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RMON TEXT

만왕의 왕께 드리는 예배 [스가랴 14:16-21]

만왕의 왕께 드리는 예배

스가랴 14:16-21

16. 예루살렘을 치러 왔던 이방 나라들중에 남은 자가 해마다 올라와서 그 왕 만군의 여호와께 경배하며 초막절을 지킬 것이라
17. 땅에 있는 족속들중에 그 왕 만군의 여호와께 경배하러 예루살렘에 올라오지 아니하는 자들에게는 비를 내리지 아니하실 것인즉
18. 만일 애굽 족속이 올라오지 아니할 때에는 비 내림이 있지 아니하리니 여호와께서 초막절을 지키러 올라오지 아니하는 이방 나라들의 사람을 치시는 재앙을 그에게 내리실 것이라
19. 애굽 사람이나 이방 나라 사람이나 초막절을 지키러 올라오지 아니하는 자가 받을 벌이 그러하니라
20. 그날에는 말 방울에까지 여호와께 성결이라 기록될 것이라 여호와의 전에 있는 모든 솥이 제단 앞 주발과 다름이 없을 것이니
21. 예루살렘과 유다의 모든 솥이 만군의 여호와의 성물이 될 것인즉, 제사드리는 자가 와서 이 솥을 가져다가 그것으로 고기를 삶으리라 그날에는 만군의 여호와의 전에 가나안 사람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라

16And it shall come to pass that everyone who is left of all the nations which came against Jerusalem shall go up from year to year to worship the King, the Lord of hosts, and to keep the Feast of Tabernacles. 17And it shall be that whichever of the families of the earth do not come up to Jerusalem to worship the King, the Lord of hosts, on them there will be no rain. 18If the family of Egypt will not come up and enter in, they shall have no rain; they shall receive the plague with which the Lord strikes the nations who do not come up to keep the Feast of Tabernacles. 19This shall be the punishment of Egypt and the punishment of all the nations that do not come up to keep the Feast of Tabernacles. 20In that day “HOLINESS TO THE LORD” shall be engraved on the bells of the horses. The pots in the Lord’s house shall be like the bowls before the altar. 21Yes, every pot in Jerusalem and Judah shall be holiness to the Lord of hosts. Everyone who sacrifices shall come and take them and cook in them. In that day there shall no longer be a Canaanite in the house of the Lord of hosts.

제가 자란 고향 본가 바로 앞 집에는 6.25 전쟁으로 피해를 입은 친척 되는 할아버지 한 분이 힘들게 사셨습니다. 그 분은 왼쪽 손목 하나가 6.25 전쟁시 남겨진 폭탄의 폭발로 날라가 버린 것입니다. 농사를 지을 때나, 무엇을 하던 힘들고 몹시 불편해 보였습니다. 그리고 6.25전쟁으로 제 큰 형님(1947년생)은 김해평야로 피난을 가면서 아버지가 형님을 잃어버리지 않으려고 새끼 줄로 묶어서 가족이 이동을 하였다고 합니다. 당시 피난지 김해에서 어머니는 작은 형님(1950년생)을 낳아 안고 고향으로 돌아옵니다. 특히 어머니가 죽을 만큼 고생한 것입니다. 각지에서 모여든 수많은 사람들로 먹을 것도 없고, 잠자리는 없고, 말할 것도 없이 불편한 아비규환 등 상상하기 끔직한 장면 들입니다. 아무런 죄 없는 분들이 고통을 그냥 당한 것입니다. 하물며 나라가 망하여 바벨론 포로로 포승줄 등으로 끌려간 유다인들은 당시 그 형편이 어떠했겠습니까?

BC586년 유다는 바벨론 침공으로 수많은 살육을 당하고 3차 포로가 되어 수많은 하나님 백성들이 바벨론으로 끌려갑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대로 70년이 지나 고향 유다로 돌아오게 합니다. 이들은 어떤 생각이 들었을까요? 우리가 하나님 백성이 맞는가? 그렇다면 왜 이런 살육과 도륙을 당하고 포로가 되어 타국에서 그것도 이방 신이나 잡신을 섬기는 야만족에게 말인가? 하는 회의가 물밀듯이 몰려왔을 겁니다. 우린 하나님 백성이 맞기는 한 것인가? 하는 극도의 회의감이 그들을 엄습했을 것입니다.

이에 스가랴 14장 16절부터 21절 말씀을 통해 하나님께서 이루실 최종적인 구원과 통치의 모형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스가랴서는 구약의 마지막 선지서 중 하나로,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온 백성에게 성전 재건을 독려하며 '여호와의 날'에 있을 심판과 회복을 예언합니다. 오늘 본문은 그 여호와의 날, 곧 주님의 재림 이후 완성될 영원한 나라의 모습을 아주 압축적으로 보여줍니다. 말씀을 통해 그 본질이 뭔지 살펴보겠습니다.

