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이 우리를 부르신다 - 사도행전 16:6-12
6. 성령이 아시아에서 말씀을 전하지 못하게 하시거늘 그들이 브루기아와 갈라디아 땅으로 다녀가
7. 무시아 앞에 이르러 비두니아로 가고자 애쓰되 예수의 영이 허락하지 아니하시는지라
8. 무시아를 지나 드로아로 내려갔는데
9. 밤에 환상이 바울에게 보이니 마게도냐 사람 하나가 서서 그에게 청하여 이르되 마게도냐로 건너와서 우리를 도우라 하거늘
10. 바울이 그 환상을 보았을 때 우리가 곧 마게도냐로 떠나기를 힘쓰니 이는 하나님이 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라고 우리를 부르신 줄로 인정함이러라
11.우리가 드로아에서 배로 떠나 사모드라게로 직행하여 이튿날 네압볼리로 가고
12. 거기서 빌립보에 이르니 이는 마게도냐 지방의 첫 성이요 또 로마의 식민지라 이 성에서 수일을 유하다가
2007년 우리 가정이 경제적으로 극심한 고난을 겪을 때, 제조 사업을 접고 저는 갑자기 취업을 하게 됩니다. 7월 30일 면접을 보고 회장님의 지시로 7월 31일 출근했습니다. 대학교 입학 전 2년 정도 공무원 생활을 경험했지만, 이후 다른 직장으로 이직한 경력이 없던 저에게는 대부분의 직장 분위기가 비슷할 것이라 생각하고 큰 기대를 안고 출근했습니다. 이제 우리 가정이 생활하는 데 지장이 없겠구나 하는 큰 기대와 함께 오전 6시 30분까지 강남 사무실로 향했습니다.
그런데 출근 첫날 오전에 회장 비서가 울면서 집으로 돌아가 버렸습니다. 회장님의 급하고 거친 지시를 제대로 알아듣지 못하고 겁을 먹어 울면서 가버린 것이었습니다. 달랜다고 될 일이 아님을 직감했습니다. 하루 출근으로 제가 어떤 기업에 입사한 것인지를 파악하게 된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대부분 앞으로 일어날 일을 예견하며 자신의 앞날을 설계하며 나아갑니다. 이것이 정상적인 흐름입니다.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을 핍박하던 대표적인 인물이었습니다. 그런 그가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님의 음성을 듣고 근본적인 변화를 겪습니다. 이후 바울은 본인이 의도하는 바와는 전혀 다른 길로 180도 전환하게 됩니다. 우리가 이 땅을 살아가면서 나름대로 계획하지만, 주변 상황이 그렇지 못한 경우를 만나게 됩니다. 이때 우리는 왜 이런 일이 발생하는지, 하나님의 뜻은 과연 어디에 있는지 돌아볼 수 있어야 합니다.
Part 1. 예수의 영이 허락하지 아니하시는지라
6.성령이 아시아에서 말씀을 전하지 못하게 하시거늘 그들이 브루기아와 갈라디아 땅으로 다녀가
7. 무시아 앞에 이르러 비두니아로 가고자 애쓰되 예수의 영이 허락하지 아니하시는지라
8. 무시아를 지나 드로아로 내려갔는데
9. 밤에 환상이 바울에게 보이니 마게도냐 사람 하나가 서서 그에게 청하여 이르되 마게도냐로 건너와서 우리를 도우라 하거늘
바울은 1차 전도여행을 마치고 출발지인 수리아 안디옥으로 돌아옵니다. 현재 우리 시대로 말하자면 시리아 안디옥에서 출발하여 구브로(현재 국명 키프로스)까지 배로 간 후, 육지를 걸어서 키프로스를 횡단하고 다시 배를 타고 아시아(현재 튀르키예)로 들어갑니다. 이후 육로로 걸어서 튀르키예 지역의 비시디아, 루스드라, 이고니움, 더베까지 전도 여행을 갔다가 다시 왔던 길로 돌아옵니다. 돌아오면서 이번에는 구브로 섬을 거치지 않고 실루기아 항으로 직항하여 안디옥으로 돌아옵니다. 요약하면 해로와 육로를 모두 이용한 것입니다. 처음 해본 전도여행이었습니다. 교통수단이 발달되지 않은 그 시대에 엄청난 모험이었습니다. 지인도 없고, 문화도 달랐지만, 오직 복음을 전하겠다는 갈급하고 불타는 심정 하나로 약 3년간의 전도 여행을 다녀옵니다. 이때 바울의 나이는 40대 중반 정도였습니다.
