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의를 던지는 자들아 아모스 5:1-17
1. 이스라엘 족속아 내가 너희에게 대하여 애가로 지은 이 말을 들으라
2. 처녀 이스라엘이 엎드러졌음이여 다시 일어나지 못하리로다 자기 땅에 던지움이여 일으킬 자 없으리로다
3. 주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이스라엘 중에서 천 명이 행군해 나가던 성읍에는 백 명만 남고 백 명이 행군해 나가던 성읍에는 열 명만 남으리라 하셨느니라
4.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족속에게 이와 같이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나를 찾으라 그리하면 살리라
5. 벧엘을 찾지 말며 길갈로 들어가지 말며 브엘세바로도 나아가지 말라 길갈은 반드시 사로잡히겠고 벧엘은 비참하게 될 것임이라 하셨나니
6. 너희는 여호와를 찾으라 그리하면 살리라 그렇지 않으면 그가 불 같이 요셉의 집에 임하여 멸하시리니 벧엘에서 그 불들을 끌 자가 없으리라
7. 정의를 쓴 쑥으로 바꾸며 공의를 땅에 던지는 자들아
8. 묘성과 삼성을 만드시며 사망의 그늘을 아침으로 바꾸시고 낮을 어두운 밤으로 바꾸시며 바닷물을 불러 지면에 쏟으시는 이를 찾으라 그의 이름은 여호와시니라
9. 그가 강한 자에게 갑자기 패망이 이르게 하신즉 그 패망이 산성에 미치느니라
10. 무리가 성문에서 책망하는 자를 미워하며 정직히 말하는 자를 싫어하는도다
11. 너희가 힘없는 자를 밟고 그에게서 밀의 부당한 세를 거두었은즉 너희가 비록 다듬은 돌로 집을 건축하였으나 거기 거주하지 못할 것이요 아름다운 포도원을 가꾸었으나 그 포도주를 마시지 못하리라
12. 너희의 허물이 많고 죄악이 무거움을 내가 아노라 너희는 의인을 학대하며 뇌물을 받고 성문에서 가난한 자를 억울하게 하는 자로다
13. 그러므로 이런 때에 지혜자가 잠잠하나니 이는 악한 때임이니라
14. 너희는 살려면 선을 구하고 악을 구하지 말지어다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의 말과 같이 너희와 함께 하시리라
15. 너희는 악을 미워하고 선을 사랑하며 성문에서 정의를 세울지어다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혹시 요셉의 남은 자를 불쌍히 여기시리라
16. 그러므로 주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기를 사람이 모든 광장에서 울겠고 모든 거리에서 슬프도다 슬프도다 하겠으며 농부를 불러다가 애곡하게 하며 울음꾼을 불러다가 울게 할 것이며
17. 모든 포도원에서도 울리니 이는 내가 너희 가운데로 지나갈 것임이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최근 대한민국에는 며칠 사이에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나 산불이 전 산야를 뒤덮습니다. 대규모 헬기로 진화를 하는 이런 경우는 지금까지 없었던 초유의 일입니다. 산불은 강풍이 동반되지 않으면 그렇게 빨리 확산되지 않습니다. 어릴 때 산 기슭에서 불장난을 하다가 바람이 강하게 불면 진화할 수 없을 정도로 불길이 번집니다.
방화나, 소방관련 일을 잘 아는 분들은 매우 수상한 눈으로 지금 대한민국에서 일어나고 있는 산불을 평가하고 있습니다. 뿐만 아닙니다. 국민들도 왜 동시다발적으로 이런 자연재해가 일어나는지 의아야 합니다. 인위적으로 누군가 어떤 저의를 가지고 방화하는 것이 아닌가 의아해 합니다. 정부 당국에서는 긴급 문자로 이런 비상상황을 알려줍니다. 불이 나면 불이야 하고 급하게 크게 외칩니다. 산불을 조심하라고 또는 산에 갈 때 불조심하라는 비상 신호인 것입니다. 이것이 정부의 역할입니다.
왜 아모스는 본업을 제쳐두고 이렇게 외칠까요? 하나님이 허락하신 공동체가 그대로 두면 불에 타듯이 다 망가질 것이 눈에 선하게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아무리 외쳐도 듣지 않거나 못 알아드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불이 나던 말던, 내 집에, 나의 건물에, 내 소유지에 나지 않으면, 남의 일로 생각합니다. 왜 그럴까요? 깨어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사명감, 책임감, 공동체를 사랑하는 마음이 없기 때문은 아닌지요? 공동체가 주는 고마움, 유익을 망각하기 때문은 아닐까요?
