 것입니다. 마치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도 도덕과 법률을 주듯이 말입니다. 하나님은 흠이 없으신 완전한 분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임마누엘하시고 승천하신 이후에는 믿음을 가진 백성들에게 성령님이 성전으로 바로 우리들에게 임하시기에 현재 우리들은 그럴 율법의 필요없이 1:1로 회개하고 바로 나아갑니다.

요담 시대는 웃시야의 길을 따랐으나 백성들은 여전히 산당에서 제사하며 영적으로 갈팡질팡하던 '회색 지대'의 시대입니다. 유다 선왕 8인 중 산당(높은 곳에 위치한 자신의 동네에서 제사 지내는 곳)을 철저히 제거한 왕은 히스기야와 요시아 왕 둘 밖에 없습니다. 이런 선왕 히스기야도 바벨론 사절이 예루살렘을 방문하여 왕을 알현하자 교만하여 예루살렘 왕궁의 모든 것을 다 보여 줍니다. 이에 이사야 선지자가 매섭게 히스기야 왕을 매섭게 질타합니다.

아하스 시대는 유다 역사상 최악의 왕 중 하나로, 앗수르를 의지하려고 이방 신상을 예루살렘 성전에 들여놓은 '영적 암흑기'가 도래합니다. 이는 마치 우리 시대 정상적인 기독교 교회가 000같은 이단을 교회에 끌어 들여 같이 예배 보는 것 이상의 만행입니다. 당시 유다가 얼마나 부패했는지, 우상을 숭배하고 적국 앗수르를 의지하며, 자신의 아들을 인신제물로 바치고, 성전 기물을 마음대로 훼손합니다. 이방 다메섹에서 본 이방 제단대로 예루살렘 성전에 앗수르식 제단을 세웁니다. 이는 무엇을 말해 줍니까? 당대 강국 앗수르에 의해 다메섹을 수도로 한 아람이 앗수르에 점령을 당하므로 유다 아하스 왕이 공포에 질린 상태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히스기야 시대는 종교 개혁을 단행하고 앗수르의 침공 앞에 기도함으로써 하나님의 기적적인 구원을 경험한 '회복과 시험'의 시대입니다. 히스기야는 당시 완전히 무너진 유월절을 회복시킵니다. 유월절이 어떤 절기입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으로부터 해방된 이스라엘 최고의 명절이 아닙니까? 그러나 이스라엘과 유다는 이 엄청난 절기, 즉 자신들을 애굽의 폭정으로부터 구원한 절기를 근 500년 이상 한번도 지키지 않습니다.

유월절이 유대인들에게 어떤 절기입니까? 믿어지지 않는 대목입니다.

이에 히스기야 왕은 유월절 행사에 유다 지파뿐만 아니라 북이스라엘의 에브라임, 므낫세 등 여러 지파에게도 보발꾼을 보내 함께 유월절을 지킬 것을 권합니다. 유월절 양을 잡고, 7일간 무교절을 지키며 대대적인 예배를 드립니다. 당시 백성들의 기쁨이 너무 커서 7일을 더 머물며 총 14일간 축제를 연장하게 합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하나님께 돌아오는 계기가 되도록 히스기야 왕은 진력합니다. 당시 유다는 당대 최강국 ‘앗수르’의 침공으로 국가의 존망이 걸린 상황입니다. 원래 유월절은 아빕월로 1월 14일입니다. 히스기야 왕은 수백년 만에 유월절을 준비하느라 유월절을 2월 14일로 연기하면서까지 준수합니다. 이것은 무엇을 말해 줍니까? 하나님께서 유다를 지켜주심을 신뢰한 것입니다.

이 네 왕의 통치 기간 내내 이사야가 곁을 지켰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왕들은 바뀌고, 정세는 요동치며, 위기는 반복되었지만 하나님의 말씀은 단절되지 않고 계속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세상의 권력은 유한하나 하나님의 통치는 영원합니다. 우리가 당장 힘들어도, 감내하기 어려워도 하나님을 신뢰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나 우리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히 서리라 하라" (이사야 40:8)

2. 유다와 예루살렘에 관하여 본 계시와 사랑

선지자 이사야가 본 것은 단순한 정보가 아니라 '계시(Vision)'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유다의 죄악상을 낱낱이 보여주십니다. 그들은 형식적인 제사에는 열심이지만, 삶 속에서는 고아와 과부를 외면하고 불의를 행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사야를 통해 말씀하십니다. 이사야 1:11, 16입니다.