미지의 세계를 전도할 때 사도 바울은 무엇을 가장 의지했을까요? 믿을 수 있는 것은 무엇이었을까요? 우선 하나님만을 의지했을 것입니다. 하나님만을 의지할 때 성령 하나님께서 그에게 앞으로 일어날 일들을 미리 보여주셨을 것입니다. 바울은 현재 튀르키예 북부를 향해 계속 북상하며 아시아 지역에만 선교를 하려고 했습니다. 그래서 비두니아로 가려고 하는데, 예수의 영이 이를 막습니다.
사도 바울은 예수의 영을 직접 다메섹 도상에서 체험한 적이 있습니다. 예수 믿는 자들을 전부 포박하여 투옥시키려고 살기등등하게 날뛸 때였습니다. 이런 체험을 한 바울은 바로 방향을 바꿔 북쪽이 아닌 서쪽으로 전환하여 또 나아갑니다. 서쪽으로 가지만 바다를 건너 마게도냐로 나아갈 생각을 못합니다. 그런데 이때 드로아까지 내려가 다시 아시아 지역, 즉 현재 튀르키예 지역으로만 전도를 하려고 합니다.
왜 그랬을까요? 바다 건너 로마 식민지에 거대한 도시가 있는 것을 잘 몰랐던 것 같습니다. 바울은 우물 안 개구리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성령님께서 환상으로 바다를 건너와 자신들을 도와달라는 환상을 바울에게 보여주신 것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본인이 익숙한 환경에 안주하려고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이 세계를 살아가면서 나름대로는 최선을 다해 살아간다고 하지만, 하나님께서 보실 때는 달리 보실 수 있습니다. 그럼 무엇이 이를 연결하는 접점인지 돌아볼 수 있어야 합니다.
주님이 임마누엘하시고, 공생애를 거치시고 승천하신 이후, 약속하신 대로 사도행전 2장에서 성령을 강한 바람과 함께 불같이 내려주심으로써 성령을 주신다는 약속을 지키십니다. 이 성령 세례는 당시 엄청난 파장을 일으킵니다. 디아스포라로 전 세계에 흩어져 살던 유대인들이 오순절을 지키기 위해 예루살렘에 모여듭니다. 이때 베드로를 위시한 제자들과 120여 명의 믿는 자들이 모인 다락방에 불 같은 성령이 강타합니다. 이들이 한 것은 주님 승천하신 이후로 오직 기도로 간구한 것이 전부입니다.
간절한 기도에 부응하셔서 하나님께서 성령의 바람을 그들에게 퍼부어주신 것입니다. 각종 언어로 방언하게 합니다. 디아스포라로 흩어진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신들이 사는 지역의 언어가 다 달랐습니다. 아람에 사는 사람들에게는 아람어로, 바사에 사는 사람들에게는 바사어로, 헬라 지역에 사는 사람들에게는 헬라어로 들리게 합니다. 당시 제자들은 갈릴리 방언으로만 소통했지만, 모여든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에게는 그들이 살아온 각국의 언어로 들리게 합니다.
파라과이 선교를 하다 귀국한 선교사에게 이런 체험을 한 것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파라과이는 원주민들이 아직도 오지 곳곳에 살고 있다고 합니다. 원주민 언어를 알 길 없는 선교사들이 한국어로 기도를 했는데, 원주민들은 자신들의 언어로 듣는다는 것입니다. 관련 사도행전 2:1-13은 다음과 같습니다.
