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RMON TEXT

거룩하라 [베드로전서 1:13-21]

거룩하라 [베드로전서 1:13-21]

  1. 그러므로 여러분은 마음을 굳게 먹고 정신을 차려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여러분이 받을 그 은혜를 끝까지 기다리십시오.
  2. 여러분이 이제는 순종하는 자녀가 되었으니, 전에 알지 못할 때에 가졌던 욕망을 따라 살지 말고,
  3. 여러분을 불러 주신 그 거룩한 분을 따라 모든 행실을 거룩하게 하십시오.
  4. 성경에 기록하기를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여라" 하였기 때문입니다.
  5. 그리고 겉모양으로 판단하지 않으시고 각 사람의 행위대로 심판하시는 분을 여러분이 아버지라고 부른다면, 여러분은 나그네로 있을 동안에, 두려운 마음으로 지내십시오.
  6. 이제 여러분은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여러분의 헛된 생활방식에서 해방되었습니다. 그것은 여러분도 알지만, 은이나 금과 같은 썩어질 것으로 되지 않고,
  7. 흠이 없고 티가 없는, 어린 양의 피와 같은 그리스도의 귀한 피로 되었습니다.
  8. 이 그리스도께서는, 세상이 창조되기 전에 예정되고, 이 마지막 때에 여러분을 위하여 나타나셨습니다.
  9. 여러분은 그분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믿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를 죽은 사람 가운데서 살리시고, 그에게 영광을 주셨으니, 여러분의 믿음과 소망은 하나님께 있습니다.

제가 입주해 있는 빌딩 1층에는 주차장이 있습니다. 최근 밤 8시경에 퇴근하려는데, 외지인이 주차장 입구를 막고 있어 경적을 울리니까, 뒤로 물러나면서 더 이상 물러가지 않고 창문을 열고는 저보고 삿대질을 하면서 당신이 알아서 옆으로 빠져나가라는 말투로 협박합니다. 정말 가관입니다. 이 사람을 살펴보니 전에도 제 지인이 우리 사무실을 방문하여 1층에 주차를 하려고 하니, 이 사람이 따라와 자신이 건물주처럼 큰소리로 시비를 걸던 그 사람입니다. 아! 이 사람이 아직도 주인 행세를 하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면서 말싸움해봐야 의미가 없겠다 싶어서, 불편하지만 옆으로 돌아서 빠져나가게 됩니다. 그는 왜 그렇게 당당하게 입주자인 저에게 주인 행세를 했을까요? 주인도, 심지어 건물 입주자도 아니면서 말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이 땅을 살아가면서 수많은 사람을 접하게 됩니다. 때로는 이해할 수 없는 사람들을 보게 됩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이 어떤 신분인지를 알지 못하고 살아갈 수 있습니다. 아무것도 아닌 어부(fisherman)인 자신을 제자로 삼아주신 주님의 은혜를 기억한 베드로는 주님을 만난 것이 얼마나 큰 영광인지 알게 된 것입니다. 베드로는 우리로 하여금 왜 ‘거룩하라’고 하는지 말씀을 통해 살펴보겠습니다.

Part 1, 소망의 그리스도를 붙들라

13. 그러므로 여러분은 마음을 굳게 먹고 정신을 차려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여러분이 받을 그 은혜를 끝까지 기다리십시오.

