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RMON TEXT

참 은혜와 우리의 평강 [베드로전서 5:12-14]

참 은혜와 우리의 평강 [베드로전서 5:12-14]

12. 내가 신실한 형제로 아는 실루아노로 말미암아 너희에게 간단히 써서 권하고 이것이 하나님의 참된 은혜임을 증언하노니 너희는 이 은혜에 굳게 서라
13. 택하심을 함께 받은 바벨론에 있는 교회가 너희에게 문안하고 내 아들 마가도 그리하느니라
14. 너희는 사랑의 입맞춤으로 서로 문안하라 그리스도 안에 있는 너희 모든 이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12By Silvanus, our faithful brother as I consider him, I have written to you briefly, exhorting and testifying that this is the true grace of God in which you stand. 13She who is in Babylon, elect together with you, greets you; and so does Mark my son. 14Greet one another with a kiss of love. Peace to you all who are in Christ Jesus. Amen.

초등학교 시절 저에게 괴롭힘을 당한 친구가 있습니다. 그 이름은 000입니다. 저는 순둥이라고 할 정도로 다른 친구들을 괴롭히는 일이 없는 순진무구한 아이였습니다. 제가 그 애를 괴롭혔다고 하기보다는 그 친구가 선생님이 지시하는 미술 준비를 잘 해오지 않아 제가 불편함으로 친구 손목을 꼬집어 계속 괴롭힌 것입니다. 얼마나 아픈지 그 애가 많이 울었습니다. 아직 그 죄책감이 제 머리에 남아 있습니다. 지금은 그 친구에게 ‘정말 미안하이, 정말 미안해’ 하는 심정입니다. 현재 동기들 명부에 그 친구 연락처가 없는 것으로 보아, 아마 아주 어렵게 살아가지 않을까 추측합니다. 당시 어린 아이들은 학교에 온다는 것이 어떻게 보면 거의 기적에 가까운 형편에 있는 친구들이 좀 있었습니다. 먹을 밥이 없는데, 입을 옷도 없는데 학교는 무슨 학교? 하시는 부모님들이 많았을 것입니다. 아마 그 친구도 형편이 어려워 학교는 오지만 어떤 도움도 받지 못하고 미술 준비는 할 엄두도 못 할 형편이었을 것입니다.

만나는 것보다 헤어지는 것이 훨씬 어렵다는 말이 있습니다. 나이가 들면서 이런 말이 가슴에 진하게 다가옵니다. 제가 회사 Groupware 명단을 보면 퇴사자들이 어떤 사람들이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 분들도 많습니다. 특히 헤어짐이 중요한데 제가 하는 business가 그런 경향이 강합니다. 최근 우리나라 현상 또한 이런 분위기를 부추깁니다. 정의, 진리, 진실, 배려는 발을 붙이기 힘든 국면이 되어가는 중입니다.

오늘 말씀은 베드로전서 마지막 부분입니다. 한 권의 책을 마무리하는 것은 언제나 특별한 감회를 줍니다. 책의 저자가 마지막으로 독자에게 남기고 싶은 가장 중요하고 간절한 메시지가 바로 이 마지막 부분에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함께 나눌 이 세 구절은, ‘사자들의 굴’과도 같은 험난한 세상 속에서 믿음을 지키기 위해 분투하던 초대교회 성도들을 향한 노(老)사도 베드로의 마지막 숨결과도 같은 따뜻한 격려이자, 간절한 축복입니다.

1. 고난을 이기는 하나님의 참된 은혜

베드로는 하나님의 ‘참된 은혜’ 위에 굳게 서라고 명령합니다. 12절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12. 내가 신실한 형제로 아는 실루아노로 말미암아 너희에게 간단히 써서 권하고 이것이 하나님의 참된 은혜임을 증언하노니 너희는 이 은혜에 굳게 서라

“내가 신실한 형제로 아는 실루아노로 말미암아 너희에게 간단히 써서 권하고 이것이 하나님의 참된 은혜임을 증언하노니 너희는 이 은혜에 굳게 서라”

베드로전서 전체의 주제는 ‘고난 속의 소망’입니다. 당시 성도들은 불같은 시험과 이유 없는 비방, 극심한 박해 가운데 있습니다. 언제 끝날지 모르는 고난 앞에서 그들의 믿음은 흔들릴 수밖에 없습니다. 바로 그런 성도들을 향해 베드로는 편지를 마무리하며 다시 한번 핵심을 짚어줍니다. “여러분, 제가 지금까지 말한 모든 것, 즉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로 말미암은 구원, 잠시 겪는 고난 뒤에 올 영원한 영광, 그리고 나그네와 같은 인생길에서 우리를 붙드시는 하나님의 손길,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참된 은혜’입니다. 그러니 이 은혜 위에 굳게 서십시오!”