Part 1, 이 말을 들어라
1. 이스라엘 족속아 내가 너희에게 대하여 애가로 지은 이 말을 들으라
2. 처녀 이스라엘이 엎드러졌음이여 다시 일어나지 못하리로다 자기 땅에 던지움이여 일으킬 자 없으리로다
아모스는 ‘이스라엘 족속아’라고 부릅니다. 이 말은 북 이스라엘뿐만이 아닌 남 유다를 포함한 야곱의 자손 전부를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북한까지도 대한민국의 한 영토로 부르는 것처럼 말입니다. 아모스는 남 유다 드고아 출신의 목자로 목축 업자입니다. 그런 그가 본업보다는 자신이 속한 공동체가 무너지는 것을 보고는 외치는 것입니다. 남 유다는 상대적으로 북 이스라엘 보다는 덜 우상을 섬깁니다. 그러나 우상은 우상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북 이스라엘을 통해 남 유다에 미리 경고를 보내는 것입니다.
‘처녀 이스라엘이 엎드려졌음이여 다시 일어나지 못하리로다’라고 경고합니다. 엎드려졌음은 삼하
1:19, 25 / 19. 이스라엘아 네 영광이 산 위에서 죽임을 당하였도다 오호라 두 용사가 엎드러졌도다 / 25. 오호라 두 용사가 전쟁 중에 엎드러졌도다 요나단이 네 산 위에서 죽임을 당하였도다. 와 같이 아주 슬픈 애가를 부르는 장면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다윗에게는 사울왕과 그 아들 요나단의 죽음이 충격으로 다가옵니다. 자신을 죽이려고 온갖 짖을 다한 사울 왕과 그 아들 요나단이 블레셋과의 마지막 전투에서 사울왕과 그 아들 셋이 처참하게 죽임을 당하는 애가에 비유하고 있습니다. 요나단과 다윗의 우정은 많은 것을 시사해 줍니다. 그만큼 아픔도 큽니다. 처녀 이스라엘이 엎드려졌음이여 이는 이스라엘의 이같이 비참한 죽음을 미리 경고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시는 일어나지 못할 것이라고 아모스 선지자는 반복하여 경고하는 것입니다.
처녀 이스라엘은 하나님께서 그 백성을 사랑하셔서 불러 주신 이름입니다. 처녀 이스라엘은 이사야 37:22에서처럼 ‘ 여호와께서 그에 대하여 이같이 이르시되 처녀 딸 시온이 너를 멸시하며 조소하였고 딸 예루살렘이 너를 향하여 머리를 흔들었느니라.’ 렘14:17 너는 이 말로 그들에게 이르라 내 눈이 밤낮으로 그치지 아니하고 눈물을 흘리리니 이는 처녀 딸 내 백성이 큰 파멸, 중한 상처로 말미암아 망함이라.
이같이 처녀 이스라엘은 이스라엘이 이방 나라에 의거 침략을 당하기 전의 온전한 상태를 말합니다. 이런 이스라엘이 엎드러졌음은 이스라엘이 멸망 당한 것을 의미합니다. 아모사가 경고를 날릴 때 아직 여로보암 2세 시대로 이스라엘이 멸망을 당하기 직전의 상태로 매우 위중한 시기를 말합니다.
자기 땅에 던지움은 적국이 이스라엘을 침략, 침공하여 이스라엘 땅 내에서 도륙을 당하는 것을 말합니다. 적들이 침략하여 마음껏 유린하므로 이들을 일으킬 자가 없다는 말입니다. 적의 침략을 받으면 부녀자와 어린이들이 먼저 희생을 당합니다. 처참한 광경을 열거하면서 회개를 촉구하는 아모스 선지자의 심정이 어떠하겠습니까?
3. 주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이스라엘 중에서 천 명이 행군해 나가던 성읍에는 백 명만 남고 백 명이 행군해 나가던 성읍에는 열 명만 남으리라 하셨느니라
적의 침공으로 이스라엘이 적국과 교전한 결과 이스라엘 군사의 90%는 죽는다는 것으로 일부 도망자를 제외하고는 모두 전사한다는 무서운 경고입니다. 아모스는 이런 경고를 할 때, 어떤 심정이었을까요?