- 오순절 날이 이미 이르매 그들이 다같이 한 곳에 모였더니
- 홀연히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어 그들이 앉은 온 집에 가득하며
- 마치 불의 혀처럼 갈라지는 것들이 그들에게 보여 각 사람 위에 하나씩 임하여 있더니
- 그들이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언어들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
- 그 때에 경건한 유대인들이 천하 각국으로부터 와서 예루살렘에 머물러 있더니
- 이 소리가 나매 큰 무리가 모여 각각 자기의 방언으로 제자들이 말하는 것을 듣고 소동하여
- 다 놀라 신기하게 여겨 이르되 보라 이 말하는 사람들이 다 갈릴리 사람이 아니냐
- 우리가 우리 각 사람이 난 곳 방언으로 듣게 되는 것이 어찌 됨이냐
- 우리는 바대인과 메대인과 엘람인과 또 메소보다미아, 유대와 갑바도기아, 본도와 아시아,
- 브루기아와 밤빌리아, 애굽과 및 구레네에 가까운 리비야 여러 지방에 사는 사람과 로마로부터 온 나그네 곧 유대인과 유대교에 들어온 사람들과
- 그레데인과 아라비아인들이라 우리가 다 우리의 각 언어로 하나님의 큰 일을 말함을 듣는도다 하고
- 다 놀라며 당황하여 서로 이르되 이 어찌 된 일이냐 하며
- 또 어떤 이들은 조롱하여 이르되 그들이 새 술에 취하였다 하더라
우리는 간혹 어떤 과업이나 업무를 수행할 때, 아무리 해도 되지 않는 경우를 체험할 수 있습니다. 이런 경우에 기도하는 사람이라면 하나님께서 인도하시는 다른 방향이 있을 것으로 보고 방향을 선회해야 할 것입니다. 00교회 이00 목사의 간증에 이런 대목이 나옵니다. 성령께서 입을 막는데 아무리 고개를 돌리려고 해도 갈고리가 혀를 낚아채듯이 잡아당기므로 꼼짝할 수 없었다고 합니다. 혀를 풀어주셔야 방향을 돌릴 수 있는데, 본인 의지와는 상관없이 방언이 그냥 터져 나오고 예언으로 진행되는 것이 그대로 보이므로 강권함을 받아 어떻게 할 수가 없더라는 것입니다.
당시 바울은 하나님만을 의지하므로 그가 아무리 발버둥을 치더라도 하나님께서 환상으로 바울이 나아갈 길을 미리 보여주셨다는 말입니다. '밤에 환상이 바울에게 보이니 마게도냐 사람 하나가 서서 마게도냐로 건너와 자신들을 도우라고 손짓합니다.' 마게도냐는 현재 그리스로, 당시 헬라 문화의 종주국으로서 대단한 영향력을 가진 국가였습니다. 당시 로마 제국이 최강국이었지만, 문화는 헬라 문화가 지배하는 시대였습니다. 헬라 문화와 로마 제국이 통치하는 지역이 바로 마게도냐였습니다. 일반적으로 선교를 할 때 강대국이 만든 질서나 문화를 많이 활용하게 합니다. 교회 근현대사를 둘러보더라도 선교 강국은 전통적으로 영국, 미국 중심으로 이루어져 왔음을 역사를 통해 알 수 있습니다.
조선도 마찬가지입니다. 대한민국으로 건국되기 이전에 조선은 가난한 나라, 열강의 침략을 당하는 약소국이었습니다. 이런 보잘것없는 나라에 미국, 호주, 캐나다 선교사들이 들어옵니다. 입국하는 젊은 선교사들은 미국 명문대학을 졸업한 20대 초중반의 엘리트들이었습니다. 이들은 무엇을 위해 조선으로 들어왔을까요? 성령님의 감동과 강권하심을 받아 자원하여 들어온 것입니다. 1882년 이후로 본격적으로 이들이 들어옵니다. 불과 100여 년 전의 일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대한민국은 선교사들이 세운 나라로 볼 수 있습니다. 이런 선교사들의 헌신과 도움으로 이승만이라는 선각자를 미국으로 강권적으로 가게 하셔서 기독교 입국론에 의거하여 건국된 나라가 대한민국입니다.