우리가 생각하는 은혜는 무엇입니까? 때로는 고난이 없는 삶, 모든 일이 형통하는 것을 은혜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베드로가 말하는 ‘참된 은혜’는 환경과 상황을 뛰어넘는 은혜입니다. 고난이 사라지는 것이 은혜가 아니라, 고난 속에서도 우리를 붙드시고, 그 고난을 통해 우리를 더욱 정금같이 만들어 가시는 하나님의 신실하신 사랑과 계획 전체가 바로 ‘참된 은혜’인 것입니다. 로마서 5장 3-4절은 이렇게 증언합니다.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환난이 소망으로 바뀌는 신비,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참된 은혜의 능력입니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네덜란드의 코리 텐 붐(Corrie ten Boom, 1892-1983) 여사와 그녀의 가족은 유대인들을 숨겨주었다는 이유로 나치에 체포됩니다. 이후 악명 높은 라벤스브뤼크 강제수용소로 보내집니다. 그곳에서 그녀는 사랑하는 언니 벳시를 잃고, 인간 이하의 참혹한 대우를 받습니다. 전쟁이 끝난 후 기적적으로 석방된 그녀는 전 세계를 다니며 하나님의 용서와 사랑을 전하는 사역을 시작합니다. 어느 날, 독일의 한 교회에서 간증을 마친 후 한 남자가 그녀에게 다가옵니다. 그 남자는 바로 라벤스브뤼크 수용소에서 가장 악랄하게 자신과 언니를 괴롭혔던 간수였습니다. 그는 이제 크리스천이 되었다며 용서를 구하기 위해 손을 내밉니다. 코리 텐 붐 여사는 그 순간 온몸이 얼어붙는 것 같았다고 고백합니다. 도저히 그 손을 잡을 수 없습니다. 그러자 마음속으로 기도하는 순간, “내가 너의 죄를 용서한 것처럼 너도 용서하라”는 주님의 음성을 듣습니다. 그녀는 자신의 힘이 아닌, 자신을 위해 십자가에서 모든 것을 내어주신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의지하여 그 손을 잡습니다. 그녀는 훗날 이렇게 고백합니다. “그 손을 잡는 순간, 놀라운 하나님의 사랑과 평강이 내 마음속에 전류처럼 흘러 들어오는 것을 느꼈습니다. 용서는 감정이 아니라 의지의 순종이었고, 그 순종 위에 하나님의 참된 은혜가 임했습니다.”

우리의 삶에도 우리가 예기치 못한 크고 작은 시련의 바람이 늘 불어옵니다. 그때 우리가 붙들어야 할 것은 눈앞의 상황이 아니라, 십자가를 통해 확증된 ‘하나님의 참된 은혜’일 것입니다. 실루아노가 베드로 곁에서 신실한 동역자로 섬기며 이 편지를 대필했듯, 우리 또한 서로에게 이 참된 은혜를 증언하고 격려하는 신실한 믿음의 동역자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할 때 우리는 어떤 고난의 폭풍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고 믿음의 반석 위에 굳게 설 수 있을 것입니다.

2. 세상 속 성도의 정체성과 교제

둘째로, 베드로는 세상 속에서 성도가 어떤 정체성을 가지고 살아가야 하는지를 보여줍니다. 13절 말씀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택하심을 함께 받은 바벨론에 있는 교회가 너희에게 문안하고 내 아들 마가도 그리하느니라”