1-3절은 북 이스라엘을 위한 아모스의 애가입니다. 애가는 매우 슬픈 노래입니다. 아모스는 하나님께서 북 이스라엘을 심판하실 것을 이미 알고 있습니다. 앞장에서 다섯 차례에 걸쳐 일곱 가지의 재앙을 하나님께서 북 이스라엘에 거듭 내리십니다.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께로 돌이키게 하고자 경고하고 알립니다. 그러나 북 이스라엘은 결코 돌이키지 않습니다. 그렇기에 결국 북 이스라엘의 심판은 불가피한 상황이 됩니다. 천명이 행군하던 성읍에 백명, 백명이 행군해 나가던 성읍에는 열명만 남는 완전한 파멸과 살육이 자행될 것임을 수차 경고합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외면합니다.
헌재 우리 시대는 어떤가요? 대한민국은 국론이 둘라 나누어져 실제 내란에 빠진 상태입니다. 같이 할 수 없는 이념 충돌이 나라를 둘러 나누어 놓았습니다. 무엇이 이렇게 우리 공동체를 분열하여 했을까요? 경고하지 않았기 때문이 아닌가 돌아보게 됩니다. 미리 경고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파수꾼이나 지식인들이 자신의 사명을 감당하지 않은 것이 아닌가 돌아보게 합니다. 입에 단 것만 찾는 이 세대에 쓴 소리하는 것을 피하는 일꾼이 없기 때문입니다. 역사를 제대로 가르치지 않았기 때문은 아닌지요? 이 시대 파수꾼의 역할을 뭔지 말씀을 통해 살펴보겠습니다.
Part 2,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4.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족속에게 이와 같이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나를 찾으라 그리하면 살리라
5. 벧엘을 찾지 말며 길갈로 들어가지 말며 브엘세바로도 나아가지 말라 길갈은 반드시 사로잡히겠고 벧엘은 비참하게 될 것임이라 하셨나니
6. 너희는 여호와를 찾으라 그리하면 살리라 그렇지 않으면 그가 불 같이 요셉의 집에 임하여 멸하시리니 벧엘에서 그 불들을 끌 자가 없으리라
7. 정의를 쓴 쑥으로 바꾸며 공의를 땅에 던지는 자들아
8. 묘성과 삼성을 만드시며 사망의 그늘을 아침으로 바꾸시고 낮을 어두운 밤으로 바꾸시며 바닷물을 불러 지면에 쏟으시는 이를 찾으라 그의 이름은 여호와시니라
9. 그가 강한 자에게 갑자기 패망이 이르게 하신즉 그 패망이 산성에 미치느니라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족속에게 말씀하시기를 나를 찾으라 그리면 살리라고 하십니다. 아모스는 특별히 북 이스라엘을 향해 우상을 향한 멸망의 길에서 돌이켜 여호와를 찾으라고 촉구합니다. 그러면 그들이 구원받을 것이지만, 이를 거부하면 하나님의 심판으로 파멸에 이르게 될 것임을 경고합니다.
4절을 보면 하나님은 너희는 나를 찾으라 그러하면 살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6절에서 반복됩니다. 반복은 강조를 의미합니다. 바로 앞 1-3절에서 아모스는 북 이스라엘을 위해 애가를 부릅니다. 이는 북 이스라엘이 비록 그 당시 살아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이미 그 뿌리가 부패하여 죽은 상태임을 의미합니다. 벌써 죽은 상태의 북 이스라엘을 향해 끝까지 기다리시고 한 영혼 이라도 더 구원 얻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와 긍휼을 발견하게 됩니다.
5절에는 ''벧엘을 찾지 말며 길갈로 들어가지 말며 브엘세바로도 나아가지 말라"고 하십니다. 벧엘은 ‘하나님의 집'이란 뜻입니다. 죄를 지은 야곱이 형 에서를 피하여 하란으로 가던 중 거기서 잠을 자다가 꿈속에서 하나님을 뵙고 단을 쌓았던 곳입니다. 더욱이 가나안으로 돌아온 후에도 하나님 앞에 단을 쌓았던 곳입니다. 벧엘은 이스라엘에게 있어서 영적으로 의미가 큰 장소입니다. 또한 길같은 이스라엘이 가나안에 입성하여 최초로 진을 쳤던 곳이자 할례를 시행한 거룩한 곳입니다. 엘리야, 엘리사 시대에 선지자 학교가 있던 곳이기도 합니다. 브엘세바는 약속의 땅의 최남단에 위치한 곳으로 이스라엘의 족장들이 하나님께 단을 쌓았던 역사적인 곳입니다. 이곳 또한 이스라엘에게 있어 매우 큰 의미있는 장소입니다.