‘그러므로’ 이는 앞 절, 1-12절에서 말씀하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증거를 말합니다. 베드로전서는 약 2천 년 전, 로마 제국의 핍박 아래 유대 사방에 흩어져 살아가던 초대교회 그리스도인들에게 보내어진 편지입니다. 이 편지에서 저자 베드로는 당시 사방에 흩어진 나그네들이 믿는 예수 그리스도는 갑자기 혜성처럼 나타난 분이 아니라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구약에서 일관되게 약속한 구세주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부각하는 것입니다. 왜 베드로는 이렇게 편지할까요? 예수 그리스도를 정확하게 알려 흩어진 나그네들에게 진리를 제대로 전달하므로 흩어진 나그네들이 이 고난을 극복하도록 격려하고 힘을 주고자 하는 것입니다. 당시 그리스도인들은 예수 믿는 자라는 이유로 로마 황제 치하에서 실로 고통스러운 나날을 살아갑니다. 사도 베드로는 그 고달픈 현실에서 ‘나그네’로 살아가던 이들에게 힘을 주고 싶었던 것입니다. 이 나그네들은 믿음 때문에 집을 잃고, 소외당하며, 목숨의 위협을 받기도 합니다. 현실만 바라보면 흩어진 나그네 그들은 얼마나 견디기 힘들었겠습니까? 우리 시대에는 이런 고난이 없을까요? 3년 전 한번은 면접을 보는데 주재원인 남편을 따라 중국에서 10년을 거주한 여자 지원자가 ‘0’ 자만 언급해도 검열을 받는다고 합니다. ‘0’는 000을 지칭하는 말입니다. 제가 믿기지 않는다는 뜻으로 정말 그러냐고 하니까? 아직도 그 사실을 잘 모르냐고? 그 지원자가 정색하면서 반문합니다. 로마 제국 폭정 치하의 이 어려운 시기에, 사도 베드로는 자신이 체험한 예수 그리스도를 구약에서 약속한 메시아임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시대가 아무리 험악하여도 그리스도인들은 절대로 놓지 말아야 할 구심점이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이를 붙들도록 격려하고 알리는 것이 사도의 역할입니다.

13절은 강력한 권면으로 시작합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마음을 굳게 먹고 정신을 차려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여러분이 받을 그 은혜를 끝까지 기다리십시오.” 당시 로마 황제 도미티아누스는 자신이 신이라고 선포합니다. 그런데 예수가 진짜 신이라고 하니 나그네로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이 당하는 고난이 오죽하겠습니까? 그런 절망적인 상황에 놓인 나그네 성도들에게, 베드로 사도는 흔들리지 않는 소망과 거룩한 삶의 원리를 힘주어 선포합니다.

불확실한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가 붙잡아야 할 영원한 소망은 무엇입니까?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로서 이 땅에서 어떠한 삶의 자세와 방식으로 살아가야 할까요? 우리의 인생길이 어떠하든, 어떤 상황이든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가 나의 구주라는 절대 명제가 무엇보다도 우선되어야 합니다. 이것은 바뀔 수 없는 진리입니다. 북한에 지하교회 교인들이 수십만이 된다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는 이런 동포들의 고난을 한 번이라도 깊이 돌아본 적이 있습니까? 우리와는 상관없는 일로 치부하지는 않습니까? 왜 조국 대한민국에 유독 이런 참상을 하나님께서는 계속 허락하시는 것일까요? 1907년 평양 대부흥회는 전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킨 기독교 역사상 대사건이었습니다. 당시 서구 열강은 평양 대부흥회를 성령의 불길로 대대적으로 보도합니다. 그런 엄청난 역사를 가진 북한 땅에 지금까지 왜 이런 참상을 하나님께서는 계속 허락하시는 것일까요? 인간이 잘못 선택한 체제의 위험성이 얼마나, 얼마나 심각한지를 하나님께서는 일관되게 계속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성경 전체를 살펴보면 우리는 어떤 느낌을 받습니까? 선악의 대결로 보이지 않습니까? 끊임없이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세상을 파괴하는 세력과, 하나님께서 지켜주시는 세력이 있지 않습니까? 의인 욥이 고난을 당합니다. 왜 그렇게 선하고 착한 의인 욥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욥이 엄청난 고난을 당합니까? 고난 뒤에, 고난을 넘어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이 뭔지를 보여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누리는 행복, 고난이 하나님을 넘을 수 없다는 말입니다. 그 정점에는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의 손길이 계십니다. 상황이 어떠하든 하나님 편에, 주님 편에 서는 자가 구원을 받습니다.