‘바벨론’은 실제 메소포타미아 지역의 바벨론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당시 초대교회 성도들에게 ‘바벨론’은 하나님을 대적하고 성도들을 핍박하는 로마 제국을 상징하는 암호와 같은 단어였습니다. 구약 시대에 바벨론이 이스라엘을 멸망시키고 백성들을 포로로 끌고 갔듯이, 로마 제국은 황제 숭배를 강요하며 교회를 핍박하는 영적 바벨론입니다. 베드로는 지금 “우리는 적의 심장부, 이 거대하고 음란하며 우상으로 가득한 바벨론과 같은 세상 한복판에 살고 있습니다”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오늘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됩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은 어떻습니까? 하나님의 가치보다 물질과 성공, 쾌락을 더 중요하게 여기는 문화가 팽배합니다. 진리는 상대적인 것이라 말하며, 거룩과 순결은 낡은 유물처럼 취급받습니다. 이러한 세상은 성도들에게 영적인 ‘바벨론’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 살지만, 세상의 가치관을 따르지 않고 하늘의 시민권을 가진 자들로 부름받았습니다.

바로 이 영적 바벨론 속에서 교회가 해야 할 일은 무엇입니까? 베드로는 “바벨론에 있는 교회가 너희에게 문안한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놀라운 선언입니다. 세상의 중심부에서, 핍박의 한가운데서도 교회는 소멸되지 않고 굳건히 서서, 흩어져 있는 다른 교회와 성도들에게 사랑의 안부를 전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교회의 본질입니다. 세상이 아무리 거세게 교회를 흔들어도, 교회는 그리스도라는 반석 위에 세워졌기에 무너지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 속에서 서로를 돌보고 격려하며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어가는 공동체입니다.

일제강점기, 신사참배라는 거대한 압박이 한국 교회를 덮쳤을 때 많은 이들이 고통받았습니다. 주기철 목사님과 같은 분들은 신앙의 정절을 지키기 위해 순교의 길을 걸었습니다. 그때 성도들은 어떻게 그 험난한 시간을 견뎌냈을까요? 그들은 몰래 숨어 예배를 드리며, 감옥에 갇힌 교역자들의 가족을 돌보고, 서로의 믿음을 위해 눈물로 기도해줍니다. 칠흑 같은 바벨론의 밤하늘 아래, 성도들의 교제는 작은 등불과 같았습니다. 그들은 서로의 안부를 묻고 격려하는 ‘문안’을 통해, 세상이 결코 빼앗을 수 없는 하나님의 사랑을 확인하며 고난을 이겨냈습니다.

또한 베드로는 “내 아들 마가”의 안부를 전합니다. 한때 선교지에서 중도에 포기하여 바울에게 실망을 안겨주었던 청년 마가, 그러나 베드로의 따뜻한 돌봄과 격려 속에서 그는 다시금 신실한 일꾼으로 세워집니다. 그는 훗날 마가복음을 기록하는 위대한 사역을 감당하게 됩니다. 이것은 교회 공동체 안에서 실패한 사람이 다시 일어설 수 있고, 연약한 자가 강하게 세워질 수 있음을 보여주는 아름다운 모습입니다. 우리 교회 공동체가 바로 이러한 ‘회복의 공동체’, ‘격려의 공동체’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3. 교제의 완성, 하나님의 선물

마지막으로, 베드로는 성도의 교제가 어떻게 완성되고, 그 결과로 무엇을 누리게 되는지를 보여줍니다. 14절 말씀입니다.

“너희는 사랑의 입맞춤으로 서로 문안하라 그리스도 안에 있는 너희 모든 이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사랑의 입맞춤’은 당시 헬라, 로마 문화권에서 흔한 인사 법 이었지만, 초대교회 성도들에게는 특별한 의미가 있습니다. 그것은 단순히 입술로 하는 인사가 아니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한 가족이 된 형제자매를 향한 진실한 사랑과 용서, 그리고 하나 됨을 확인하는 거룩한 예식입니다. 세상 사람들의 인사가 위선과 거짓으로 가득할 수 있지만, 성도들의 인사는 진실해야 함을 가르쳐 줍니다. ‘사랑의 입맞춤’은 마음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존중과 애정의 표현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입맞춤으로 인사하지는 않지만, 그 정신은 여전히 유효합니다. 우리의 교제에 ‘사랑의 입맞춤’이 있습니까? 따뜻한 말 한마디, 진심 어린 격려, 연약한 지체를 위한 간절한 기도, 도움이 필요한 이웃을 향한 구체적인 섬김이 바로 오늘날 우리가 나누어야 할 ‘사랑의 입맞춤’입니다. 이러한 사랑의 교제가 있을 때, 교회는 비로소 세상 속에서 빛을 발하는 진정한 공동체가 될 수 있습니다.