이처럼 유서 깊은 이러한 도시이기에 북 이스라엘 백성중에는 이곳에 가면 하나님을 만날 것이라 생각한 것입니다. 북 이스라엘은 예루살렘에 버금가는 신앙의 도시로서 대단하다고 생각하였을 것입니다. 북 이스라엘은 절기는 물론 평상시에도 이들 도시를 찾아 하나님을 예배하고 제사를 드립니다. 특별히 브엘세바는 북 이스라엘이 아닌 남 유다 지역임에도 북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 곳에까지 이르러 제사를 드립니다.
이처럼 신앙적으로 유서 깊은 도시에 하나님께서는 이곳으로 들어 가지도 말라고 왜 명령하신 것일까요? 이들 도시가 여호와 신앙을 표방하고 있지만 그 이면에는 가나안의 우상을 함께 섬기는 종교 혼합주의 도시로서 타락한 신앙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명하신 율법에 비추어 볼 때, 그곳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제시하신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장소도 아니며, 그들이 드린 제사 또한 하나님께서 받지 않으시고 오히려 미워하시는 제사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성소로 오직 단일 중앙 성소만 허락하셨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이 바로 그 단일 중앙 성소였습니다. 우리 시대로 비하면 예수 그리스도만이 구원의 주님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만나려면 예루살렘 성전으로 가야 했고 거기서 제사 드려야 합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이 남북으로 분열된 후에 북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들의 생각을 쫓아 예루살렘 성전이 아닌 벧엘과 길갈과 브엘세바로 가서 하나님을 찾으며 제사를 드린 것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방식이 아닌 자기들의 방식 곧 인본주의적 방식으로 하나님을 찾은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우리가 구원을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이를 부정하는 것과 같이 그들은 이미 여호와 신앙을 떠난 것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14:6)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하였더라''(행4;12)
벧엘, 길갈, 브엘세바는 신앙적으로 유서 깊은 장소들입니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유일 성소인 예루살렘 성전을 무시하고 자기들 임의로 정한 그곳에서 하나님을 찾았습니다. 벧엘, 길갈, 브엘세바는 이스라엘이 이전에 하나님을 거슬러 행한 죄악을 상징하는 장소로 볼 수 있습니다. 벧엘을 찾지 말며, 길갈로 들어가지 말며, 브엘세바로도 나아가지 말라는 말씀은 그들이 이전까지 계속했던 죄악된 삶을 다시는 반복하지 말란는 것입니다. 죄를 근절하고 죄와 분리된 거룩한 삶을 살 것을 명하신 말씀입니다.
8절 북 이스라엘 백성들이 살기 위해 찾아야 할 하나님, 그들이 숭배하던 우상들과 대비되는 하나님이 과연 어떠한 분이신가에 대하여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묘성과 삼성을 만드신 분이라고 합니다. 묘성과 삼성은 욥기에서도 나옵니다.(욥9:9, 35:21) 묘성은 황소자리에 있는 성단을 가리키며, 삼성은 오리온 자리를 가리킵니다. 하나님께서 이러한 묘성과 삼성을 만드셨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주 만물을 지으신 창조주시라는 말입니다. 모든 별은 하나님이 주관하여 만드신 것입니다. 태양, 달, 별도 마찬가지입니다.
또한 하나님은 사망의 그늘을 아침으로 바꾸시고 낮을 어두운 밤으로 바꾸시며 바닷물을 불러 지면에 쏟으시는 분입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우주의 운행을 관장하시는 분이라는 말입니다. 사망의 그늘을 아침으로 바꾸고 낮을 어두운 밤으로 바꾼다' 는 것은 밤과 낮이 오는 것이 우주의 운행을 관장하시는 하나님의 섭리로 말미암은 것임을 말합니다.
우리가 이 세상 모든 만물, 우주 공간에서 조화롭게 운행되는 천체와 자연현상을 조성하신 분, 주관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심을 안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능력과 영광, 그 섬세하심과 은혜로우심을 찬양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조성하신 어 세상 가운데서 더 조화롭고 아름다우며 합당한 삶이 무엇인지를 헤아리며 살아갈 것입니다.