"11.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너희의 무수한 제물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뇨 나는 숫양의 번제와 살진 짐승의 기름에 배불렀고 나는 수송아지나 어린 양이나 숫염소의 피를 기뻐하지 아니하노라 16. 너희는 스스로 씻으며 스스로 깨끗하게 하여 내 목전에서 너희 악한 행실을 버리며 행악을 그치고

이 계시는 두 가지 핵심 축을 가집니다. 첫째는'심판'입니다. 거룩하신 하나님은 죄와 함께하실 수 없기 때문입니다. 둘째는 '회복'입니다. 하나님은 심판을 목적으로 삼지 않으시고, 심판을 통해 이스라엘을 정결케 하여 다시 당신의 백성으로 삼으시길 원하십니다.

이는 마치 부유한 집안의 값진 금 그릇과 같습니다. 부유한 집안에 아름답고 값진 금 그릇이 있어 주인은 이 그릇을 잔치 때마다 귀하게 썼습니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며 집안사람들이 그릇을 닦지 않고 오물을 담아 방치하자, 금 그릇 표면은 더러운 때로 뒤덮여 본래의 빛을 잃어버립니다. 나중에는 그것이 금인지 놋인지조차 알 수 없게 됩니다. 주인은 그 그릇을 다시 쓰고 싶어 거친 수세미로 문지르고 불 속에 집어넣습니다. 겉보기에 그것은 그릇을 망가뜨리는 고통처럼 보였지만, 사실은 그릇을 다시 빛나게 하여 주인 곁에 두기 위한 '재생의 과정'입니다.

이사야 시대의 유다가 바로 이 금 그릇과 같습니다. 하나님의 택함 받은 백성이었으나 죄로 인해 본질을 잃어 버립니다. 하나님은 앗수르와 바벨론이라는 '거친 수세미'와 '풀무불'을 사용하십니다. 그것은 멸절이 아니라 정결케 하심입니다.

3.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여호와의 말씀

이사야 1장 1절은 2,700년 전의 기록으로 끝나지 않고 오늘 우리에게 회개와 새로운 도전을 제시합니다.

당시 아하스 왕도 더 이상 무너질 것이 없을 정도로 타락했지만, 당시 제사장은 한발 더 앞서서 이에 앞장서 납작 엎드린 것입니다. 현 우리 시대 권력 앞에 아부하는 검찰이나 사법부도 동일한 모습으로 다가옵니다. 왕하 16:11-11절입니다.

10. 아하스 왕이 앗수르의 왕 디글랏 빌레셀을 만나러 다메섹에 갔다가 거기 있는 제단을 보고 아하스 왕이 그 제단의 모든 구조와 제도의 양식을 그려 제사장 우리야에게 보냈더니
11. 아하스 왕이 다메섹에서 돌아오기 전에 제사장 우리야가 아하스 왕이 다메섹에서 보낸 대로 모두 행하여 제사장 우리야가 제단을 만든지라

당시 제사장 우리아가 얼마나 아하스 왕의 눈치를 보았으면, 아하스 왕이 이방 땅인 다메섹에서 예루살렘으로 돌아오기도 전에, 전령 등을 통해 보내준 지침을 보고 예루살렘 성전 제단을 다 변경한다는 말입니까? 성전의 전신인 성막은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하늘의 천국 모양을 하나님께서 지시하신 그대로 그 위치, 가로, 세로, 높이, 폭, 색상, 재료 등 하나도 달라서는 안 되는 철칙입니다. 제사장이 아하스 왕보다 더 타락한 것입니다. 제사장이라도 바로 말씀 앞에 깨어 있었으며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대가 어떤 세태인지를 살펴 보려면 기독교를 보면 가늠할 수 있습니다. 그린란드는 덴마크 자치령으로 덴마크의 지배를 받습니다. 이사야 시대의 유다가 종교적 형식을 갖추었으나 공의를 저버렸듯이, 현대사에서도 유사한 비극을 찾을 수 있습니다. 바로 덴마크 정부와 일부 선교사들이 그린란드 원주민인 이누이트 종족에게 행한 일들입니다.