진정한 '사랑의 입맞춤'은 지체의 아픔을 나의 아픔으로 여기고 구체적인 책임을 함께 짊어지는 삶으로 나타나야 합니다. 진정한 '사랑의 입맞춤'을 보여준 예가 있습니다. '바보 성자', '한국의 슈바이처'로 불리는 故 장기려 박사입니다.

6.25 전쟁 중 부산에 복음병원을 세운 장 박사는 가난하고 아픈 환자들을 위해 평생을 헌신합니다. 하루는 병원비를 내지 못해 쩔쩔매는 환자를 보고는, 몰래 병원 뒷문을 열어주며 "아무도 모르게 도망가시오"라고 속삭입니다. 그는 가난한 환자 한 사람을 돕는 것을 넘어, 이 땅의 가난한 이웃 모두가 돈 걱정 없이 치료받을 수는 없을까를 고민합니다.

그 고민의 결실이 바로 1968년, 부산에서 시작된 '청십자의료보험조합'입니다. "건강할 때 이웃을 돕고, 아플 때 도움을 받자"는 기치 아래, 가난한 사람도, 부유한 사람도 매달 똑같은 조합비를 내어 누군가 아플 때 함께 병원비를 감당해주는, 우리나라 최초의 의료보험조합이었습니다. 이것은 단순히 제도를 만든 것이 아니었습니다. '너희는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하라'는 갈라디아서 5장 13절 말씀을 이 땅에 실현한 것입니다. 장기려 박사와 뜻을 같이한 성도들의 이 헌신적인 사랑의 연대는, 한 개인의 고통을 공동체 전체가 끌어안는, 이 시대의 가장 거룩하고 실제적인 '사랑의 입맞춤'인 것입니다.

베드로의 마지막 축복은 바로 ‘평강’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너희 모든 이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이 평강은 세상이 주는 평안과는 다릅니다. 문제가 없어서 누리는 평안이 아니라, "문제 한가운데서도 주님이 함께 하심을 믿기에 누리는 하늘의 평강, 샬롬(Shalom)"입니다. 그리고 이 평강은 하나님의 참된 은혜 위에 굳게 서서, 사랑으로 교제하는 공동체에 충만하게 임하는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샬롬은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을 때의 죄가 전혀 없는 완전한 평강, 평안을 말합니다.

사도 베드로는 그의 편지를 마치며 우리에게 세 가지를 간곡히 부탁하고 있습니다.
첫째, 어떤 상황 속에서도 우리를 구원하시고 붙드시는 ‘하나님의 참된 은혜’ 위에 굳게 서십시오. 둘째, 하나님을 대적하는 ‘바벨론’과 같은 세상 속에서, 우리는 ‘함께 택하심을 받은 교회’임을 기억하고 서로 돌아보며 격려하십시오.
셋째, 진실한 ‘사랑의 입맞춤’으로 교제하며, 그 안에서 하나님이 주시는 참된 ‘평강’을 누리고 나누십시오.

이것은 2천 년 전 성도들에게만 주신 메시지가 아닙니다.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생생한 약속이며 명령입니다. 우리의 삶의 여정이 끝나는 날, 주님 앞에 섰을 때, “너는 내가 준 참된 은혜 위에 굳게 서 있었느냐? 그리고 내가 네게 붙여준 형제자매들과 사랑의 교제를 나누며 내가 주는 평강을 전하며 살았느냐?”라고 물으실 때, “아멘, 주님. 부족했지만 주님의 은혜를 의지하여 그렇게 살기 위해 몸부림쳤습니다”라고 고백할 수 있는 우리들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인생의 긴 여정을 마치고 마지막 순간을 맞이한 한 사람이 있다고 상상해 보십시오. 그가 사랑하는 이들에게 마지막 말을 남긴다면, 어떤 말을 하겠습니까? 아마도 자신이 살아오면서 깨달은 가장 소중한 진리, 그리고 사랑하는 이들이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기를 바라는지에 대한 간절한 소망을 이야기할 것입니다. 베드로의 마지막 인사는 바로 그런 무게와 진심을 담고 있습니다. 그는 자신의 인생을 통해 체험한 가장 확실한 진리, 곧 ‘하나님의 참된 은혜’를 증언하며, 성도들이 그 은혜 위에 굳건히 서기를 권면합니다. 그리고 혼자가 아니라 함께, 서로 사랑으로 격려하며 그리스도가 주시는 평강을 누리라고 축복합니다.