10. 무리가 성문에서 책망하는 자를 미워하며 정직히 말하는 자를 싫어하는도다
11. 너희가 힘없는 자를 밟고 그에게서 밀의 부당한 세를 거두었은즉 너희가 비록 다듬은 돌로 집을 건축하였으나 거기 거주하지 못할 것이요 아름다운 포도원을 가꾸었으나 그 포도주를 마시지 못하리라
12. 너희의 허물이 많고 죄악이 무거움을 내가 아노라 너희는 의인을 학대하며 뇌물을 받고 성문에서 가난한 자를 억울하게 하는 자로다
13. 그러므로 이런 때에 지혜자가 잠잠하나니 이는 악한 때임이니라
14. 너희는 살려면 선을 구하고 악을 구하지 말지어다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의 말과 같이 너희와 함께 하시리라
15. 너희는 악을 미워하고 선을 사랑하며 성문에서 정의를 세울지어다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혹시 요셉의 남은 자를 불쌍히 여기시리라
10-15절은 북 이스라엘 지도자들의 탐욕과 그러한 탐욕을 충족시키기 위해 범하는 죄악들을 지적합니다. 악을 버리고 선을 추구하라는 이중 권유를 통하여 회개할 것을 촉구한 사실을 말합니다.
10-12절은 불의한 북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악상이 무엇인지를 구체적으로 지적하는 내용을 다루고 있습니다. 먼저 10절을 보면 무리가 성문에서 책망하는 자를 미워하며 정직히 말하는 자를 싫어하는도다"라고 합니다. 고대 근동 사회에서 성문의 광장은 사람들이 가장 많이 모이는 곳입니다. 그래서 대규모의 모임은 대부분 성문 광장에서 이루어졌으며 재판도 성문에서 이루어지는 일이 많습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말하는 책망하는 자나 정직히 말하는 자란 누구를 말하는 것입니까? 책망하는 자와 정직히 말하는 자란 바로 아모스와 같이 죄악을 책망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하여 심판을 경고하는 선지자나 지혜자를 말합니다, 이들은 하나님의 메시지를 선포할 때나 지혜의 말을 가르칠 때에 성문의 광장을 주로 이용하곤 하였습니다.
북 이스라엘 사회는 전반적으로 타락해 있었지만 그들 중에는 북 이스라엘의 죄악을 책망하고 하나님의 심판을 경고하는 사역을 감당했던 자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북 이스라엘 대다수의 사람들은 그처럼 자신들을 책망하고 심판을 선포하는 자들을 용납하지 않았고 오히려 혐오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공생애 당시 타락한 종교 지도자들과 유대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입에서 선포되는 책망과 진실을 싫어하고 미워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모든 사람은 책망이나 경고 듣는 것을 본성적으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되도록 귀에 좋은 말, 거짓이어도 자기를 높여주고 칭찬하는 말을 원합니다. 성경은 우리가 이러한 본성적 요구대로 살며 바른 말, 의로운 책망의 말을 거부해서는 안된다고, 만일 그리할 경우 파멸을 피할 수 없다고 경고합니다. 우리는 이러한 성경의 경고를 마음에 새겨야 합니다. 받아들 이기 어려운 말, 책망과 꾸짖음의 말이라도 그것이 진리에 입각한 것이면, 우리 심령과 삶에 유익을 끼치는 것이라면 아무리 쓰디쓴 고통을 준다 해도 기꺼이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것이 진정 우리의 삶을 하나님의 축복 가운데 견고하게 세우는 통로이기 때문입니다.
11절, ''너희가 힘없는 자를 밟고 그에게서 밀의 부당한 세를 거두었은즉 너희가 비록 다듬은 돌로 집을 건축하였으나 거기 거주하지 못할 것이요 아름다운 포도원을 가꾸었으나 그 포도주를 마시지 못하리라"고 말씀합니다. 이는 북 이스라엘의 권력자, 강한 자, 부한 자들이 부당한 방법으로 부를 축적하고, 가난하고 헐벗은 사회적 약자를 압제한 범죄를 지적하고 그에 따른 형벌에 관한 내용입니다. 없고 힘없는 그들의 삶을 철저히 유린하고 파괴하였음을 의미합니다.