기도할 때 선교사들을 위해 기도합니다. 많은 기도 제목이 있지만, 복음을 듣고 믿지 않았던 이들이 변화될 때 복음을 전하는 선교사들 심령에 기쁨이 충만하게 해달라고 간구합니다. 한 영혼이 변화를 받아 거듭날 때 복음을 전하는 우리에게는 그것이 환희로 충만하게 될 것입니다. 마치 잃어버린 한 마리 양을 찾는 그 심정이 되는 것입니다. 이런 마음이 당시 사도 바울의 심정이었을 것입니다. 바울은 선교를 하면서 한곳에 오랫동안 체류하며 머물지 않습니다. 간혹 상대적으로 오래 체류할 수 있지만, 근본적으로 복음을 전하는 목적으로만 그렇게 조정, 조절합니다.
Part 2. 바울이 그 환상을 보았을 때
- 바울이 그 환상을 보았을 때 우리가 곧 마게도냐로 떠나기를 힘쓰니 이는 하나님이 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라고 우리를 부르신 줄로 인정함이러라
- 우리가 드로아에서 배로 떠나 사모드라게로 직행하여 이튿날 네압볼리로 가고
- 거기서 빌립보에 이르니 이는 마게도냐 지방의 첫 성이요 또 로마의 식민지라 이 성에서 수일을 유하다가
바울은 환상을 봅니다. 성령님이 그에게 보여주시는 환상을 말합니다. 우리 시대에 귀신이 웅크리고 있는 것을 보는 분들이 있습니다. 이런 말을 들으면 긴가민가 하는 생각부터 듭니다. 귀신 체험을 한 이들의 고백을 들어보면 귀신의 머리, 형태, 힘, 목소리 등을 구체적으로 묘사하여 그려줍니다. 한번은 대학원에서 강의하는 교수가 자신이 본 귀신을 설명합니다. 남자로 머리를 짧게 민 빡빡이 귀신이 한 젊은 대학원생을 집요하게 괴롭힙니다. 당시 귀신들림으로 고통받는 젊은이를 따라다니면서 의자 뒤에 숨어서 한 남자를 괴롭히는 장면이 다 보인다고 설명합니다. '아, 저 놈이 귀신이구나' 하고 말입니다. 바울이 본 환상도 이와 유사한 것일 수 있습니다.
일반적인 눈에는 보이지 않을 수 있습니다. 선교 열정에 불타는 바울에게 성령 하나님께서 보여주신 것입니다. 이에 바울은 바로 선교 방향을 마게도냐로 선회합니다. '떠나기로 힘쓰니'가 그런 의미입니다. 선교의 주체는 우리 자신이 아닙니다. 성령 하나님께서 주체이십니다. 바울은 이에 그대로 고백합니다. "하나님이 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라고 우리를 부르신 줄로" 인정한다고 고백합니다. 우리는 복음을 전하기만 하면 됩니다. 요한복음 6:44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44.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시면 아무도 내게 올 수 없으니 오는 그를 내가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리라
우리는 복음을 전하는 도구에 불과함을 인정해야 합니다. 이는 우리가 겸손해야 함을 말하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저자 누가는 사도행전을 기록하면서 '우리'라는 단어를 가끔 사용합니다. 왜 그럴까요? 선교는 혼자서 하는 것이 아님을 말해 줍니다. 특히 오늘 본문에서는 연속으로 '우리'라는 말이 3회 반복됩니다. 이는 무엇을 말해 줍니까? 선교의 방향이 전환되는 시점에서 동역자들의 공동체 의식이 더욱 절실함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1차 전도여행 때 동행했던 마가복음 저자 마가는 선교 도중에 집으로 돌아가 버립니다. 얼마나 힘들었으면 말도 없이 중도 포기하고 도망을 가버렸겠습니까? 이 일로 인해 2차 전도여행을 출발할 때, 바울과 마가의 외삼촌인 바나바는 격렬하게 충돌합니다. 바나바는 조카 마가가 아직 어려서 철없이 1차 때에는 그랬지만, 이번에는 잘할 것이라고 적극 변호합니다. 그렇지만 바울은 절대로 같이 갈 수 없다고 잘라 말합니다. 이 일로 인해 그렇게 사이가 좋던 바나바와 바울은 서로 헤어지게 됩니다. 선교 사역이 더 이상 진행되지 않을 것처럼 보입니다. 우리 눈으로만 바라볼 때 말입니다.
