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ILY WORD

하나님의 주권

로마서 9;14-24...하나님의 주권

삶에서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을 경험할 때, 우리는 하나님의 자비와 정의에 대해 의문을 품을때가 있습니다. ‘하나님이시라면 용서해 주셔야 하는 것 아닌가? 이렇게 불의한 상황에서 하나님은 왜 침묵하시지?’ 우리의 짧은 지식과 생각으로는 하나님의 주권을 다 이해할 수 없을때가 참 많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을 우리의 기준으로 끌어내려서 불의하시다고, 선하지 않다고 판단하거나 정죄할 수는 없습니다. 비록 사람의 지식으로 다 이해할 수 없을지라도 말이죠.

오늘 본문을 통해 바울은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다 이해할 수 없는 순간일지라도, 여전히 하나님의 주권을 신뢰하고 순종해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하나님은 모든 순간에 여전히 선하신 분이며, 신실하시며, 불의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주권적 선택에는 결코 불의함이 없기 때문입니다.

서도 바울은 먼저 하나님이 공평하시다고 힘주어 말합니다. 하나님이 구원하실 자는 선택하시는 기준은, 사람의 행위나 마음이 아닙니다. 만일 하나님이 의인을 버리신다면, 그것은 분명 불의한 일일 것입니다. 그러나 이 세상에 의인은 하나도 없으며, 모든 사람은 죄인입니다. 모든 사람이 죄인인 가운데, 하나님이 구원하시는 근거는, 하나님의 ‘긍휼하심’입니다. 하나님은 에서와 야곱이 태어나기 전에 복중에서 이미 야곱을 선택하셨습니다. 하나님이 긍휼히 여길자를 긍휼히 여기신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주권입니다.

로마서 9장에 등장하는 하나님의 긍휼하심은, 출애굽기 32-33장의 금송아지 사건을 배경으로 합니다. 모세가 40일동안 시내산에 오른후, 백성들은 모세를 기다리다 지치고, 자신들을 이끌 지도자가 없는 두려움에 금송아지를 만듭니다. 그러나 이 일은 하나님의 진노를 불러오게 되고, 급기야 백성을 모두 진멸하겠다는 하나님의 선포로 이어집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자기의 목숨을 건 모세의 기도로 이스라엘 백성에게 다시 한번 살 수 있는 기회를 줍니다. 그런데 출애굽의 금송아지 사건은, 모세의 간절한 바램이나 기도나 노력이 아니라, 하나님의 긍휼하심에 의해 그들이 죽음을 면하고, 살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공로나 노력과는 무관하게 말이죠.

우리는 종종 ‘나’의 의로움을 자랑하거나 다른 사람과 자신을 비교하면서 하나님의 공의를 평가하려는 유혹에 빠지곤 합니다. 구원의 이유를 은혜가 아닌 조건에서 찾으려는 죄인된 모습이 여전히 우리에게 남아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구원의 조간과 동기의 출발은, 하나님의 긍휼입니다. 죄인을 긍휼히 여기시는 그분의 자비하심입니다. 하나님의 긍휼하심이 없었다면, 이스라엘은 광야에서 금송아지 사건때 이미 모두 멸망당했을 거예요. 하나님의 긍휼이 없었다면, 죄인인 우리에게는 구원의 복음 자체가 없었을 거예요. 그러므로 구원의 시작이자 복음의 시작은 곧 하나님의 긍휼입니다. 그러니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입고 구원받은 성도가 어찌 하나님께 감사의 찬송을 올려드리지 않을 수 있을까요?

복음으로 인한 구원은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달음박질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의 긍휼하심입니다. 하나님은 긍휼히 여길 사람을 긍휼히 여기시고, 불쌍히 여길 사람을 불쌍히 여기십니다. 이것은 사람의 의지나 노력이 아니라,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께 달려 있습니다. 이 진리를 따라 성도의 구원은 형편이나 삶의 모습에 따라 흔들리지 않습니다. 또한 구원받은 성도가 자기의 의를 주장할 수도 없습니다.

사람은 죄로 인해 타락한 존재로 하나님과 원수가 되었기 때문에, 하나님이 모든 인간을 심판하셔도 우리는 할말이 없는 자들입니다. 인간의 전적인 타락을 인정한다면, 하나님이 이 세상에서 단 한명의 인간만 구원하신다고 하셔도 우리는 하나님께 따질수 없습니다. 심판받아 죽어야 마땅한 사람들중에 구원할 자를 선택하시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하나님의 주권적 결정일뿐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리고 그 가운데 구원받은 우리가 마땅히 반응해야 하는 것은 감사와 찬송뿐입니다.

인류의 역사를 살펴보면, 하나님의 택함은 우리에게 구원을 주고, 생명을 주시는데, 하나님의 택함을 통해 두 가지가 드러납니다. 하나는 하나님의 은혜로 택함받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은혜와 구원을 찬송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는 것이죠. 또 하나는 택함받지 못하고 버림받아 심판을 받는 입장에서도 하나님의 공의가 드러남으로 인해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신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애굽의 바로가 이런 경우입니다.

하나님은 바로를 애굽의 왕으로 세우시고, 그를 통해 자신의 권능을 나타내시고, 모든 민족에게 하나님의 이름을 나타내셨습니다. 하나님이 어떻게 일하시는지, 하나님이 당신의 백성을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알리셨습니다. 성경은 바로가 스스로 마음을 악하게 한 것과, 당신의 주권에 따라 일하시는 하나님이 선하시고 옳으심을 강조합니다. 이를 통해 죄에 대한 하나님의 공의가 드러남으로써, 하나님께서는 불법을 행하지 않으시고, 불의하지 않으시며, 정의롭고 공의로운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나타내셨습니다. 하나님이 불의를 심판하시면서 하나님의 공의로우심이 찬양을 받게 됩니다.