1. 열방이 참여하는 영원한 예배 (16-19절)

16. 예루살렘을 치러 왔던 이방 나라들중에 남은 자가 해마다 올라와서 그 왕 만군의 여호와께 경배하며 초막절을 지킬 것이라

17. 땅에 있는 족속들중에 그 왕 만군의 여호와께 경배하러 예루살렘에 올라오지 아니하는 자들에게는 비를 내리지 아니하실 것인즉

18. 만일 애굽 족속이 올라오지 아니할 때에는 비 내림이 있지 아니하리니 여호와께서 초막절을 지키러 올라오지 아니하는 이방 나라들의 사람을 치시는 재앙을 그에게 내리실 것이라

19. 애굽 사람이나 이방 나라 사람이나 초막절을 지키러 올라오지 아니하는 자가 받을 벌이 그러하니라

스가랴는 놀라운 환상을 보여줍니다. 예루살렘을 치러 왔던 이방 나라들 중 남은 자가 해마다 올라와서 만군의 여호와께 경배하며 초막절을 지킬 것이라고 선포합니다(16절). 과거에는 이스라엘 백성만이 절기를 지켰으나, 이제는 열방이 하나님을 왕으로 인정하고 자발적으로 예배에 참여하는 시대가 온다는 것입니다. 이는 믿을 수 없는 상상으로 보이지 않습니까?

초막절은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 40년 동안 하나님의 보호 아래 장막(초막)에 거했던 것을 기억하며, 하나님의 은혜와 임재에 감사하는 절기입니다. 열방이 초막절을 지킨다는 것은, 모든 민족이 구원의 역사를 베푸신 하나님을 찬양하며, 하나님의 다스림을 인정하고 순종한다는 의미입니다. 이는 아브라함에게 주신 약속,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얻으리니"(창 22:18)의 궁극적인 성취입니다.

이어지는 17-19절은 예배를 거부하는 자들에게 임할 심판을 경고합니다. 만군의 여호와께 경배하러 올라오지 않는 족속에게는 비를 내리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농경 사회에서 비가 내리지 않는 것은 곧 생명의 단절, 저주와 심판을 의미합니다. 이는 마치 현대 우리 아파트 문화에서도 갑자기 단수가 되면 사람들은 삶에 심각한 애로를 겪게 되는 것으로 유추할 수 있습니다. 애굽 족속을 특별히 언급한 것은(18절), 애굽이 가나안 신 바알을 섬기며 풍요의 신에게 비를 의존하던 대표적인 이방 국가였기 때문에, 하나님의 주권만이 생명의 근원임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신명기 28장의 복과 저주 선언을 상기시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그분을 섬기는 자에게는 복이 임하고, 불순종하는 자에게는 저주가 임한다는 구약의 핵심 원리가 종말의 시대에도 여전히 적용됨을 보여줍니다. 예배와 순종이야말로 하나님의 통치를 인정하는 가장 근본적인 행위이기 때문입니다.

현재 한국교회의 최대 다수인 장로교는 ‘존 낙스’의 고난과 희생과 양심으로 출발한 개신교입니다. 개신교 중 대한민국은 장로교가 65%정도를 점유합니다. 참고로 미국은 침례교가 85-90% 정도됩니다. 16세기 스코틀랜드 종교개혁자 존 낙스(1505?-1572)는 "하나님, 스코틀랜드에 개혁을 주시든지, 아니면 나에게 죽음을 주시든지 하십시오!"라고 기도합니다. 그의 기도와 노력으로 스코틀랜드에 영적 대각성이 일어나고, 사람들의 삶의 모든 영역이 변화됩니다. 술집과 유흥업소가 문을 닫았고, 사람들은 일상생활 속에서 경건의 옷으로 갈아 입습니다. 이처럼, 참된 예배와 순종이 회복될 때, 하나님의 생명력은 사회 전체에 비처럼 내리는 것입니다. ‘존 낙스’는 스코틀랜드에서 종교개혁 중에 포로가 되어 프랑스로 잡혀가 노예선을 타게 됩니다. 갤리선 노예 시절 ‘존 낙스’는 루아르(Loire)강의 갤리선에서 로마 가톨릭교회 신부가 성모상을 보여주면서 “신을 모독한 이단자들, 성모에게 경배하라.”고 명령하지만 성모? 하고는 냉소하면서 ‘이것은 하나님의 어머니가 아닌 '색칠한 나뭇조각' 하고는 경배는 커녕 강물에 내던져버립니다. 존 낙스의 이런 정신 이것이 진정한 예배자의 자세입니다. 하나님만을 우리 중심에 두어야 합니다.