14절은 하나님께서 악을 버리고 선을 구할 것을 권유하시며 선을 구하는 자에게는 하나님께서 함께 하실 것임이 약속하십니다. 15절에서는 악을 미워하고 선을 사랑할 것과 성문에서 정의를 세워야 한다는 명령이 주어지고 있습니다. 이러한 본문이 주는 교훈은 너무나도 자명하고 당연하지만, 일면 진부한 말처럼 들려 지기도 합니다. 이러한 본문의 말씀은 이처럼 마치 무수한 지혜자나 현자의 상투적인 가르침처럼 아무렇지도 않게 넘겨 들을 말씀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본문의 말씀은 멸망의 위기에 처한 북이스라엘이 그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으로 제시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한마디로 그들은 매우 다급한 상황에 처해 있었던 것입니다.
이 예언의 말씀이 선포될 당시 북이스라엘은 여로보암 2세의 통치하에 있었으며 국가적으로 크나큰 형통을 구가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처럼 큰 형통을 누리면서도 이에 만족하지 않고 더 큰 형통, 더 풍성한 물질적 번영을 추구하며 살았습니다. 이러한 그들이 자신들이 추구하는 형통과 부, 번영을 얻고자 취한 방범은 번영과 다산, 풍요를 약속하는 우상숭배, 주변 강국과의 외교적 동맹, 가난한 자들을 압제하고 착취하는 것, 탐심을 채우고자 거짓과 불의를 자행하는 것 등이었습니다. 그들이 삶 속에 이러한 일들을 행한 것은 그것이 자기들이 추구하는 번영과 부, 형통을 더 속히, 더 풍성하게, 더 손쉽게 가져다 줄 것이라 믿었기 때문입니다. 다른 어떤 방법보다 하나님의 뜻에 부합한 삶을 살아야 하고,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을 행해야 한다는 일체의 비결을 가르쳐줍니다.
16. 그러므로 주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기를 사람이 모든 광장에서 울겠고 모든 거리에서 슬프도다 슬프도다 하겠으며 농부를 불러다가 애곡하게 하며 울음꾼을 불러다가 울게 할 것이며
17. 모든 포도원에서도 울리니 이는 내가 너희 가운데로 지나갈 것임이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16, 17절은 여호와의 심판 집행으로 인하여 북이스라엘이 부를 애곡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는 북이스라엘을 향한 거듭된 회개 촉구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회개하지 아니함으로 결국 그들이 하 나님의 심판을 받아 파멸에 이르게 될 것임을 나타내주고 있습니다.
모든 사람이 모든 광장에서 울겠고 모든 거리에서 우는 장면, 농부를 불러다 애곡 타게 하며 울음 꾼을 불러다가 울게 하는 장면, 모든 포도원에서 우는 장면이 묘사되고 있습니다. 이는 장례식장의 풍경을 연상케 하는 것으로 개인의 어느 한 집을 말하는 것 이 아니라 북 이스라엘 전역을 염두에 둔 표현입니다. 북 이스라엘 전체가 초상이 난 것처럼 비통함에 휩싸여 울고 또 울 것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17절 전국적으로 애곡하는 소리가 들려지는 이유에 대해 하나님께서 북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로 지나가실 것이기 때문이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 사이를 지나가실 것이라는 말씀의 의미는 무엇 입니까? 이는 무서운 심판의 말씀입니다.
이는 마치 칼이나 창이 사람의 배나 가슴을 뚫고 지나가듯이 하나님께서 그들을 관통하실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마치 한 뛰어난 장수가 전쟁터에서 하나의 칼을 들고 전진을 관통하며 무수한 병사를 죽이는 것처럼, 하나님의 심판의 칼날이 이스라엘이라는 공동체를 관통함으로 완전한 파멸과 죽음에 이르게 될 것임을 상징적으로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는 당대 최강국 앗수르의 북 이스라엘 침공과 폭압을 말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모스가 말한 그대로 이스라엘 가운데로 지나가심으로 이스라엘을 심판하셨고 아 모스가 부른 애가대로 이스라엘에는 곳곳에 죽은 자들로 넘쳐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그 종을 통해 주신 말씀은 한마디라도 결코 땅에 떨어지는 법이 없습니다. 그 말씀은 분명히 성취되고 이루어지는 절대불변의 진리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일들은 본문이나 성경의 어느 한 두 곳에서만 발견되는 일은 아닙니다. 실로 성경에 하나님께서 그 종으로 하신 말씀 중 어느 하나라도 허망하게 끝난 것은 없습니다. 그 모든 것은 실로 하나도 허무하게 끝 나지 않으며 그 말씀 그대로 이루어졌습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전능하실뿐 아니라 완전하시며 신실하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당시 현실과 직결된 것이든, 가까운 미래 에 될 일이든, 먼 미래에 될 일이든 그 역시 도 중요치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하신 모든 말씀은 온전히 빠짐없이 그대로 성취되었을 뿐입니다.
