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RMON TEXT

고난과 소망의 우리들 [베드로전서 3:13-22]

고난과 소망의 우리들 [베드로전서 3:13-22]

13. 또 너희가 열심으로 선을 행하면 누가 너희를 해하리요
14. 그러나 의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면 복 있는 자니 그들이 두려워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며 근심하지 말고
15. 너희 마음에 그리스도를 주로 삼아 거룩하게 하고 너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는 대답할 것을 항상 준비하되 온유와 두려움으로 하고
16. 선한 양심을 가지라 이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너희의 선행을 욕하는 자들로 그 비방하는 일에 부끄러움을 당하게 하려 함이라
17. 선을 행함으로 고난 받는 것이 하나님의 뜻일진대 악을 행함으로 고난 받는 것보다 나으니라
18. 그리스도께서도 단번에 죄를 위하여 죽으사 의인으로서 불의한 자를 대신하셨으니 이는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려 하심이라 육체로는 죽임을 당하시고 영으로는 살리심을 받으셨으니
19. 그가 또한 영으로 가서 옥에 있는 영들에게 선포하시니라
20. 그들은 전에 노아의 날 방주를 준비할 동안 하나님이 오래 참고 기다리실 때에 복종하지 아니하던 자들이라 방주에서 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은 자가 몇 명뿐이니 겨우 여덟 명이라
21. 물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이제 너희를 구원하는 표니 곧 세례라 이는 육체의 더러운 것을 제하여 버림이 아니요 하나님을 향한 선한 양심의 간구니라
22. 그는 하늘에 오르사 하나님 우편에 계시니 천사들과 권세들과 능력들이 그에게 복종하느니라

13And who is he who will harm you if you become followers of what is good? 14But even if you should suffer for righteousness’ sake, you are blessed. “And do not be afraid of their threats, nor be troubled.” 15But sanctify the Lord God in your hearts, and always be ready to give a defense to everyone who asks you a reason for the hope that is in you, with meekness and fear; 16having a good conscience, that when they defame you as evildoers, those who revile your good conduct in Christ may be ashamed. 17For it is better, if it is the will of God, to suffer for doing good than for doing evil. 18For Christ also suffered once for sins, the just for the unjust, that He might bring us to God, being put to death in the flesh but made alive by the Spirit, 19by whom also He went and preached to the spirits in prison, 20who formerly were disobedient, when once the Divine longsuffering waited in the days of Noah, while the ark was being prepared, in which a few, that is, eight souls, were saved through water. 21There is also an antitype which now saves us—baptism (not the removal of the filth of the flesh, but the answer of a good conscience toward God), through the resurrection of Jesus Christ, 22who has gone into heaven and is at the right hand of God, angels and authorities and powers having been made subject to Him.

남미의 브라질만 포르투갈어를, 그 외 남미 모든 지역은 스페인어를 사용합니다. 두 나라는 인근 국가인데 왜 이들은 이렇게 구분하여 언어를 사용할까? 언뜻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1493년 전후로 스페인과 포르투갈이 신대륙이라는 남미, 북미 정복 전쟁에 경쟁적으로 돌입하게 됩니다. 1493년 당시 최악의 교황인 알렉산더6세가 브라질을 정복한 포르투갈에게는 포르투갈 정복, 브라질외 남미 전역을 장악한 스페인에게는 그 지역 정복이라는 포고령을 내린 기준이 이렇게 구분한 배경입니다. 교황은 어떤 사람이어야 합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는 데 가장 우선을 두어야 하는 지도자가 아닙니까? 그런데 당시 교황은 권력에 심취한 특권 계층으로 행세합니다.

남미, 북미 신대륙 정복을 보면 그리스도라는 이름으로, 선교사로 위장하여 너무나 많은 원주민들을 살상하고 약탈합니다. 당시 인디언 원주민들은 그들의 왕국을 자체적으로 이루어 살아가는 소박하고 순수한 부족민들입니다. 이래서 그 약탈 이후 진출한 천주교 진짜 선교사들은 남미에서의 이들 정복자들의 만행을 규탄하고 회개를 촉구합니다. 그런 과정에서 진짜 선교사들은 본국 정부로부터 박해도 받습니다. 우리는 마음에 내키지 않는 일을 감당해야 할 때, 우리 모두는 힘들어집니다. 반면 힘들어 하는 일, 누구도 하지 않는 일을 할 때, 그것이 진리라면 응당 실천해야 합니다. 2000년 전 베드로는 주님 승천하신 30년 후,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는 신앙 때문에 극심한 핍박을 당합니다. 그는 그가 전도한 사방에 흩어진 지체들이 어려움을 당할 때 이 서신을 사방에 흩어진 나그네 된 성도들에게 어떤 심정으로 보내는지 말씀을 통해 살펴보겠습니다.