저는 현재 이 사업을 운영하면서 숙명처럼 채무자들로부터 시험을 당합니다. 한 분은 심장 이식 수술을 받아 성치 않은 몸으로 학업중인 2자녀를 부양하며 건강이 언제 어떻게 될지 모르는 상태이고, 한 분은 빌딩 화재로 추락사고를 당하여 6년간 병동에서 보낸 건강이 언제 어떻게 될지 모른는 상태이고, 다른 또 한 분은 사업을 하다가 실패로 부채가 많아 신용 불량인 채로 생업을 위해 이 일에 입문한 분입니다. 그 외에도 저로부터 긴급 자금을 차용하고자 종종 요구합니다. 거절하면 몹시 언짢아 합니다. 어떤 때는 저에게 자금 융통을 종용하다가 더 이상 말없이 제 방에서 퇴실하지를 않습니다. 그냥 버티고 있습니다. 외부에 있는 분들은 전화로 자금 융통을 요청하면서 하~ 하~ 하고 한숨을 쉽니다. 이럴 때에 ‘주님 제가 어떻게 하면 좋습니까?’ 하면 주님은 ‘네가 그 사람들보다는 형편이 낫지 않느냐? 라고 속삭이십니다. 주님 제 형편 다 아시지 않습니까? 회사 회계 장부가 엉망입니다. 저도 이 일 하지 않고 좀 쉬고 싶습니다. 자녀들도 돌보고, 외국으로 나가고 싶습니다.

오늘 이 시간, 베드로 사도가 2천 년 전 소아시아에 흩어져 있던 성도들에게 보낸 이 마지막 편지가, 21세기를 살아가는 바로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생생한 음성으로 들려지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삶을 향한 하나님의 변함없는 격려와 약속을 발견하는 우리들이 되기를 권면합니다. 조국의 독립을 위해 몸부림쳤던 윤동주 시인의 시에 이런 표현이 있습니다.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요한 복음 3장에 예수님께서 야밤에 주님을 찾아온 니고데모에게 성령의 바람을 말씀하시면서 성령의 오묘한 역사를 당장 이해할 수 없지만, 눈에 보이지 않지만 분명히 역사하심을 말하듯이 말입니다. 우린 양심을 가진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윤동주 시인이 자기와는 무관한 바람이지만 이 바람도 자신이 잘못하여 그런 바람이 부는 것이 아닌가 하고, 자신은 조국을 위해 무엇을 하고 있는가? 아무 것도 없지 않아 하는 자기 고백, 자신에 대한 회개 같은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지금 우리에게 주어진 환경에 먼저 감사하고 주변을 사랑해야 합니다. 사랑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사랑할 수 없는 조건이 너무나 많습니다. 사랑하기는커녕 우릴 괴롭히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어떻게 보면 분노가 폭발할 수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웃을, 주변의 지체들을 사랑해야 합니다. 2000년전 로마 제국 치하 바벨론 같은 환경에서도 교회가 교회 지체들이 서로 뜨겁게 사랑의 입맞춤을 하듯이 말입니다. 당장 현실이 아무리 어려워도 우리는 가족을, 함께 하는 이들을 내 몸처럼 아끼고 사랑해야 합니다. 제 자신을 돌아보면 늘 부끄러움, 부족한 부분만 있음을 돌아보게 됩니다. 친구 미안하네, 모두들 다 정말 미안해.

주 안에서 사랑하는 지지교회 여러분,

이번 한 주간, 그리고 우리의 남은 모든 생애가 하나님의 참된 은혜의 반석 위에 굳게 서서, 사랑의 교제를 통해 서로를 세워주기를 바랍니다. 우리에게 약속된 하늘의 평강을 온전히 누리고 흘려 보내는 평강의 삶이 되기를 권면합니다. 샬롬이 우리를 지배하도록 간절히 기도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