이것은 마치 법정에서 죄인들이 심판을 받는 것이 정의이며, 박수받는 것이 마땅한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범죄한 자들이 그에 상응하는 형벌을 받는 것이, 법의 공의를 드러내는 것이니까요. 그런데 법정에서 죄인이나, 죄가 없는 사람이나 상관없이 다 은혜를 베풀고, 사랑과 용서를 받는다면, 그 법정은 정의가 사라진 것입니다. 법은 정의와 공의가 바로 선포될 때에 박수를 받는 것입니다.

우리 가운데 드러나는 하나님의 주권을 오늘 본문에서 바울은 토기장이에 비유합니다. 토기장이가 진흙을 가지고 그릇을 만듭니다. 토기장이가 어떤 그릇을 만들든지 그를 비난할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작은 밥공기를 만들든, 큰 대접을 만들든 그것은 토기장이 마음입니다. 예쁘고 귀하게 만들어서 장식장에 보관용으로 만들수도 있고, 덜 이쁘지만 일상에서 사용할 수 있는 그릇으로 만들어 사용할 수도 있습니다. 진흙은 전적으로 토기장이의 소유이기에, 토기장이가 마음대로 사용하여 만들 수 있습니다. 토기장이의 선택은 정당합니다. 무엇을 선택하든 비난받지 않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이 타락한 인간에게 긍휼을 베풀든, 진노를 베풀든 그것은 하나님 마음입니다. 누구도 간섭할 권한이 없습니다. 하나님이 어떻게 결정하시든 하나님께는 불의함이 없습니다. 귀히 쓸 그릇과 천히 쓸 그릇을 나누어 만드시는 토기장이에게 진흙이 불평할 수 없듯이, 불의함이 없는 하나님께 인간은 불평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비난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이해할 수 없다고 하나님의 주권을 거부할 수 없습니다.

피조물인 사람과 하나님은 다릅니다. 피조물인 사람이 창조주이신 하나님께 반문할 수 없습니다. 토기장이가 진흙을 가지고 어떤 그릇을 만들든, 그릇은 따질 수 없습니다. 사람은 하나님의 구원을 감히 평가하거나 판단할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사람을 물건처럼 대하지 않으시고, 말씀하시고 인격적으로 소통하십니다. 오래 참으시고 관용을 베푸십니다. 얼마나 놀라운 은혜입니까?

예수님을 믿고 날마다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사람들은 이 사실에 감격할 수밖에 없습니다. 진노의 그릇을 영광의 그릇이 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인격적으로 반응하며 순종하는 사람들은, 모두 그 은혜를 담기에 합당한 영광의 그릇으로 선택받은 자들입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말씀하시고 말씀대로 역사하십니다. 그 말씀 앞으로 나아가는 복된 은혜가 오늘도 충만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죄인이 나를 구원하신 하나님의 긍휼은 어떻게 나타나나요? 나의 삶에서 하나님의 권한이기에 항변할수 없는 일은 무엇이 있나요?

오늘도 샬롬 ~~

14.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하나님께 불의가 있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
What then shall we say? Is God unjust? Not at all!

15. 모세에게 이르시되 내가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고 불쌍히 여길 자를 불쌍히 여기리라 하셨으니
For he says to Moses, “I will have mercy on whom I have mercy, and I will have compassion on whom I have compassion.”

16. 그런즉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달음박질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음이니라
It does not, therefore, depend on human desire or effort, but on Godʼs mercy.

17. 성경이 바로에게 이르시되 내가 이 일을 위하여 너를 세웠으니 곧 너로 말미암아 내 능력을 보이고 내 이름이 온 땅에 전파되게 하려 함이라 하셨으니
For Scripture says to Pharaoh: “I raised you up for this very purpose, that I might display my power in you and that my name might be proclaimed in all the earth.”

18. 그런즉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고 하고자 하시는 자를 완악하게 하시느니라
Therefore God has mercy on whom he wants to have mercy, and he hardens whom he wants to harden.

19. ○혹 네가 내게 말하기를 그러면 하나님이 어찌하여 허물하시느냐 누가 그 뜻을 대적하느냐 하리니
One of you will say to me: “Then why does God still blame us? For who is able to resist his will?”

20. 이 사람아 네가 누구이기에 감히 하나님께 반문하느냐 지음을 받은 물건이 지은 자에게 어찌 나를 이같이 만들었느냐 말하겠느냐
But who are you, a human being, to talk back to God? “Shall what is formed say to the one who formed it, ‘Why did you make me like this?’ ”

21. 토기장이가 진흙 한 덩이로 하나는 귀히 쓸 그릇을, 하나는 천히 쓸 그릇을 만들 권한이 없느냐
Does not the potter have the right to make out of the same lump of clay some pottery for special purposes and some for common use?

22. 만일 하나님이 그의 진노를 보이시고 그의 능력을 알게 하고자 하사 멸하기로 준비된 진노의 그릇을 오래 참으심으로 관용하시고
What if God, although choosing to show his wrath and make his power known, bore with great patience the objects of his wrath—prepared for destruction?

23. 또한 영광 받기로 예비하신 바 긍휼의 그릇에 대하여 그 영광의 풍성함을 알게 하고자 하셨을지라도 무슨 말을 하리요
What if he did this to make the riches of his glory known to the objects of his mercy, whom he prepared in advance for glory—

24. 이 그릇은 우리니 곧 유대인 중에서뿐 아니라 이방인 중에서도 부르신 자니라
even us, whom he also called, not only from the Jews but also from the Gentiles?