1. 고난은 거룩함을 드러내는 계기

13. 또 너희가 열심으로 선을 행하면 누가 너희를 해하리요
14. 그러나 의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면 복 있는 자니 그들이 두려워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며 근심하지 말고
15. 너희 마음에 그리스도를 주로 삼아 거룩하게 하고 너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는 대답할 것을 항상 준비하되 온유와 두려움으로 하고
16. 선한 양심을 가지라 이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너희의 선행을 욕하는 자들로 그 비방하는 일에 부끄러움을 당하게 하려 함이라
17. 선을 행함으로 고난 받는 것이 하나님의 뜻일진대 악을 행함으로 고난 받는 것보다 나으니라

13절은 "또 너희가 열심으로 선을 행하면 누가 너희를 해하리요"라는, 베드로는 너무나 당연한 말로 시작합니다. 선을 행하는 사람은 대부분 칭찬과 인정을 받습니다. 이는 보편적 상식입니다. 그런데 ‘그러나’로 베드로는 바로 이를 반박합니다. 상식이 통하지 않는 시대라는 의미입니다. 세상 형편이 그렇지 못하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이 땅을 살아가면서 말씀대로 살려고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녹록하지 않습니다. 14절은 곧바로 "그러나"라는 역접(but)으로 시작하며 당시 나그네로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의 현실을 직시하게 합니다. "그러나 의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면 복 있는 자니". 옳은 일을 행하면 고난을 받는다는 말입니다. 베드로의 서신을 받는 지체들이 선을 행하지만 핍박과, 따돌림과 곤혹을 당하게 됨을 말합니다.

우리들도 이 땅을 살아가면서 선을 행하기 때문에, 진실하기 때문에, 솔직하기 때문에, 꾸밈이 없기에, 자신이 선하므로 상대방도 선하게 돌려줄 것이 당연할 것으로 기대하기 때문에 예상치 못한 곤란, 위험, 누명, 따돌림을 당하거나 뒤통수를 맞을 수 있습니다. 특히 '하나님의 의'를 따르기 때문에 세상으로부터 미움을 받고 고난을 당할 수 있습니다. 지금은 많이 사라졌지만, 직장인이 술을 하지 않으면 출세하기 어려운 시대가 있었습니다. 저 또한 폭력적인 음주 문화 때문에 회식자리에서 늘 노리개 감을 당하곤 했습니다. 제 머리에 술을 붓고 직장 동료들이 돌아가면서 비아냥거리기도 했습니다. 저 친구 다 좋은데 술을 하지 않아 그게 문제야 라고 공공연히 면박을 줍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의 불의한 방식에 타협하지 않고 정직하게 살려고 할 때, 음란하고 타락한 문화 속에서 거룩함을 지키려 할 때, 이기적인 세상 속에서 이웃을 사랑하고 섬기려 할 때, 우리는 종종 오해 받고, 조롱 당하고, 불이익을 겪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성도가 이 땅에서 경험하는 영적 현실입니다.