13절에서 ‘마음을 굳게 먹고’라는 표현은 ‘마음의 허리를 동이라’는 뜻입니다. 이는 출애굽의 정신으로 무장하라는 의미입니다. 애굽을 떠나 다른 나라로 떠나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 왕 바로는 바로 추격합니다. 이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떠나기 하루 전날 유월절을 지키면서 허리를 동이고 식사를 합니다. 즉 완전히 떠날 준비를 하고 즉 허리를 동이고 유월절을 보내는 것입니다. 유월절 어린 양의 피를 발라둔 이스라엘 백성들의 집에는 어떤 장자도 죽지 않습니다. 대신 어린 양의 피를 바르지 않은 애굽인의 장자는 전부 죽습니다. 이 어린 양이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하는 것입니다. 사도 베드로는 이런 마음으로 구원을 확신하고 흩어진 나그네 성도들을 격려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한 나그네 성도들이여, 예수님을 믿음으로써 어떤 상황에서도 흔들리지 말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최종 목표는 이 땅의 대성공이나 안락함이 아닙니다. 우리의 궁극적인 소망은 우리 주님께서 영광 중에 다시 오시는 그날, 우리에게 완성될 영원하고 완전한 구원의 은혜에 있습니다. 이것만은 우리가 붙들어야 합니다. 이는 신실한 하나님의 약속에 근거한, 세상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가장 확실하고 영광스러운 증거이어야 합니다. 이 ‘산 소망’이 우리 안에 살아 숨 쉴 때, 어떤 고난도 역경도 이겨낼 수 있을 것입니다. 이는 부활하신 주님이 제자들에게 나타나 나를 만져 보라고 하는 것과 같은 것으로 우리 심령에 들어와야 합니다. 오늘 이 시간, 우리의 영적인 허리띠를 다시 한번 동여매야 합니다. 우리의 목표와 시선을 다시 오실 주님께 고정함으로써 이 불의한 시대를 맞서 이를 극복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Part 2, 거룩한 삶으로

14. 여러분이 이제는 순종하는 자녀가 되었으니, 전에 알지 못할 때에 가졌던 욕망을 따라 살지 말고,
15. 여러분을 불러 주신 그 거룩한 분을 따라 모든 행실을 거룩하게 하십시오.
16. 성경에 기록하기를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여라" 하였기 때문입니다.
17. 그리고 겉모양으로 판단하지 않으시고 각 사람의 행위대로 심판하시는 분을 여러분이 아버지라고 부른다면, 여러분은 나그네로 있을 동안에, 두려운 마음으로 지내십시오.

소망을 품은 우리는 삶의 변화가 있어야 합니다. 14-16절은 새로운 삶의 방식을 제시합니다. “여러분이 이제는 순종하는 자녀가 되었으니, 전에 알지 못할 때에 가졌던 욕망을 따라 살지 말고, 여러분을 불러 주신 그 거룩한 분을 따라 모든 행실을 거룩하게 하십시오. 성경에 기록하기를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여라’ 하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던 시절의 구습과 헛된 삶의 방식을 버려야 한다는 말입니다. 좋지 못한 행동이나 습관은 버려야 합니다. 새로운 신분에 걸맞은 새 옷을 입어야 합니다. 그 옷은 ‘거룩함’입니다. 거룩함은 하나님 아버지의 본질적 성품입니다. 거룩함은 우리 모두의 삶의 목표이자 지상명령입니다.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는 이 말씀은, 하나님의 자녀라면 마땅히 아버지를 닮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거룩함(Holiness)’의 핵심은 구별됨(Separation)입니다. 세상의 가치관과 문화로부터 구별되어, 하나님께 속한 자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우리의 생각과 말, 돈을 쓰는 방식, 시간을 사용하는 방법, 사람들을 대하는 태도 등, 모든 행실에서 “나는 세상과 다른, 하나님께 속한 사람입니다”라는 구별된 향기를 드러내는 것이 바로 거룩한 삶입니다. 거룩함 하면 우리는 마음에 부담을 가질 수 있습니다. 부담을 가질 필요는 없습니다. 거룩함은 구별됨입니다. 어제보다는 오늘이, 전월보다는 금월이, 지난해보다는 올해 자신의 행동이 하나씩 세상 가치관과 달리 자신이 바뀌는 것이 거룩함의 시작입니다. 사람은 한꺼번에 거룩하게 변화되지 않습니다. 거룩함의 기본은 겸손일 것입니다. 자신이 부족한 존재라는 것을 먼저 아는 것입니다.