아모스 선지자는 자기 나라도 아닌 북 이스라엘에서 심판의 경고를 전하다가 몰매를 맞습니다. 암7장입니다.
- 그때 벧엘의 제사장 아마샤가 이스라엘 왕 여로보암에게 사람을 보내 이렇게 알렸다. “이스라엘의 백성 가운데 아모스가 왕을 배반해 반란을 계획했습니다. 이 나라가 아모스가 말한 모든 것을 참을 수 없습니다.
- 아모스가 이렇게 말했다. ‘여로보암은 칼에 맞아 죽고 이스라엘은 분명코 자기 땅에서 사로잡혀 포로로 끌려가게 될 것이다.’”
- 또 아마샤는 아모스에게도 말했다. “예언자야, 너는 유다 땅으로 도망쳐라. 유다에 가서 거기서 예언하며 벌어먹어라.
- 더 이상 벧엘에서는 예언하지 마라. 이곳은 여로보암 왕의 성소이며 왕의 궁궐이다.”
아모스는 남 유다 사람이지만 북 이스라엘에 가서 심판의 메시지를 전하다가 그곳 선지자라고 하는 아마샤로부터 핍박을 받습니다. ‘너는 유다 땅으로 도망쳐라. 유다에 가서 거기서 예언하며 벌어먹어라.’ 이는 거의 망발에 가까운 저주입니다.
참 선지자는 사람들이 듣기에 싫어해도 하나님 말씀을 전해야 합니다. 여러분은 현재 대한민국이 처한 내전 상황을 보면서 어떤 생각이 드는지요? 나와는 상관없다고 생각하지는 않는지요? 나는 말고 다다른 분들이 나서주기를 바라고 있지는 않는지요? 나는 그런 분야에 정치에는 관심이 없어 하지는 않는지요? 그럼 아모스는 어떤 사람 이었을까요? 그는 일반적으로 말하는 정통 선지자가 아닙니다. 그는 목축업자 사업가입니다. 하나님께서 선지자를 세운 기준은 무엇이겠습니까? 하나님을 진심으로 얼마나 마음을 다해 찾고 하나님의 공의를 원하는 자인가를 우선으로 보지 않겠습니까? 그 심정에 하나님 공의가 가득하다면 그 선지자가 가만히 있을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외치는 것입니다. 그 시대를 보면서 위기라고 소지를 지르는 것입니다. 불법과 불의를 보면 외치는 차가 선지자입니다. 하나님과 깊이 소통하기 때문입니다. 진리의 영이신 하나님께서 진실하게 찾는 자들에게 진실로 응답하시기 대문입니다.
불의 앞에 침묵하는 자는 엉터리입니다. 불의를 보면 의분의 나팔을 불어야 합니다. 경적을 울려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직무유기가 되는 것입니다; 불이 나면 비상벨을 울리듯이 말입니다. 전쟁이 나면 이스라엘은 나팔을 붑니다. 정의로운 자들은 나팔을 불면서 본인의 행동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먼저 솔선수범, 진솔하고, 경건하고, 배려하고, 힘든 일부터 감수해야 합니다. 그러면서도 삶의 균형을 잡아야 합니다. 저 자신을 돌아볼 때, 왜 그렇게 상대방을 배려하지 못하고 살아왔을까 하는 자괴심이 많이 들기도 합니다. 균형감각없이, 한길만을 고수하며, 치우쳐 살아온 것이 아닌가 돌아보게 됩니다.
사랑하는 지지교회 여러분,
우리는 어떤 마음으로 이 시대를 살아가는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우리 공동체는 하나님 말씀을 기준으로 공의로 삼아 판단하고 행동해야 합니다. 우리 스스로 돌아보면서 자정하고 가장 중요한 것아 무엇인지를 돌아보아야 합니다. 왜 아모스는 그 시대를 보면서 선지자로서 외칠 수 있었는지를 묵상하면서 이 시대에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주신 사명이 뭔지 자문하는 한 주간 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