이러한 고난 앞에서 우리가 가장 먼저 느끼는 감정은 불안, 두려움, 근심, 걱정입니다. 미래에 대한 불안, 사람들의 시선에 대한 걱정, 내가 겪게 될 손실에 대한 염려가 우리를 짓누릅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단호하게 명령합니다. "그들이 두려워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며 근심하지 말고"(14절). 세상 사람들은 돈을 잃을까, 명예를 잃을까, 건강을 잃을까, 승진하지 못할까 두려워하며 삽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그것들을 삶의 궁극적인 가치로 삼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이 두려움을 이길 수 있습니까? 15절이 그 핵심 비결을 알려줍니다. "너희 마음에 그리스도를 주로 삼아 거룩하게 하고". 이것이 모든 것의 시작입니다. 내 마음의 왕좌에 누가 앉아 있습니까? 여전히 '나' 자신입니까? 아니면 세상의 염려와 근심입니까? 또는 자신의 자존심입니까? 그 보좌에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주인으로, 나의 왕으로 모실 때, 우리의 마음은 비로소 구별되어 '거룩하게' 됩니다. 내 삶의 주권이 나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만물의 주관자이신 주님께 있음을 영접할 때, 우리는 세상의 어떤 위협 앞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내면의 평안을 얻게 될 것입니다. 말은 이렇게 간단하지만 현실에서 이를 행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아픔이 있습니다. 이 때 주님의 십자가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리스도를 주로 삼은 삶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세상과의 적극적인 소통으로 이어집니다. "너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는 대답할 것을 항상 준비하되 온유와 두려움으로 하고"(15절). 우리의 삶 자체가 세상 사람들에게 하나의 '질문'이 되어야 합니다. '저 사람은 도대체 무엇 때문에 저런 억울한 상황에서도 원망하지 않을까?', '무엇이 저 사람을 저토록 이타적이고 선하게 만들까?'. 세상은 우리의 '다름'을 통해 우리 안에 있는 소망의 이유를 묻게 될 것입니다.

그때 우리는 준비된 대답과 행동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그 대답은 유창한 변증이나 신학 이론, 성경적 해박함이 아닙니다. 바로 우리 삶을 변화시킨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입니다. 그리고 그 질문에 대한 대답을 전하는 태도는 매우 중요합니다. '온유와 두려움', 겸손하고 부드러운 태도와 하나님을 경외하는 거룩한 마음으로 전해야 합니다. 우리의 주장이 아무리 옳다 해도, 이를 바로 받아 치는 공격적인 태도는 복음의 문을 닫아버릴 수도 있습니다. 때론 음해하고, 박해하고, 비방하고, 놀리고, 불이익을 주어도 이를 감수해야 합니다. 그러면 그렇게 행하는 자들의 심령에 근본적인 질문이 들게 될 것입니다. 저들은 그렇게 핍박에 가까운 불이익을 받고도 왜 늘 겸손한 마음으로, 두려운 마음으로 자기들을 대할까 하는 마음을 갖게 할 수 있습니다.

사무실에 새벽에 출근하여 쓰레기 통을 비우다 보면, 분리 투기가 제대로 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렇게 공지를 하고 벽에 공지를 붙여 놓아도 실행이 되지 않습니다. 하나 하나 분리하여 정리하고 모든 것을 제 자리에 두면서 느끼는 감정이 있습니다. 이것은 내 몫이다. 늘 기분 좋은 마음으로 하자. 누구나 하기 싫은 일을 할 때 망설여 집니다. 우리가 영적으로, 현실적으로 한 단계 성장하기 위해서는 자기 자신을 부인해야 합니다. 이런 자기 부인이 없는 분들은 자신을 겸허하게 돌아보아야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주님께서 먼저 본을 보여주셨기 때문입니다. 관련 말씀을 보겠습니다.

이사야 50:6
나를 때리는 자들에게 내 등을 맡기며 나의 수염을 뽑는 자들에게 나의 뺨을 맡기며 모욕과 침 뱉음을 당하여도 내 얼굴을 가리지 아니하였느니라

이사야 53:
3. 그는 멸시를 받아 사람들에게 버림받았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이 그에게서 얼굴을 가리는 것같이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
4.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 하나님께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5.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6.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7.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자 앞에서 잠잠한 양 같이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

더 나아가 16절은 '선한 양심'을 가지라고 권면합니다. 우리의 선한 행실과 깨끗한 양심이 우리의 말을 증명하는 강력한 증거가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흠 없이 살아갈 때, 우리를 비방하던 자들은 자신들의 비난이 근거 없는 것임을 깨닫고 스스로 부끄러움을 당하게 될 것입니다. 결국 17절의 말씀처럼, 하나님의 뜻 안에서 선을 행하다가 고난 받는 것이, 죄를 짓고 그 대가로 고통 받는 것보다 비교할 수 없이 영광스럽고 가치 있는 일입니다. 이처럼 고난은 우리의 믿음을 무너뜨리는 장애물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의 믿음이 진짜임을 증명하고 세상에 그리스도의 빛을 비추는 거룩한 무대가 되는 것입니다.