이어서 17절은 우리가 이 땅에서 어떤 마음가짐으로 살아야 할지를 가르쳐줍니다. “겉모양으로 판단하지 않으시고 각 사람의 행위대로 심판하시는 분을 여러분이 아버지라고 부른다면, 여러분은 나그네로 있을 동안에, 두려운 마음으로 지내십시오.” 우리가 ‘사랑의 아버지’라고 친밀하게 부르는 그분은, 동시에 각 사람의 행위를 따라 공의롭게 심판하시는 두려운 재판장이심을 기억해야 합니다. 여기서 ‘두려움’은 벌벌 떠는 공포가 아니라, 하나님을 향한 거룩한 ‘경외심’을 의미합니다. 사랑하는 아버지를 실망시켜 드리고 싶지 않은 그 마음, 그분의 거룩하심 앞에서 나의 죄와 허물을 돌아보는 진지한 마음가짐입니다.
특별히 우리는 “나그네로 있을 동안에” 이러한 경외심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이 땅은 우리가 영원히 머물 본향이 아닙니다. 우리는 잠시 이곳을 지나가는 순례자입니다. 나그네는 목적지를 향해 가볍게 여행합니다. 불필요한 짐에 얽매이지 않습니다. 우리 역시 영원한 하늘 본향을 소망하며, 이 땅의 삶을 가볍고도 진지하게,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Part 3, 보혈의 능력 위에 서라

18. 이제 여러분은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여러분의 헛된 생활 방식에서 해방되었습니다. 그것은 여러분도 알지만, 은이나 금과 같은 썩어질 것으로 되지 않고,
19. 흠이 없고 티가 없는, 어린 양의 피와 같은 그리스도의 귀한 피로 되었습니다.
20. 이 그리스도께서는, 세상이 창조되기 전에 예정되고, 이 마지막 때에 여러분을 위하여 나타나셨습니다.
21. 여러분은 그분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믿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를 죽은 사람 가운데서 살리시고, 그에게 영광을 주셨으니, 여러분의 믿음과 소망은 하나님께 있습니다.

연약한 우리가 어떻게 이처럼 거룩한 삶을 살아갈 수 있단 말입니까? 우리의 의지와 노력만으로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베드로는 우리가 거룩한 나그네의 삶을 살아갈 수 있는 유일하고도 확실한 능력의 근원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라는 것입니다. 18-19절을 다시 읽겠습니다. “이제 여러분은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여러분의 헛된 생활방식에서 해방되었습니다. 그것은 여러분도 알지만, 은이나 금과 같은 썩어질 것으로 되지 않고, 흠이 없고 티가 없는, 어린 양의 피와 같은 그리스도의 귀한 피로 되었습니다.”

우리를 죄와 사망의 법에서, 허무한 삶의 방식에서 구원한 것은, 가치 있게 여기는 금이나 은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돈이나 자산이 아니란 말입니다. 어떤 선행이나 공로, 또는 열심도 아닙니다. 오직 흠도 없고 점도 없으신 하나님의 어린 양,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위에서 우리를 대신하여 흘리신 그 보배로운 피만이 우리의 죗값을 치르고,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삼으시는 유일한 대가입니다. 이 놀라운 구원의 계획은 즉흥적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닙니다. 20절 “이 그리스도께서는, 세상이 창조되기 전에 예정되고, 이 마지막 때에 여러분을 위하여 나타나셨습니다.” 라고 증언합니다. 창세 전부터, 하나님께서는 긍휼과 사랑으로 우리를 구원하시기로 작정하셨고, 그 영원한 계획을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마침내 성취하신 것입니다. 우리의 구원은 이처럼 영원하고 변치 않는 하나님의 사랑에 그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이를 영접할 때 우리는 평강의 지배를 받을 수 있습니다.

21절은 우리의 믿음과 소망이 어디에 근거해야 하는지를 최종적으로 선포합니다. “여러분은 그분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믿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를 죽은 사람 가운데서 살리시고, 그에게 영광을 주셨으니, 여러분의 믿음과 소망은 하나님께 있습니다.” 우리의 믿음과 소망은 주님의 십자가에서 출발하고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시고, 그에게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와 영광을 주십니다. 관련 마태복음 28:16-20입니다.