1950년대, 기독교 국가를 자처하던 덴마크는 그린란드를 근대화한다는 명목 아래 이누이트 아이들을 강제로 부모와 격리해 덴마크로 보냅니다. '모범적인 시민'으로 교육한다는 구실이었으나, 결과적으로 아이들은 고유의 언어와 문화를 잃었고 심각한 정체성 혼란과 정신적 외상을 입고 사회에 부적응한 아이들로 만듭니다. 이뿐만 아닙니다. 1960년대와 70년대, 기독교 국가임을 자부하던 덴마크 정부는 그린란드의 인구 증가로 인한 복지 예산 지출을 막기 위해 차마 믿기 힘든 만행을 저지릅니다. 12~13세밖에 되지 않은 어린 원주민 소녀들에게 본인의 동의도 없이, 심지어 그것이 무엇인지 설명조차 하지 않은 채 강제로 피임 기구(루프)를 몸에 삽입합니다. 약 4,500명의 어린 여성들이 영문도 모른 채 태의 문이 닫혔고, 일부는 임신 중절을 강요 받습니다. 국가의 경제적 효율성이라는 우상 앞에, 하나님이 천하보다 귀하게 여기시는 어린 생명들의 인권과 모성을 제물로 바친 것입니다. 이것이 아하스의 인신 제사와 무엇이 다릅니까?

하나님께서는 이사야를 통해 이 시대를 향해 이렇게 외치십니다.

15. 너희가 손을 펼 때에 내가 내 눈을 너희에게서 가리고 너희가 많이 기도할지라도 내가 듣지 아니하리니 이는 너희의 손에 피가 가득함이라

"주여, 주여" 부르는 입술은 있었고, 복음을 전한다는 명분은 있었으나 그 안에 ‘하나님의 형상에 대한 존중과 사랑이 빠졌을 때, 기독교는 구원의 도구가 아닌 억압의 도구가 됩니다. 이는 이사야 1장 15절의 말씀, "너희가 손을 펼 때에 내가 내 눈을 너희에게서 가리고 너희가 많이 기도할지라도 내가 듣지 아니하리니 이는 너희의 손에 피가 가득함이라"는 경고가 오늘날 우리들에게 경종을 울려 줍니다.

선지자 이사야가 활동했던 BC 740년에서 690년 이 시대는 유다 역사상 가장 혼란스럽고 위태로운 시기였습니다. 겉으로는 경제적 번영을 누리는 듯했으나, 속으로는 영적 부패와 도덕적 타락이 곪아 터지기 직전이었습니다. 바로 그때, 하나님께서는 '아모스의 아들 이사야'를 택하셨습니다. 그의 이름의 뜻은 "여호와는 구원이시다"입니다. 절망의 시대에 하나님의 구원을 선포하도록 부름받은 것입니다.

세상 권력은 영원하지 않습니다. 영원할 수 없습니다.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세상 뉴스가 진실이나 전부가 아닙니다. 전체주의 망상이 평화, 공존, 보존이라는 그럴싸한 이념으로 지구촌을 파괴하고 창조 질서를 위협하고 있습니다. 가시적인 것 위에서 우리가 상상하는 것을 훨씬 넘어 역사하시는 하나님 손길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소수라도 옮고 바른 것은 의로운 것입니다. 그린란드는 원주민 보호와 인권, 신앙이 우선이어야 합니다. 이런 점에서 청교도 정신으로 건국된 미국이 그린란드를 당분간 지원하고 관리하는 것도 믿음의 관점에서 고려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정의는 선지자 이사야 말씀처럼 하나님 말씀이 판단의 기준이 되어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1. 시대의 징조를 분별해야 합니다. 이사야는 정치적 격변기에 하늘의 계시를 보았습니다. 우리도 경제적 위기, 도덕적 해이, 가치관의 혼란 속에 살고 있습니다. 이때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뉴스의 분석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이 시대가 실로 악함을 인지해야 합니다.