오순절 성령 강림 이후 초기 예루살렘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할 때, 사도들은 공동생활을 영위합니다. 그 시대 상황이 그렇게 공동으로 생활하면서 주님을 증거하고, 믿는 자들을 계속 지체로 받아들이고, 하나님 나라를 알리고,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도록 설교하고 기도하는 것이 그들의 삶의 전부였을 것입니다. 상대적으로 여유가 있는 믿음을 가진 자들이 자신들의 소유를 팔아 기부하면 그 기금으로 공동체를 유지하면서 생활하는 것입니다. 이런 환경에서는 어떤 위험 요소가 있을까요? 기부하는 지체들이 우쭐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것을 경계하십니다. 당시 아나니아는 그의 아내 삽비라와 함께 자신들의 땅 소유를 팔아서, 그 값의 얼마를 따로 떼어 놓고 난 나머지를 사도들의 발 앞에 드리면서 전부를 다 바쳤다고 거짓말을 합니다. 왜 그랬을까요? 기부하는 자로서 권위는 높이 추앙을 받아야 하겠고, 다 기부하자니 자신들이 사용할 물질이 부족할 것 같아 미래가 불안했을 것입니다. 아나니아가 자기 소유의 땅을 판 돈의 일부를 숨긴 것을 베드로는 어떻게 알았을까요? 성령님께서 알려 주셨을까요? 성령의 인도함을 받는 지체들은 깨어 있기에 공동체의 역사에 민감하였을 것입니다. 아나니아와 같은 이런 헌신이 되어서는 절대로 안 된다는 것입니다. 성령 하나님께서 다 아시고 보고 계십니다. 우리 모두는 성령님의 시야 안에 있음을 온전히 인정하고 우리 자신들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2. 그리스도의 고난과 승리

18. 그리스도께서도 단번에 죄를 위하여 죽으사 의인으로서 불의한 자를 대신하셨으니 이는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려 하심이라 육체로는 죽임을 당하시고 영으로는 살리심을 받으셨으니
19. 그가 또한 영으로 가서 옥에 있는 영들에게 선포하시니라
20. 그들은 전에 노아의 날 방주를 준비할 동안 하나님이 오래 참고 기다리실 때에 복종하지 아니하던 자들이라 방주에서 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은 자가 몇 명뿐이니 겨우 여덟 명이라

우리가 이처럼 고난을 복으로 여기며 담대하게 살아갈 수 있는 궁극적인 힘과 근거는 무엇이며 어디에 있는 것입니까? 그것은 바로 우리를 위해 먼저 고난의 길을 걸어가시고 마침내 승리하신 예수 그리스도, 바로 그 분에게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 삶의 궁극적인 목표요 지표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18절은 믿음의 진수를 보여주는 위대한 선포입니다. "그리스도께서도 단번에 죄를 위하여 죽으사 의인으로서 불의한 자를 대신하셨으니 이는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려 하심이라".

죄 없으신 하나님의 아들이, 허물지고 부족한 우리를 대신하여 십자가의 모든 저주와 고통을 감당하셨습니다. 그 죽음은 단 한 번으로 우리의 모든 죄 문제를 영원히 해결하신 완전한 희생이었습니다. 그 목적은 단 하나, 죄로 인해 끊어졌던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관계를 회복시켜, 우리를 거룩하신 하나님 앞으로 담대히 나아가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우리가 겪는 고난이 아무리 억울하고 힘들다 해도, 주님께서 우리를 위해 당하신 그 고난에 비할 수는 없습니다. 사도 베드로는 이를 손수 감당한 장본인입니다.