2. 여호와께 성결 (20-21a)

20. 그날에는 말 방울에까지 여호와께 성결이라 기록될 것이라 여호와의 전에 있는 모든 솥이 제단 앞 주발과 다름이 없을 것이니

21. 예루살렘과 유다의 모든 솥이 만군의 여호와의 성물이 될 것인즉,

20절은 아주 충격적이고 아름다운 환상을 보여줍니다. 그 날에는 "말 방울에까지 여호와께 성결이라 기록될 것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여호와의 전에 있는 모든 솥이 제단 앞 주발과 다름이 없을 것이며", "예루살렘과 유다의 모든 솥이 만군의 여호와의 성물이 될 것"이라고 합니다.

'여호와께 성결' 의미는 원래 대제사장의 이마에 달린 금패에 새겨져 있던 문구입니다(출 28:36). 이는 가장 거룩한 것, 하나님께 완전히 구별된 것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이 문구가 '말 방울'에 까지 새겨집니다. 말은 당시에는 전쟁과 일상생활에 사용되던 가장 일반적이고 세속적인 도구입니다. 또한 제사를 드릴 때 고기를 삶던 '솥'도 피를 담아 제단에 사용하던 '주발'처럼 거룩하게 됩니다. ‘말방울’이나 ‘솥’은 하찮은 물건들입니다. 이런 물건들도 하나님이 쓰시면 성물, 즉, 거룩한 물건으로 변화된다는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의 나라가 완성될 때, 거룩과 속됨의 구분이 사라지고 삶의 모든 영역이 하나님께 구별되어 성결하게 될 것을 의미합니다. 거룩은 더 이상 성전이나 제사에만 국한되지 않고, 우리의 일터, 가정, 취미생활, 심지어 가장 하찮은 물건에까지 미치게 됩니다.

우리의 삶 역시 구약의 성전과 세상처럼 구별되어 있지는 않습니까? 예배에서는 거룩한 성도이지만, 일터와 가정에서는 세상 사람과 다를 바 없는 속된 삶을 살고 있지는 않는지요? 이 말씀은 신약 시대의 성도들에게 더욱 큰 도전으로 다가옵니다.

사도 바울은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 자신의 것이 아니라 /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고전 6:19-20)고 전파합니다. 우리 성도 한 사람 한 사람이 성령이 거하시는 성전이기에, 우리의 모든 언행과 생각, 심지어 우리의 일상생활을 담아내는 모든 '솥'(도구, 직업, 소유물)이 '여호와께 성결'이라는 인장이 찍혀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삶에서의 예배입니다.

중세 영국의 노동 윤리에는 '소명의식'(Calling)이 있었습니다. 어느 농부가 들판에서 땀 흘려 일하며 "나는 지금 땅을 갈고 있지만, 나는 하나님의 종이다. 이 농사도 주님께 영광을 돌리는 거룩한 일이다"라고 생각하며 일하게 합니다. 그의 쟁기나 흙 묻은 신발이 바로 그에게는 '여호와께 성결'이 새겨진 '말 방울'이나 다름없습니다. 이처럼, 우리가 무슨 일을 하든지 주님을 위한 일로 여길 때, 우리의 일상은 거룩한 예배의 현장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각자 주어진 환경에서 소명의식을 새롭게 다짐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현재 우리에게 나에게 주신 일을 소명으로 여겨야 합니다. 가장은 가장답게, 직장인은 직장인답게, 군인은 군인답게, 지도자는 섬기는 자답게, 말씀을 전하는 자는 간절하게 대언자답게 말입니다.

3. 완전한 정화 (21b)

제사드리는 자가 와서 이 솥을 가져다가 그것으로 고기를 삶으리라 그날에는 만군의 여호와의 전에 가나안 사람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라

마지막 21절 하반절은 "그 날에는 만군의 여호와의 전에 가나안 사람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라"고 마무리합니다. '가나안 사람'의 의미는, 구약에서 가나안 사람은 불신앙, 우상 숭배, 악행을 상징하는 민족입니다. 이들이 성전 안에 없다는 것은, 장차 완성될 하나님 나라에는 세속적인 불순물이나 죄악의 요소가 전혀 없을 것을 의미합니다. 오직 순결하고 거룩한 백성들만이 영원토록 하나님을 예배할 것입니다.