16. 열한 제자가 갈릴리에 가서 예수께서 지시하신 산에 이르러
17. 예수를 뵈옵고 경배하나 아직도 의심하는 사람들이 있더라
18. 예수께서 나아와 말씀하여 이르시되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19.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20.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신 살아계신 주님, 그분의 부활이 바로 우리 믿음의 확실한 보증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의 믿음과 소망은 흔들리는 세상이나 연약한 우리 자신에게 있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부와 권력, 우리의 달란트, 헌신에도 있지 않습니다. 전적으로 전능하사 천지를 창조하신 신실하신 하나님 아버지께 달려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때론 구원의 감격을 잃어버린 채 살아가고 있지는 않습니까? 나를 위해 흘리신 그리스도의 보혈의 가치를 잊고, 다시 세상의 헛된 것들을 의지하며 살아가고 있지는 않습니까? 고달프고 어려울 때에도, 상황이 좋을 때에도, 매일, 매 순간 십자가의 은혜를 다시 기억해야 합니다. 그 보혈의 능력이 우리를 모든 죄의 유혹에서 이기게 합니다. 이 불의한 시대를 바라보면서 한숨을 쉴 때에도, 낙담할 때에도, 분노할 때에도, 거룩한 나그네의 삶을 살아갈 때, 하나님께서 우리 공동체를, 우리 마음을, 우리 형편을 지켜 주실 것입니다.

우리는 거룩한 나그네의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우리는 구원받은 성도, 곧 ‘거룩한 나그네’로서 이 땅을 살아가야 합니다.

1. 우리는 마음의 허리를 동이고 깨어있는 소망을 품어야 합니다. 세상 가치관에 매몰되지 말고, 다시 오실 주님을 확실한 소망으로 삼아 오늘을 살아야 합니다.
2. 우리는 우리를 부르신 분처럼 행실에 거룩해야 합니다. 옛사람의 욕망을 버리고, 구별된 삶을 통해 하나님의 성품을 세상에 드러내야 합니다.
3. 모든 삶의 근거는 오직 그리스도의 보혈의 능력에 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나의 노력이 아닌, 보혈의 은혜를 의지할 때, 우리는 비로소 거룩한 삶을 살아낼 수 있습니다.

거룩함은 거창한 것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인정하고 영접하는 것에서 출발합니다. 거룩한 주님께 붙어 있으려고 부단히 투쟁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완벽할 수 없음을 인정해야 합니다. 그래서 부족함을 주님께 고하고 고쳐 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작은 것부터, 사소한 습관부터 바꾸는 노력을 해야 합니다. 이것이 잘 고쳐지지 않을 때 주님께 간구해야 합니다. 작지만 좋은 습관이 모여서 우리를 거룩하게 할 수 있습니다. 베드로를 보십시오. 단점 많고 혈기 왕성한 베드로가 어떻게 변화될 수 있었겠습니까? 거룩함은 당사자 본인이 말씀을 통해 고칠 부분이 있으면, 그 단점을 고치려고 시도해보는 것에서 출발하는 것입니다. 이 점이 분리되는 시작입니다. 좋지 못한 것, 흠이 있는 것, 부족한 것, 고쳐야 할 것에서 분리되는 것이 거룩함의 시작입니다.

주차장에서 자신이 주인도, 건물 입주자도 아닌 그분이 왜 그렇게 주인 행세를 했을까요? 아마 그분은 건물주와 친분이 있는 오래된 사람이 아닌가 추측합니다. 빌딩 주인과 친분이 강하므로 주인 행세를 한 것입니다. 그러니 아주 당당한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백성입니다. 하나님 백성이라는 **정체성(identity)**을 가지고 이 땅을 살아갑니까? 이 **정체성(identity)**을 확실히 하느냐, 그렇지 않느냐가 우리 인생을 크게, 아주 크게 좌우할 것입니다. 어느 누구도 함부로 할 수 없는 우리는 하나님 백성이 아닌가 돌아보아야 합니다. 동시에 하나님 백성이라며 어떻게 처신해야 하는지부터 우리 자신을 살펴보아야 합니다. 변화는 작은 것을 실천함으로써 우리에게 다가옵니다. 베드로 같은 자도 변화시키시는 주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이 땅에서 나그네로 살아가는 동안, 세상의 가치관에 물들지 않고, 믿음의 주요,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고 힘을 내야 합니다. 순간적인 상황에 흔들리지 말고 거룩한 경주를 완주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삶 자체가 하나님께 드려지는 거룩한 산 제물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의 믿음과 소망이 되시는 하나님 아버지께 무한한 영광을 돌리는 우리들이 되어야 합니다. 작은 것부터 변화되는 우리들이 될 수 있기를 권면합니다. 작은 것부터 변화를 받는 우리 모두가 되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