예수님 승천하시고 오순절 성령 세례를 받은 이후 베드로는 담대해 졌습니다. 당시 베드로와 사도들은 어떤 상태였을까요? 오순절 성령 강림은 당시 전례가 없던 대 사건입니다. 성령의 강타로 오순절에 참석한 모든 사람들이 성령의 역사를 체험하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 수난을 당하시기 전에 약속하신 성령이 실제로 강타한 것입니다. 베드로는 성령을 체험한 장 본인입니다. 그래서 담대하게 증거합니다. 그는 체험함으로써 주님의 역사하심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복음을 전하다가 바울과 베드로는 투옥되었을 때 하나님께서 밤에 이들을 출옥시키십니다. 인간적인 판단으로는 일어날 수 없는 일입니다. 하나님의 사명을 맡은 두 사도에게 특별한 은혜와 권세를 주신 것입니다. 땅을 팔고 그 대금을 속여 기부한 아나니아에게 베드로가 이것을 알고는 "아나니아야 어찌하여 그대가 사탄에게 홀려서, 성령을 속이고 땅값의 얼마를 몰래 떼어 놓았는가? 그대는 사람을 속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속인 것이오. 아나니아는 이 말을 듣고, 그 자리에서 쓰러져서 죽습니다. 아나니아의 시체를 장사하자, 그 아내 삽비라가 그 일어난 일을 알지 못하고 들어옵니다. 베드로가 삽비라에게 그대들이 판 땅값이 이것뿐인가? 하고 물으니 "예, 그것뿐입니다" 하고 그 아내가 대답하자 그 아내 삽비라도 바로 죽습니다. 믿음의 공동체는 우리가 주인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인이라는 말입니다. 베드로가 그들에게 "왜 그대들 내외는 서로 공모해서 주의 영을 시험한 것인가? 하고 엄중하게 성도들 앞에서 질타합니다. 온 교회와 이 사건을 들은 사람들은 모두 크게 두려워합니다. 동시에 그 아내 삽비라까지 죽게 한 것은 부부 중에 한 사람도 깨어 있지 못했음을 심판하신 것은 아닌가? 하고 우리를 돌아보게 합니다. 이는 무엇을 말해줍니까? 공동체의 중요성을 말하는 것입니다. 공동체는 가정으로부터 출발하여 하나님의 자녀들로 형성되는 공동체로, 하나님을 왕으로 섬기는 공동체를 말합니다. 이 공동체의 왕을 속이는 행위는 벌을 받는다는 것을 여실히 보여줍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가장 우선적으로 복종해야 합니다,

당시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베드로와 사도들이 “사람에게 복종하는 것보다, 하나님께 복종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라고 대제사장들께 증거합니다. 우리 하나님은, 대제사장 그대들이 나무에 달아 죽인 예수를 살리셨습니다. 이분을 하나님께서 자기 오른쪽에 높이 올리시고, 영도자와 구주로 삼으셔서, 이스라엘이 회개를 하고 죄 사함을 받게 하셨습니다. 우리는 이 모든 일의 증인입니다.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복종하는 사람들에게 주신 성령이 증인이십니다.”라고 강변합니다.

더욱 놀라운 것은, 주님의 이야기가 죽음으로 끝나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육체로는 죽임을 당하시고 영으로는 살리심을 받으셨으니"(18절). 십자가는 끝이 아닙니다. 그것은 영광스러운 부활로 가는 관문입니다. 베드로는 이어서 다소 난해하지만 강력한 메시지를 전합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 "영으로 가서 옥에 있는 영들에게 선포하셨다"(19절)는 것입니다. '옥에 있는 영들'이 정확히 누구를 가리키는지에 대해서는 다양한 신학적 견해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 구절의 핵심은 명확합니다. 그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절대적인 승리입니다. 노아 시대에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을 거역하고 불순종하다가 멸망했던 영들에게까지, 그리스도의 승리가 선포되었다는 것은 그의 통치와 주권이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모든 영적 세계에 미침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사탄의 권세, 죽음의 권세, 과거의 모든 불순종과 죄악의 권세 위에 주님께서 완전한 승리를 거두셨다는 결정적인 선포인 것입니다.

그리고 그 승리는 22절에서 절정을 이룹니다. "그는 하늘에 오르사 하나님 우편에 계시니 천사들과 권세들과 능력들이 그에게 복종하느니라". 부활하신 주님은 지금 어디에 계십니까? 하늘 보좌 우편, 온 우주 만물을 다스리시는 최고의 권위와 능력의 자리에 앉아계십니다. 하늘의 천사들도, 세상의 어떤 권세와 능력도, 심지어 우리를 괴롭히는 어둠의 세력들까지도 모두 그분의 발아래 복종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믿는 주님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고난 중에도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는 이유입니다. 우리를 핍박하는 세력이 아무리 강해 보여도, 우리를 넘어뜨리려는 문제가 아무리 커 보여도, 그것들은 이미 우리 주님께 패배한 세력들입니다. 만왕의 왕이신 주님께서 우리 편이 되어주시고 우리를 위해 싸우시는데, 우리가 무엇을 두려워하겠습니까? 우리의 소망은 이처럼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사 지금도 만물을 다스리시는 예수 그리스도라는 영원하고 흔들리지 않는 반석 위에 세워져 있음을 굳게 믿어야 합니다.