이 종말론적인 약속은 현재 우리에게 거룩한 삶을 요청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이미 그리스도 안에서 '성결하게 구별된 자'임을 선포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그 완성될 나라를 소망하며, 우리 안에 남아 있는 '가나안 사람'과 같은 죄의 습성, 세속적인 가치관을 끊임없이 제거해야 합니다. 우리 모두는 마음부터 변화를 받아야 합니다. 우리 스스로는 할 수 없지만 하나님을 신뢰하므로 우리는 할 수 있다고 변화되어야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께서 선지자를 통해 이미 말씀으로 약속하셨기 때문입니다.

모세5경 중에 레위기, 신명기, 민수기에 초막절이 나옵니다. 초막절의 의의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초막절을 지키게 함으로써,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인도하신 후 광야에서 초막에 거주한 것을 이스라엘 대대로 기억하고 이를 알게 하려는 것입니다. 이런 광야에서의 이동 중에서 풍성한 결실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면서, 광야 40년간 함께 하셨던 하나님을 자손 대대로 기억하게 하라는 것입니다. 스가랴서에서는 초막절을 지키지 않으면 재앙을 받고 비를 받지 못한다는 경고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당시 비는 생명을 의미하는 단어입니다. 비가 내리지 않으면 만물은 다 말라 죽습니다. 요한복음 7장에는 예수님도 초막절을 지킨 기록이 나옵니다. 초막절을 지켜야 영혼이 영적 갈증에서 해소되어 구원을 받는다는 뜻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이 생명수는 성령을 의미합니다. 성령의 인도함을 받는 우리 모두가 되어야 합니다. 특히 스가랴서는 성령을 강조합니다. 스가랴4:6 그가(천사가) 내게(스가랴) 대답하여 이르되 여호와께서 스룹바벨에게 하신 말씀이 이러하니라 만군의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이는 힘으로 되지 아니하며 능력으로 되지 아니하고 오직 나의 영(성령)**으로 되느니라

스가랴 14장 16절부터 21절 말씀을 통해 하나님께서 이루실 최종적인 구원과 통치의 그림을 살펴보았습니다. 스가랴서는 구약의 마지막 선지서 중 하나로,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온 백성에게 성전 재건을 독려하며 '여호와의 날'에 있을 심판과 회복을 예언합니다. 오늘 본문은 그 여호와의 날, 곧 주님의 재림 이후 완성될 영원한 나라의 모습을 가장 압축적으로 보여줍니다.

이 말씀은 세 가지 핵심 주제를 담고 있습니다. 첫째, 열방이 주께 경배하는 보편적인 예배입니다(16-19절). 둘째, 삶의 모든 영역이 거룩하게 되는 성결입니다(20-21절 상반절). 셋째, 하나님 나라에 불순물이 전혀 없는 완전한 정화입니다(21절 하반절). 이 세 가지 영광스러운 완성을 통해 우리는 현재의 삶에서 어떻게 거룩을 향해 나아가며 영원한 예배자로 살아가야 할지 교훈을 얻어야 합니다.

스가랴의 예언은 먼 미래의 환상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어야 합니다. 만 왕의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초림으로 이미 시작되었고, 재림으로 완성될 그 나라를 바라보며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이 되어야 합니다.

1. 온전한 예배자가 되어야 합니다. 일상의 모든 순간을 하나님을 왕으로 인정하고 섬기는 초막절 예배에서처럼 우리는 하나님의 역사하심에 감사하며 예배하는 자세로 살아야 합니다. 초막절은 이스라엘이 출애굽을 기념하면서 8일간 광야에서 텐트를 치고 하나님 은혜를 기억하고 감사하는 것입니다. 어디를 가던 우리 거처는 하나님께서 마련하여 주신다는 확신을 가지고 하나님을 예배하므로 감사하면서 이 땅을 살아가야 합니다.

2. 삶에 모든 영역에 우리는 거룩해야 합니다. 사소한 것인 ‘말 방울’과 ‘솥’에까지라도 '여호와께 성결'을 새겨야 합니다. 우리 직업, 가정, 관계, 심지어 사소한 습관까지도 하나님께 구별하여 드려야 합니다. 이런 자세가 삶의 예배입니다.

3. 날마다 회개해야 합니다. 잠들기 전, 하루를 돌아보아야 합니다. 우리 마음의 성전에서 '가나안 사람’과 같은 죄악의 요소를 몰아내고, 순결한 예배자로 살아가는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부족한 자신이 나태하지는 않는지 반성해야 합니다. 죄악된 구습으로부터 영적으로 옳음을 구별하여 살아야 합니다. 우리 삶이 균형적인 삶인지도 살펴 보아야 합니다. 이기적인 삶은 아닌지도 돌아보아야 합니다.