2. 형식보다 ‘마음의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께 나아가야 합니다. 이사야는 입술로는 하나님을 공경하나 마음은 멀어진 백성들을 꾸짖습니다. 우리의 예배와 삶이 습관적인 형식이 되지는 않았는지 돌아봐야 합니다. 개인적으로 주변을 돌아볼 때 자신에게 더 돕지 못하는 한계 가운데에서도 아픔이 상존합니다. 갈등이 있습니다. 이 갈등과 고민을 하나님께 들고 나아가 다 아뢰어야 합니다. 간섭하여 달라고, 해소하여 달라고 간구해야 합니다.

3. 소망의 끝을 붙들어야 합니다. 이사야 예언의 절정은 53장에 나타난 '고난받는 종'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이사야는 장차 오실 메시아를 바라보며 절망의 시대를 견뎠습니다. 우리 역시 어떤 상황에서도 우리를 위해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소망을 발견해야 합니다.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너희의 죄가 주홍 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 같이 붉을지라도 양털 같이 희게 되리라" (이사야 1:18) 라는 이 말씀을 붙들고 하나님께 나아가 고백해야 합니다.

선지자 이사야는 거대한 심판의 메시지 속에서도 언제나 '남은 자(Remnant)'를 말씀합니다. 거룩한 씨가 이 땅의 그루터기가 될 것이라고 선포하십니다(사 6:13). 우리는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님을 신뢰하므로 살아 남아야 합니다. 그루터기로 인내하며 견뎌야 합니다. 극복하고 승리해야 합니다. 이를 통해 하나님 영광이 드러나야 합니다.

13. 그 중에 십분의 일이 아직 남아 있을지라도 이것도 황폐하게 될 것이나 밤나무와 상수리나무가 베임을 당하여도 그 그루터기는 남아 있는 것 같이 거룩한 씨가 이 땅의 그루터기니라 하시더라

우리는 어떤 상황에서도 거룩한 그루터기로 살아 남아 풍성한 결실을 거둬 하나님 영광을 만방에 드러내어야 합니다. 이사야 1장 1절의 말씀처럼, 어떤 왕의 시대(상황)를 지나든 변치 않는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고, 이 시대의 '거룩한 그루터기'로 살아가는 우리들이 되어야 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역사의 주관자 되시는 하나님, 이사야가 보았던 그 계시가 오늘 우리의 영안을 뜨게 하옵소서. 세상의 화려함에 현혹되지 않고, 심판 너머에 있는 하나님의 긍휼을 보게 하옵소서. 우리 삶의 모든 순간이 하나님의 통치 아래 있음을 고백하며, 정결한 마음으로 주님과 동행하게 하옵소서.

오늘 우리는 이사야 선지자가 보았던 그 엄중한 계시 앞에 우리 자신을 비추어 봅니다. 웃시야의 풍요 속에서 교만했고, 아하스의 위기 속에서 하나님 대신 세상의 힘과 정치를 의지했던 유다의 모습이 바로 오늘 우리의 모습이 아닌가 돌아보고 이를 고백합니다.

주님, 먼저 우리의 위선을 회개합니다. 우리는 기독교인이라는 이름을 가졌으나, 정작 삶의 현장에서는 하나님의 공의보다 나의 이익을 먼저 구했습니다. 입술로는 주님을 사랑한다 말하면서도, 마음은 세상의 성공과 안락함이라는 곳에 가 있습니다. 이웃을 향한 눈물과 긍휼은 메말라 버렸음을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이 시간 결단하며 나아갑니다. 세상이 아무리 어두워도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고 견디는 '거룩한 그루터기'가 되게 하옵소서. 우리 가정이, 우리 일터가, 우리 교회가 이 시대의 남은 자들이 되어 하나님의 공의를 흐르게 하는 통로가 되길 원합니다. 우리의 예배가 성전 마당만 밟는 헛된 제사가 아니라, 상한 심령으로 주께 나아가는 진실한 제사가 되게 하옵소서. 심판 너머에 있는 회복의 소망을 보게 하옵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