3. 세례와 구원의 확증

21. 물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이제 너희를 구원하는 표니 곧 세례라 이는 육체의 더러운 것을 제하여 버림이 아니요 하나님을 향한 선한 양심의 간구니라
22. 그는 하늘에 오르사 하나님 우편에 계시니 천사들과 권세들과 능력들이 그에게 복종하느니라

베드로는 노아 시대의 홍수 심판 사건을 가져와 우리 구원의 신비를 설명하는 통찰력을 보여줍니다. 어떻게 베드로는 이런 능력을 부여 받았을까요? 성령의 인도함을 받은 것입니다. 마치 모세가 시내산에 올라 40주야를 하나님과 독대하면서 하나님 나라의 모형을 다 보듯이 말입니다. 이후 모세의 얼굴에서는 광채가 나게 됩니다. 이는 하나님 영광을 드러내는 것을 말합니다. 노아 시대에 '물'은 죄악으로 가득한 세상을 심판하는 무서운 도구였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방주 안에 있던 노아의 여덟 식구에게는 구원의 수단이었습니다. 그 물이 옛 세상을 끝내고 새로운 세상으로 인도하는 통로가 되었던 것처럼, 베드로는 "물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이제 너희를 구원하는 표니 곧 세례라"(21절)고 선언합니다. 단순한 물이 아닌 양심의 물 세례를 말하는 것입니다. 양심을 물로 깨끗이 씻는 것을 말합니다.

세례가 어떻게 우리를 구원하는 표가 됩니까? 베드로는 그것이 "육체의 더러운 것을 제하여 버림이 아니요"라고 분명히 말합니다. 세례는 단순히 몸을 물로 씻어 깨끗하게 하는 외적인 의식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세례의 참된 의미는 하나님을 향한 선한 양심의 간구라고 함에 있습니다. '선한 양심'이란 무엇입니까? 그것은 본래 죄로 인해 더러워지고 마비되었던 우리의 양심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보혈로 깨끗하게 씻음 받은 상태를 말합니다. 죄와 허물로 죽었던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죽고, 이제는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아나 새 생명을 얻었음을 믿는 믿음의 고백입니다. 세례는 바로 이 깨끗해진 양심, 즉 선한 양심으로 하나님 앞에 나아가 "이제부터 내 삶의 주인은 주님이십니다. 주님의 뜻대로 살겠습니다"라고 서약하며 간구하는 거룩한 예식인 것입니다.

물속에 잠기는 것은 나의 옛사람이 예수님과 함께 장사되는 것을, 물에서 나오는 것은 예수님의 부활 생명에 연합하여 새로운 피조물로 다시 태어나는 것을 상징합니다. 그러므로 세례는 과거에 대한 종결 선언이자, 미래에 대한 소망의 약속입니다.
이 모든 것이 가능한 이유는 단 하나,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21절) 가능하게 되었습니다. 만약 그리스도의 부활이 없었다면, 세례는 아무 의미 없는 물놀이에 불과했을 것이고, 우리의 믿음 또한 헛된 것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사망 권세를 깨뜨리고 부활하셨습니다. 그 부활의 능력이 오늘 세례를 통해 우리에게 전달되고, 우리를 구원하는 능력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세례를 통해 선포해야 합니다. "나는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고, 그분과 함께 다시 살았다. 나는 하늘에 속한 새로운 피조물이다". 이 구원의 확신이 있을 때, 우리는 어떤 고난 앞에서도 담대하게 우리의 정체성을 지키며 살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베드로전서를 통해 고난의 시대를 살아가는 성도의 삶의 원리를 살펴 보았습니다. 오늘 말씀을 심령에 새기며 우리의 삶에 적용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말씀을 삶에 적용할 때 우리는 성령 충만함을 맛볼 수 있습니다.

첫째, 고난을 영적 성장의 기회로 삼아야 합니다. 의를 위해 받는 고난은 저주가 아니라 복입니다. 그 고난을 통해 우리의 마음은 더욱 그리스도를 주로 모시게 되고, 우리의 믿음은 정금같이 단련되며, 우리의 삶은 세상에 빛을 발하는 거룩한 무대가 될 것입니다.