1950년 6.25전쟁이 왜 일어났는가 우리는 다 이해할 수 없습니다. ‘자유 민주주의’와 ‘공산주의’ 중 어떤 시스템이 나은지를 극명하게 보여준 전쟁이 6.25전쟁입니다. 당시 대한민국은 부산만 남겨두고 全國이 공산당의 손아귀에 들어갑니다. 그 이후 전세계 자유 우방 16개국이 6.25전쟁에 참전하여 전세를 역전시킵니다. 그리고 오늘날 남북은 어떤 체제가 나은지 극명하게 전세계에 보여 주고 있습니다. 자유 민주주의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시스템 이라는 사실을 많은 희생을 통해 알려주신 것입니다.

선지자 스가랴는 BC 586년 유다가 바벨론의 침공을 받아 예루살렘이 함락된 후 70년이 지나, 그 당시의 상황을 직시하면서 신실하신 하나님을 다시 만나게 됩니다. 왜 하나님이 유다를 버렸는가? 하나님은 유다를 버리고 징계하는 것이 목적인가? 바벨론 1차포로는 BC 605년 이므로 실제 본국 유다로 돌아오는 기간은 90년이 지난 시점입니다. 본국으로 돌아오는 후손들은 신앙의 유산을 물려받았을 것입니다. 동시에 하나님에 대한 불신도 많았을 것입니다. 왜 자신들은 하나님의 백성인데 이렇게 포로로 잡혀가 고난을 받는가 하고 말입니다. 이는 하나님 앞에 순결하라는 말입니다. 가나안 백성(이방 백성)들처럼 살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리하면 하나님께서 그들의 가장 낮은 곳까지 동행하시고, 지켜주신다는 의미입니다. 회복시켜 주신다는 훈계이며 비전입니다. 어떤 비전입니까? 하나님께서는 만민이 구원을 받기를 바라시는 분이십니다. 그래서 온 마음으로 하나님을 예배하고, 하나님을 영접하고, 인정하고 순결하게 살라는 말입니다. 잘못은 회개하고 돌아오라는 메시지입니다. 이방인들도 다 하나님께로 돌아와야 한다는 메시지입니다.

뿐만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만유를 회복시키시는 것이 하나님 뜻임을 만방에 드러내십니다. 유다와 이스라엘을 침공한 바벨론도, 앗수르도, 애굽도, 모든 이방 나라들도 가나안 정신(이방 문화), 즉 하나님을 배척하는 불순종과 이방신을 버리고 하나님께로 돌아오라는 메시지입니다. 하나님이 유다를 망하게 하고는 바벨론으로 그 백성을 보내는 것에는 하나님 뜻이 있다는 말입니다. 당시 바벨론 사람들에게 포로로 끌려온 유다 사람들로부터 하나님 백성들은 어떻게 생활하는지 목도하게 하는 것입니다. 특히 바벨론으로 1차 포로로 끌려온 다니엘과 그 친구들을 통해 하나님 백성은 뭔가 다르구나 하는 것을 목도하게 합니다. 구약 스가랴서는 신약의 요한계시록에 대비할 수 있습니다. 두 성경에는 묵시(은근히 드러냄)와 환상이 많습니다. 스가라가 당대 최 강국 바벨론을 통해, 사도 요한이 당대 패권국 로마를 상대로 유비(PARABLE)로 풀어가듯이 말입니다.

우리는 만사에 우리 주변에 일어나는 일들을 통해 왜 이런 일이 벌어질까 많은 생각을 할 수 있습니다. 이럴 때 하나님의 뜻이 무엇일까 돌아보는 우리들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일본으로 진출하는 우리 가정에 하나님 뜻이 있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우리 자매에게도 당장 우리는 이해하지 못하지만 하나님 뜻을 구하면서 기도로 나아가는 우리들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늘 거룩한 예배로 올려 드리는 은혜가 충만한 우리들의 삶이 될 수 있기를 권면합니다. 우리 삶이 예배가 되어야 합니다. 삶의 현장이 우리 예배가 되어야 합니다. 이때 우리는 기도하고 행동으로 실천하게 될 것입니다. 당장 이해되지 않더라도 말씀을 잠잠히 묵상함으로써 하나님 마음을 닮고 투쟁하는 우리 모두가 되어야 합니다. 당장 응답이 없어도 하나님을 신뢰하며 더욱 간절하게 부르짖는 우리 모두가 되어야 합니다. 성령 하나님과 기도로, 행동으로 교통하는 우리 삶이 되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