선교의 주체는 하나님이십니다. 이렇게 서로 분리되어 떠나는 바울에게 하나님께서는 새로운 동역자 실라를 붙여주시고, 선교를 나가니 현지에 디모데라는 동역자를 더하여 붙여주십니다. 관련 사도행전 16:1-5는 다음과 같습니다.
- 바울이 더베와 루스드라에도 이르매 거기 디모데라 하는 제자가 있으니 그 어머니는 믿는 유대 여자요 아버지는 헬라인이라
- 디모데는 루스드라와 이고니온에 있는 형제들에게 칭찬 받는 자니
- 바울이 그를 데리고 떠나고자 할새 그 지역에 있는 유대인으로 말미암아 그를 데려다가 할례를 행하니 이는 그 사람들이 그의 아버지는 헬라인인 줄 다 앎이러라
- 여러 성으로 다녀 갈 때에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와 장로들이 작정한 규례를 그들에게 주어 지키게 하니
- 이에 여러 교회가 믿음이 더 굳건해지고 수가 날마다 늘어가니라
이방을 선교해야 하는데, 디모데 어머니는 유대인이고 아버지는 헬라인인 디모데를 선교 동역자로 바울에게 붙여주십니다. 바울은 바나바와 결별한 후 힘들게 2차 전도여행을 출발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최상의 동역자 디모데를 붙여주십니다. 선교의 주체는 하나님이심을 다시 돌아보게 합니다. 그들은, 우리는 쓰임을 받은 지체들뿐임을 돌아보게 됩니다.
현재 대한민국이 처한 현실을 바라보면 만감이 교차합니다. 역사를 배울 때, 조선은 4색 당파로 망했다고 합니다. 지금처럼 거대 정당이 둘이 아니라 네 개나 되었습니다. 동인, 서인, 남인, 북인 등 말입니다. 임진왜란이 일어날 때, 일본에 사전에 밀사를 보냅니다. 밀사들의 보고를 받아보니 정반대되는 의견이 선조 왕에게 보고됩니다. 한쪽은 일본이 반드시 조선을 침략할 것이라고 하고, 다른 한쪽은 그런 일은 결코 일어나지 않는다고 보고합니다. 왜 그랬을까요? 다 알지만 반대를 위한 반대를 한 것입니다. 당시 정치 보고 및 판단 기준은 반대를 위한 반대였습니다.
현재 대한민국도 이와 흡사한 형국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다림줄을 강조하십니다. 다림줄은 하나님의 공의입니다. 공의의 기준은 옳음입니다. 우리 현 시대가 얼마나 타락했는가는 선거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자유 민주주의 체제 유지의 다림줄은 공정한 선거 시스템 유지 및 실행입니다. 이것이 무너지면 그 사회는 자유 민주주의가 파괴된 것입니다. 선거에 상식적이지 않은 일이 다수 발생합니다. 정상적인 공동체라면 부실이나 부정(不正)이 없는지? 이런 부정을 방지할 시스템은 없는지 대책을 강구해야 합니다. 그런데 양대 공당이 이를 방치합니다. 상호 카르텔이 형성되어 있음을 의심하게 합니다. 자유 민주주의 체제 유지는 합리적 선거 제도 설계와 공명정대한 투표 집행이 필수입니다.
다수당이 먼저 공의부터 돌아보아야 합니다. 우리 공동체가 왜 이렇게 변질되었을까요? 하나님의 공의를 바라는 백성들이 공의에 침묵하기 때문은 아닌가 돌아보게 합니다. 마치 조선시대 4색 당파처럼 말입니다. 진실, 공의 보다는, 국가, 공동체보다는 내 편, 우리 편이 우선되는 사고로 변질되었음을 말해 줍니다. 마치 악성 바이러스에 감염되어 치료가 불가능한 상태에 빠진 총체적 난국이 된 것처럼 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모스 선지자를 통해 다림줄을 강조합니다. 다림줄이 무너진 공동체를 용서하지 않고 반드시 심판하신다고 경고하십니다. 믿는 자들은 아모스 선지자 경고에 경각심을 가져야 합니다. 우리 모두는 자유 민주주의 제도라는 틀(시스템) 속에서 하나님을 증거하면서 예수 그리스도 공동체를 확장하므로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는 사명을 가진 자들입니다.