둘째, 우리 소망의 이유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깊이 묵상해야 합니다. 우리를 위해 죽으시고, 부활하셔서, 지금도 하늘 보좌에서 우리를 다스리시는 주님을 바라볼 때, 우리는 세상이 주는 두려움을 이기고 하늘의 평안을 누릴 수 있습니다. 그분의 승리가 곧 우리의 승리입니다.

셋째, 구원의 확신 위에 굳게 서야 합니다. 세례를 통해 약속된 주님과의 연합을 기억하며, 죄와 사망의 권세에서 이미 해방된 하나님의 자녀라는 정체성을 굳게 붙들어야 합니다. 이 확신이 우리를 모든 고난 속에서 견고하게 지켜줄 것입니다.

베드로전서 말씀은, 로마 제국의 거센 박해 아래 흩어져 살아가던 초대교회 성도들에게 보내는 격려와 위로의 편지입니다. 그들의 일상은 언제 닥칠지 모르는 위협과 부당한 고난으로 가득했습니다. 신앙을 지킨다는 이유만으로 사회에서 소외되고, 재산을 빼앗기고, 심지어는 목숨을 잃을 수도 있는 암담한 현실을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인간적으로 본다면 두려움에 떨고, 근심하며, 절망하는 것이 당연한 반응이었을 것입니다.
편지에서 사도 베드로는 흩어진 나그네 성도들을 향해 놀라운 선포를 합니다. "의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면 복 있는 자니 그들이 두려워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며 근심하지 말고"(14절). 고난이 복이라니? 이것은 세상의 지혜와는 정면으로 배치되는 역설입니다. 어떻게 고통스러운 시련이 축복이 될 수 있습니까? 말씀을 통해 우리는 고난을 마주하는 그리스도인의 특별한 자세와 그 능력의 근원을 발견하게 됩니다. 우리가 이 시대에서 당장 겪는 고난과 핍박과 환란을 바라보면서 하나님 뜻이 어디에 있는지를, 무엇인지를 돌아보는 우리 모두가 될 수 있어야 합니다.

현 우리 시대 조국 대한민국을, 선진국이라고 하는 지구촌 나라들을 바라볼 때, 유럽의 정복자들이 신대륙을 정복할 때 약탈을 당하는 원주민 같은 처지가 우리의 현실이 되어 가는 것이 아닌가 하고 심히 우려됩니다. 불법과 불의가 만연한데 교회는, 정부는 어떤 역할을 하고 있는가? 창조질서를 파괴하는 법이, 미래 세대를 생각하지 않는 법이 난무하는 데에도, 이를 제지하는 법이나 반대가 왜 이렇게 없는가? 하고 말입니다. 15-16세기 남미를 유럽이 정복할 때, 교회가 침묵하듯이 말입니다. 2000년전 사도 베드로는 목숨을 걸고 핍박을 당하던 나그네 성도들에게 지혜롭게, 상전이나 권세자들을 섬김으로써 지배자들이 감동을 받도록, 당시 위기를 적극 감당하라고 편지로 강권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자신을 부인할 때, 내키지 않는 일을 적극 감당할 때, 당장 응답이 없어도 간절히 간구할 때, 성령 하나님의 음성에 민감하게 반응하고자 몸부림칠 때, 하나님께서 우리 기도에 응답하시고 이 불의한 시대를 능히 승리할 월계관을 우리 모두에게 허락하실 것입니다. 고난은 우릴 강하게 할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고난을 통해 역사하시는 주님의 손길이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는 우리가 모두 하나님 자녀이기 때문입니다. 만사를 주님 앞에 들고나가 간구하는 우리 모두가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세상 속에 살지만 세상에 속하지 않은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세상이 이해할 수 없는 소망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고난을 통해 우리의 소망의 이유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삶이 되어야 합니다.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하늘의 소망이 우리 각 사람의 심령에 가득하길 바랍니다. 어떤 고난의 폭풍우 속에서도 주님과 함께 담대히 승리하는 우리들이 될 수 있어야 합니다. 성령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하고 주님께 매달리므로, 자기 자신을 부인하므로 평강이 우릴 지배하는 한 주간될 수 있기를 권면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