이런 모든 일련의 현상에는 하나님의 뜻이 있을 것입니다. 예루살렘은 이스라엘을 1000년 이상 지탱해온 하나님의 도성입니다. 이 예루살렘으로부터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한 사람들이 핍박을 받아 예루살렘을 떠나게 만듭니다. 그 기폭제가 신실한 집사 스데반이 돌에 맞아 죽음으로써 분기점이 됩니다. 이후 믿음을 가진 지체들은 인근 국가를 넘어, 아시아를 넘어 마게도냐로, 당시 최강국 로마로 들어갑니다. 복음을 들고 들어가는 것입니다.
행전 1:8.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사도 바울은 하나님께 쓰임 받은 위대한 종입니다. 바울은 성령님의 역사를 체험하고 성령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경험함으로써 선교 역사를 감당한 것입니다. 우리는 이 시대를 살아가면서 마음이 심히 불편할 수 있습니다. 상식적으로 일어날 수 없는 일을 목도하면서, 불의 앞에 동조하는 무리들을 바라보면서, 심령에 평강이 사라지고, 참담하고, 암울하며, 앞이 보이지 않는 미래에 낙담하게 됩니다. 이럴수록 전능하신 하나님, 새 길을 준비하시는 하나님 손길을 바라보며 힘을 얻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들의 안목으로 보는 것이 전부가 아닐 수 있음을 알고 겸허해야 합니다. 더 큰 것을 준비하시는 하나님, 더 좋은 것을 허락하실 하나님을 바라보면서 성령님을 의지하고 성령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간절히 바라는 우리가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2007년~2008년 경제적으로 극심한 고통을 받을 때, 앞이 보이지 않아 가쁜 숨을 몰아쉬면서 가장으로서 이 위기를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온갖 생각을 다 해봅니다. 회복되지 않으면 우리 가정은 이대로 박살 나는가 생각하니 더욱 절박하게 일을 하게 됩니다. 사무실에서 하루 4시간을 자고 힘을 다하게 되는데, 당시 2개월간 임원으로 근무한 마지막 직장에서의 훈련은 저를 강하게 만들어 주었습니다. 생존하는 방법을 배우게 됩니다. 당시 왜 하나님께서 그런 직장으로 보내셨는지 저는 하나님을 원망했습니다.
새벽 6시 출근에 시간을 절약하기 위해 교통신호를 전체적으로 위반하면서 시간을 절약하는 것을 보면서, 거친 언행도 서슴지 않는 경영진을 보면서, 생존하는 방법을 배우게 됩니다. 그때까지 온실에서 자라다가 갑자기 밖으로 내보내진 화초처럼 말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처한 현실이 힘들수록, 이해할 수 없을 때 하나님 뜻이 무엇인지, 하나님 뜻이 어디에 있는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성령님의 인도함인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고난은 우리를 강하고 담대하게 합니다. 고난만을 바라보기보다 고난 넘어 이면에 역사하시는 하나님 손길이 무엇인지 바라볼 수 있는 우리가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바울의 나아갈 길을 친히 인도하시는 성령님을 바라보고 성령님을 의지하므로, 우리는 당장 이해가 되지 않는 일이 닥쳐와도, 실망하거나, 좌절하거나, 낙담하기 보다 왜 하나님이 이런 시련을, 환난을 주시는지, 방향을 전환시키는지 겸비한 마음으로 우리 자신을, 우리 공동체를, 우리 나라를 돌아보고, 우리 공동체에 하나님의 다림줄이 내릴 때 심판을 당하지 않도록 간구하고, 하나님께서 간섭하여 주시도록 울부짖는 우리들이 되어야 합니다.
사랑하는 지지교회 여러분,
우리 시대가 아무리 힘들더라도 성령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바라보고 힘을 내고, 용기를 내고, 새롭게 도약하는 우리가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당장은 힘들고 이해할 수 없을 때라도 성령 하나님을 신뢰함으로 하나님 손길을 바라보고 힘을 낼 수 있어야 합니다. 시간을 정하여 하나님과 교통함으로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체험하고, 응답하심을 맛보며, 평강이 우리를 지배하는 지체들 되시기를 권면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